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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50)

26화

Chapter 4. 폐허에서 자라난

“레티시아 님, 오늘도 정원으로 가시나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그럼 따뜻하게 입으셔야겠네요. 전하께서 바깥나들이를 좋아하시니, 준비하는 것도 일이에요.”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면서 수선을 떠는 애슐리를 보니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오늘도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정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애슐리는 음식을 가득 담은 귀여운 바구니까지 레티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많이 춥길래 따뜻한 레몬차를 넣어 봤어요. 혹시 전하께서 너무 시다고 싫어하시면 말해 주세요.”

“직접 점심을 준비하셨어요?”

레티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많은 고용인들이 그만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황태자 궁의 관리 상태와, 올라오는 음식의 수준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바보일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직속 하녀인 애슐리가 직접 요리까지 해야 할 정도라니.

“레티시아 님,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거예요! 확인해 보니 마실 걸 빠트렸길래 레몬차를 챙겨 넣은 거예요. 당연히 달라고 해서요.”

애슐리가 황급히 수습했으나 레티시아의 의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중에 내려가서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어.’

준비를 모두 마친 레티시아는 제법 묵직한 바구니를 들었다.

더는 호르헤 경이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기에, 미카엘의 침실까지는 그녀 혼자서 가야 했다.

“같이 갈까요?”

“괜찮아요.”

레티시아는 가볍게 거절했다. 고용인들이 많이 줄어든 탓에 애슐리가 할 일은 갈수록 늘어났다.

괜한 부담을 하나 더 지우고 싶지가 않았다.

휑한 복도를 걸으니 조금 무서웠지만, 이미 수족을 잃은 미카엘을 암살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침실을 지키고 있는 보초에게 이름을 얘기한 후,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간 후.

미카엘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침실에서 나왔다.

빗질 한번 하지 않았는지 뒤엉켜 빛을 잃은 금발과 서툰 솜씨로 낑낑거리며 입은 티가 역력한 옷에 가슴이 아팠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실각한 호르헤 경이 떠나고서 한 달이 흘렀다.

다행히 호르헤 경은 처형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과 마지막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수도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레티시아는 이미 떠난 사람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이런 순간마다 호르헤 경이 황태자 궁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가 뼈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미카엘은 호르헤 경이 처리하던 일들을 인계받았다.

레티시아 역시 미카엘의 곁에 있었지만 경영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두 아이가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들이었다.

결국 둘은 호르헤 경이 평소에 처리하던 방식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 주 후.

그들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바로 황태자 궁이 매달 황실에서 받는 돈보다 더욱 많은 돈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의 착복을 의심했다.

하지만 금세 그녀는 되레 호르헤 경이 사비를 퍼부어 황태자 궁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황실에서 황태자 궁에 배정하는 예산이 턱없이 적다는 데 있었다.

호르헤 경이 왜 재정을 졸라매지 않았는지, 왜 오히려 더 많은 고용인과 더 우수한 교사들을 고용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미카엘이 초라하게 보여서는 안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호르헤 경의 생각이었고, 위기에 빠진 두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빚더미에 앉게 된다면 황태자 칭호마저 박탈당하거나, 처음 보는 귀족의 보호를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해결책은 간단하지만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웠다.

머뭇거리던 레티시아보다 앞선 건 미카엘이었다.

‘칼.’

미카엘의 뜻은 명료했다.

필수적인 부분들만 남기고 모두 도려내야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도저히 옛 동료들처럼 느껴지는 황태자 궁의 고용인들을 내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줄일 만한 소비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는 명마들을 절반으로 줄이고, 매달 당연한 듯 들어오던 사치품 구매를 끊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덕분에 레티시아는 황태자 궁의 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지만 생각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태자 궁의 고용인들 사이에 끈 떨어진 황태자가 곧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지출을 줄이는 것 역시 그 소문을 뒷받침했다.

레티시아는 우르르 빠져나가는 고용인들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되레 그 노력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탓인지 최근에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그만두는 고용인이 적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언젠가는 이 넓은 궁에 그녀와 미카엘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을지 모른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카엘이 혼자 남지는 않으리라.

‘전하를 잘 부탁하네.’

호르헤 경의 그 말이, 레티시아의 발을 이 가련한 황태자에게 완전히 묶어 버렸으니까.

“전하, 아침은 드셨어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입맛이 없어도 좀 드셔요.”

미카엘은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아침을 먹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몇 번씩 그 이유를 물었지만 미카엘은 대답을 거부할 뿐이었다.

직접 주방에 찾아가 확인해 보았으나 황태자의 식사만큼은 매번 정성스레 차려져 올려졌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 한들 황태자를 박대할 간 큰 고용인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은쟁반에 올려진 맛깔스러운 음식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돌려보내졌다.

처음에는 몸이 좋지 않은가 싶어 의사를 불렀는데, 미카엘이 무척 건강하다는 진단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레티시아가 가져오는 음식들은 항상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미카엘을 보니 의사가 딱히 돌팔이도 아닌 듯했다.

결국 레티시아가 생각해 낸 해결책이라곤 애슐리에게 더 많은 음식들을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미카엘이 성장기라 그런지 많이 먹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뭐,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레티시아는 애슐리가 챙겨 준 음식 바구니를 미카엘의 눈앞에 들어 올렸다.

미카엘이 눈을 반짝 빛내며 레티시아의 손을 잡았다.

호위 두 명이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미카엘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하며 레티시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러시네.’

하지만 그녀는 두 쌍의 눈이 빤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미카엘에게 오늘만큼은 정원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구름.”

“네. 구름이 별로 없어요. 산책하기 좋은 날씨네요.”

“눈.”

“…그럼요.”

레티시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들에게는 미카엘이 정원에 쌓인 눈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들렸겠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미카엘은 눈이 내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즉, 오늘도 그들의 행선지는 정원이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호위 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하께서 두 분이 계속 따라다니시니 불편하다고 하셔서요. 어차피 정원은 전하께서 잘 아시니, 따뜻한 곳에서 쉬고 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우즈 양.”

호위는 레티시아를 향해 깍듯이 대답했다.

우습게도 레티시아의 황태자 궁에서의 위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딱히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미카엘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레티시아라고 생각했으니까.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에게서 그녀가 오기 전 미카엘의 기행에 대해 몇 마디 들은 적 있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이 그렇게나 흔했다고.

황태자 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미카엘이 그녀가 오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호위들이 사라지자마자 미카엘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전하, 좀, 천천히 가 주세요.”

레티시아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녀를 흘낏거리며 돌아볼 뿐 걷는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어제 갔던 곳일까? 아니면 다른 곳?’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이 떠난 바로 다음 날부터 미카엘이 그동안 어떻게 신출귀몰하게 황태자 궁을 나다닐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카엘은 별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 벽면은 물론 천장이나 바닥에서도 비밀 공간을 곧잘 찾아내었다.

처음엔 레티시아는 기절초풍하며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거부했지만, 곧 미카엘이 인도하는 다양한 공간들에 익숙해졌다.

어쨌든 미카엘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호르헤 경이 떠나 불안에 휩싸인 상태일 터.

장단을 맞춰 줘서 나쁠 건 없었다. 일종의 응석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미카엘은 주방으로 가는 복도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커다란 태피스트리를 들추었다.

‘여기구나.’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듯한 어두컴컴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티시아는 주머니 속에 늘 넣어 두는 자그마한 등잔을 꺼내 불을 붙였다.

미카엘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전하!”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소리쳐 불렀지만 한창 제멋대로 움직일 나이의 소년이 멈출 리가 없었다.

‘저러다가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둠 속을 달려가는 레티시아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졌다.

여태까지 미카엘이 발견한 비밀 공간들은 잠시 동안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에 불과했다.

‘이건… 비밀 통로잖아.’

대체 이것들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마치 이 통로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확신에 차 달려 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레티시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그를 놓쳐 버리기 직전에 멈추었다.

“전하께서 한번 이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뛰어 보세요. 그럼 절 배려할 마음이 조금이나마 드시겠죠.”

투덜거리던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시선이 한자리에 못 박힌 듯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전하?”

레티시아의 시선 또한 자연히 미카엘을 따라갔다.

“……!”

해골의 텅 빈 동공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온몸의 힘이 사르르 풀렸다.

다행히 등잔과 바구니를 떨어지기 직전 부여잡을 수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미카엘이 들여다보고 있는 공간엔 백골 수십 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 나가야……. 전하, 어, 얼른 여기서 빨리 나가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해골 무더기로 성큼 다가갔다.

“전하!”

“보물.”

“…뭐, 뭘 찾으시게요?”

레티시아는 저 두렵기만 한 해골 무더기로 다가가는 미카엘을 붙잡고 싶었지만, 도저히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벌벌 떨리는 손으로 등잔을 들어 미카엘을 비추는 것뿐이었다.

미카엘은 마치 이런 일을 숱하게 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해골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아니, 더듬어 보았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손으로 샅샅이 뒤졌으니까.

‘그거야.’

불현듯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미카엘은 해골 더미에서 무언가를 찾는 중이었다.

대체, 무엇을?

의구심은 수십 분을 기다린 후에야 풀렸다.

미카엘은 유난히 많이 파괴된 해골의 갈비뼈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끄집어내었으니까.

‘…뭐지?’

레티시아는 용기를 쥐어짜 미카엘을 향해 다가갔다.

“전하, 뭘 주우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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