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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150)

27화

하지만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다가오자마자 곧바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좀 볼게요.”

“…….”

“싫어요?”

미카엘은 입을 꾹 다문 채 황급히 손에 든 걸 품속에 감추었다. 아무래도 미카엘이 찾은 지저분한 유물이 뭔지 알아내려면 몸싸움이라도 벌여야 할 듯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이 해골로 가득 찬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미카엘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저한테 숨기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숨기세요. 그렇게 찜찜한 물건, 저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폭풍우.”

“제가 못됐기는요! 전하께서 열 배는 더…….”

레티시아의 말은 미카엘의 배에서 우렁차게 튀어나온 꼬르륵, 하는 소리에 멈추었다.

마침 손에 든 바구니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던 차였다.

“점심 드셔야겠네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먼지로 시꺼멓게 변한 손에 흠칫하고 놀랐다.

‘저런 손으로 점심은 무슨.’

미카엘은 해골 더미를 한참 헤집었다. 당연히 손이 무척 불결해졌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당장 미카엘이 손을 씻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하, 어디 씻을 만한 곳은 모르세요?”

레티시아는 굳이 다른 고용인들이 전부 눈치챌 정도로 수선을 떨어 가며 미카엘을 씻길 생각이 없었다.

“태양.”

“네. 그렇겠죠…….”

황태자 궁의 미로 정원에는 손을 담그면 기분이 좋을 정도로 적당한 온도의 물이 흘러나오는 인공 폭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 말고요. 비누라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이 좋지 않을까요? 뼈, 뼈를…….”

레티시아는 차마 미카엘이 해골들을 헤집었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태양.”

미카엘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레티시아의 엄한 눈길에 굴복하고 말았다.

“…도서관.”

“네. 어디죠?”

미카엘의 말은 그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도서관으로 가자는 뜻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씻을 만한 곳을 알고 있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오리.”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히려 전하께서 새끼 오리가 아닐까요?”

새끼 오리는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상대를 어미로 인식해 졸졸 따라다닌다.

미카엘은 그런 새끼 오리처럼 자신을 따라오라는 의도로 말했겠지만, 어딜 보아도 자신에 대한 미카엘의 태도가 아닌가.

레티시아의 진지한 되물음은 미카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기 오리.”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들키지만 않게 조심하세요.”

손은 물론 옷까지 더럽힌 미카엘을 다른 고용인들이 본다면 레티시아에게 질문을 퍼부을 것이다.

당연히 그 사실이 호르헤 경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아차.’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호르헤 경은 더는 황태자 궁에 없다.

이제 복도를 돌아다니는 더러운 황태자에 대한 소문이 퍼져도 그녀를 추궁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미카엘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싫어.’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완벽한 황태자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목숨만을 근근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바보 황태자가 아니라.

미카엘은 익숙한 듯 복도를 내달렸다.

레티시아는 그를 쫓다가, 문득 미카엘이 특이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렇게나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열 살짜리 소년은 작은 기척에도 흠칫 몸을 떨었고, 기둥 뒤나 조각상 그림자 밑으로 곧잘 몸을 숨겼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그를 따라서 움직였다.

똑같이 따라 하지 않을 때면, 미카엘의 모습을 열에 일고여덟 번은 놓쳐 버리고 말았으니까.

문득 레티시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미카엘은 이렇게 호위들을 따돌려 온 거였어.’

미카엘의 움직임은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특별할 게 없는 움직임들이 레티시아와 미카엘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침묵을 깨어 정해진 움직임을 흩트려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 기이한 자유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에.

마침내 미카엘이 멈춰 섰다.

평범해 보이는 창문이었지만, 레티시아는 별로 의아해하지 않았다.

비밀 장소들은 절대 그럴 법하지 않은 곳에서도 튀어나왔으니까.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창문을 통해 찬란한 햇살이 복도에 쏟아졌다.

미카엘은 햇살에 빛이 유난히 바랜 벽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두 손으로 특정 지점을 꾹 눌렀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치찰음이 들리자 가슴이 뛰었다.

미카엘이 새로운 비밀 공간을 자신에게 보여 줄 때마다 심장이 기대감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콩닥거리곤 했다.

잠시 후, 벽면엔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크기의 통로가 나타났다.

“엄지.”

“…전하가 먼저 들어가셔야죠.”

레티시아는 앞서 달라는 미카엘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미카엘이 그녀를 해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미카엘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편이니 이 비밀 공간 역시 한 번은 들러 본 곳일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장난기가 제법 많은 편이었고, 레티시아는 또 비밀 장치로 인해 혼비백산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또 뭐로 절 놀라게 하시려고요? 안 속아요.”

“비트.”

미카엘은 새빨간 속과 겉이 같은 비트를 거짓말이 아니라는 의미로 쓰곤 했다.

“절 또 속이려 들지 마세요. 세 번 속는 바보가 될 수는…….”

레티시아의 말은 미카엘의 반짝이는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끊어졌다.

“저, 전하?”

레티시아는 당황하며 미카엘을 불렀다.

미카엘은 빠르게 주먹으로 눈을 비볐지만, 그럴수록 티만 더 날 뿐이었다.

“울지 마세요…….”

레티시아는 이제 몸을 떨고 있는 미카엘을 토닥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지만 소년의 완강한 거부 반응에 부딪혔다.

‘어, 어쩌지.’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여태껏 눈물을 흘리는 쪽은 레티시아였다.

열 살에 불과한 나이에 별별 일을 다 겪어 오면서도 울지 않았던 미카엘이, 고작 자신의 장난기 어린 거절에 울다니.

불행히도 레티시아는 누군가를 달래 주는 덴 영 재주가 없었다.

“전하, 이러다 들키겠어요.”

“…….”

레티시아는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후회했지만 놀랍게도 효과가 제법 있었다.

미카엘은 눈물을 대충 손으로 문지르더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레티시아 역시 그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미카엘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그를 앞세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는 기이할 정도로 어두워 등잔의 미약한 불빛을 모조리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만 좁은 통로에 울려 퍼졌다.

다행히 어둠은 금방 끝나고, 금세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앞을 미카엘이 거의 가로막고 있어 답답해진 레티시아는 까치발을 들어 앞을 살폈다.

‘……!’

레티시아는 순간 깜짝 놀라 몸을 휘청인 나머지 미카엘과 크게 부딪힐 뻔했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다음, 다시 까치발을 들었다.

조금 전 자신을 놀랜 광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거울처럼 맑고 반짝이는 연못이 쏟아지는 햇빛을 한가득 담고 일렁거렸다.

‘연못이 아니야.’

웬만한 무도회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 정도면 호수라고 불러야 하리라.

미카엘이 통로를 빠져나가며 조용히 길을 비켜 주었다.

레티시아는 한 걸음 내디뎠다. 미카엘의 어깨 너머로는 알 수 없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프를 벗어도 될 정도로 따스한 공기가 레티시아를 감쌌다. 뻥 뚫린 하늘에서는 빛이 쏟아졌지만 외부의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로 만든 천장이야.’

레티시아는 아무런 장막도 느껴지지 않는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신기하게도 유리 너머로 보이는 태양이 더욱더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앙의 호수를 제외하곤 모두 대리석이 깔려 있었는데, 분명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을 텐데도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대리석과 호수, 그리고 유리로 만든 천장.

대체 왜,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 방법도 연유도 모를 공간이었으나 레티시아가 여태껏 본 그 어느 호화로운 궁궐 속 방보다도 아름다웠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그제야 미카엘이 그녀가 앞서길 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레티시아가 누구보다도 먼저 보기를 원한 것이다.

“오해해서 죄송해요, 전하.”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떨리는 미카엘의 손을 통해 그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 정말 예쁘네요……. 왜 저를 먼저 들어가라고 하셨는지 알겠어요.”

“…….”

“하지만 전하의 등 뒤에서 봐도 정말… 아름답네요.”

호수를 바라보는 레티시아의 눈이 햇살을 머금은 듯 금빛으로 일렁거렸다.

“머리카락.”

미카엘의 손가락이 어깨 위로 흩어진 레티시아의 머리카락을 살짝 스쳤다.

“아, 그런가요?”

레티시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미카엘이 ‘좋다’를 뜻하는 단어는 점점 많아졌는데, 레티시아의 머리카락도 그중 하나였다.

본디 레티시아는 패딩턴이 항상 놀려 댔던 자신의 빨간 머리칼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레티시아의 머리칼이 누군가의 입에 올려지는 건 오직 조롱을 위해서였는데.

하지만 미카엘이 거듭 그녀의 머리카락을 선호의 의미로 쓸수록 과거의 일은 점차 퇴색되었다.

레티시아는 어렸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직 마르지 않은 진흙처럼 무른 법이었으니까.

“어서 씻고 점심 먹어요.”

레티시아는 바구니와 등잔을 티 한 점 없는 대리석 위에 올려다 놓은 다음 호수로 다가갔다.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맑은 호수에 손을 씻자니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이 물들도 다 고여 있는 물이 아닐까? 당연히 더러워질 텐데…….’

그녀가 잠시 머뭇거릴 때였다.

풍덩!

레티시아는 황급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 전하!”

레티시아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미카엘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호수에 그대로 잠수하고 있었다.

“저, 전하!”

곧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잘.

수영을 어렵다는 의미로 쓰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새 완벽하게 터득한 걸 보니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일었다.

작은 머리가 쑥 하니 호수 위로 나와 레티시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레티시아는 밝게 웃으면서도 미카엘을 타박했다.

“놀랐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들어가시면 여기 물이 더러워지겠…….”

레티시아의 말은 또 다른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미카엘이 호숫가에 앉아 그를 바라보던 레티시아를 예고도 없이 물속으로 잡아당긴 탓이었다.

레티시아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물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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