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수, 수영!’
다행히 레티시아는 수영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산에는 제법 큰 계곡이 있었고, 여름 더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되면 잠시 수영을 하는 게 그녀의 생존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닥이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깊은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건 처음…….
“아!”
레티시아의 입에서 놀라움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미카엘이 그녀를 호수 안으로 끌어당긴 순간, 레티시아는 차디찬 물을 예상하고 눈을 꽉 감으며 팔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무언가는 결코 물이 아니었다.
‘구름에 잠긴 것 같아.’
언뜻 솜과 비슷한 고체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형체가 없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니 분명 액체의 일종이리라.
바닥에 발이 전혀 닿지 않을 정도의 깊이임에도 기묘한 부력이 몸을 받쳐 주어 손쉽게 수면 위로 머리를 내놓을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이 안락한 액체에 그대로 익사하고 싶은 욕망과 맞서 싸워야 했다.
“레티시아.”
정신을 차리니 코앞까지 다가온 미카엘이 보였다.
아니, 실은 그 반대였다.
그녀의 가슴팍을 잡아당긴 미카엘의 팔이 여태까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
레티시아는 그제야 둘의 거리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레티시아는 곧바로 미카엘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그녀의 가슴께를 붙잡은 미카엘의 손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미카엘이 이렇게나 힘이 셌나?’
“전하, 놓아주세요.”
“…아.”
미카엘은 의미 모를 신음을 내며 손에서 힘을 뺐다.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액체에서 빠져나왔다. 조금만 더 안에 있었다간 그만 평생을 머무르고 말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대리석 바닥에 반쯤 드러누워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이한 액체에 잠겨 있다 빠져나왔으니 숨이 가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가뿐했다.
“레티시아.”
다행히 미카엘은 그녀를 따라 호수 밖으로 바로 나온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여기, 위험한 곳 아니에요? 아주 사람 잡겠네.”
미카엘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레티시아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위험한 곳으로 끌어들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조금은 불평하고 싶었다. 미리 설명을 해 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미카엘에게는 그렇게 말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불평만 늘어놓았지만.
‘……?’
미카엘의 대답은 이번에는 소리 없는 방식이었다.
그는 양손을 좍 펼쳐 레티시아에게 보여 주었다. 레티시아는 기가 막혀 잠시 눈알만 굴렸지만 금세 그 뜻을 알아차렸다.
분명 먼지로 시커맸던 손이 비누로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씻은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미카엘의 손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생각해 보면, 단순히 물에 씻겨졌기 때문이라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 못지않게 더러웠던 옷 또한 새것처럼 보였다.
곧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옷이 젖어 있지도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심지어 자신의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깨달음이 레티시아의 머리를 스쳤다.
‘여기, 애초에 씻는 곳이었을지도 몰라.’
레티시아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과 거울처럼 맑은 호수, 티 한 점 없이 투명한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책에서 만들어진 연유도 시기도 알 수 없는 장소들이 황궁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읽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곳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정화야.’
더러워진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해 주는 정소.
그 증거로 레티시아의 몸은 근래 들어 가장 가뿐했으며 마음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과 옷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걸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
레티시아는 순간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고 말았다. 미카엘이 조금 놀란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레티시아는 본능적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마구 헝클어졌었던 미카엘의 머리칼은 금사처럼 찰랑거렸고, 스펙트럼이 다양한 푸른빛을 오가는 눈은 평소보다 훨씬 반짝거렸다.
레티시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호수는 단순히 정화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열 살에 불과한 소년이 왜 이렇게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는 말인가?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기겁하는 원인이 바로 그 자신이라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계속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며 레티시아에게 따라붙었으니까.
결국 레티시아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전하, 제가 지금 조금 힘들어서요……. 조금만 물러서 주세요.”
차마 진실을 그대로는 말할 수 없었다.
‘분명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레티시아는 숨죽여 미카엘의 반응을 기다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기척을 통해 자신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리고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
미카엘은 그녀가 물러나 달라고 부탁했던 지점에서 정확히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감… 딸꾹.”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기가 막히게도 딸꾹질이 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미카엘이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잘생겨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쳤구나,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속으로 자신을 크게 꾸짖었다.
“거울?”
레티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카엘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갸웃거렸기 때문이었다.
‘전하가 그걸 어떻게……! 아니야, 그냥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아서 그럴 거야.’
순간 천당과 지옥을 오간 레티시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하. 그냥 좀 어지럽네요. 이 호수가 어떤 건지는 몰라도, 쉽게 들어갔다가 나올 만한 덴 아닌가 봐요. 이런 부작용이 생긴 걸 보니까…….”
“신기루.”
두어 달 전, 그들은 슈베러 교수에게서 신기루라는 현상에 대해 배웠다.
그때부터 미카엘은 누군가가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보고를 할 때마다 그 표현을 썼다.
처음 그 표현을 들었을 땐 섬세한 의미에 감탄했는데, 정작 자신이 그 말의 대상이 되니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레티시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을 때였다.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자신이 어디론가 이끌어 줄 테니, 손을 잡으라는 의미였다.
레티시아는 무심코 미카엘의 손을 잡았다가 소스라치고 말았다. 미카엘이 곧장 호수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또, 또 저를 저기에 밀어 넣으시려는 거죠?”
“모래.”
모래알만 한 가능성도 없다는 뜻의 대답이 돌아왔다.
레티시아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엔 미카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어쨌거나 미카엘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이 이렇게 겁에 질려 있는데 또 장난을 칠 만큼 철이 없지도 않았다.
“촛불.”
보라는 의미.
‘뭘 보라는 걸까?’
레티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미카엘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갔다.
그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호수 위에 아른거리는 무언가를…….
‘……!’
금안이 크게 열렸다.
맑은 호수는 거울처럼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었다.
호수가 비추는 상에 별다른 왜곡이 없다는 건 물에 빠지기 전 확인한 터였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미카엘만 봐도 물에 비친 상이나 실제 모습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호수에 맺힌 자신의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호수에는 여태껏 그녀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레티시아 우즈가 있었다.
아무리 빗어도 산발이었던 붉은 머리는 찰랑거렸고, 겨울이라 제법 텄던 입술과 손등은 딱지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별을 감싸 안은 것처럼 빛나는 금안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술, 갸름하고 발그레한 볼은 어딜 보아도 미인이라 할 법했다.
레티시아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미카엘도……!’
자신이 미카엘에게 반절 홀렸던 이유가 드러났다.
이 호수는 몸과 마음에 묻은 오물을 씻어 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외모를 빛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레티시아는 다시 미카엘을 흘낏 바라보았다.
‘…날 보고 있잖아.’
얼굴이 달군 돌처럼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여전히 평소보다 곱절은 잘생겨 보이는 미카엘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전하, 보지 마세요. 이건 제가 아니잖아요…….”
“거울.”
너도 거울처럼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냐는 반박이 돌아왔다.
미카엘의 따스한 손이 레티시아의 손등에 와 닿았다.
레티시아는 결국 손을 내려, 그 어느 때보다도 부담스러운 미카엘의 눈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어설픈 침묵에 미소로 답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한동안 보고 있기만 하면서 서 있었다.
레티시아가 이 불편한 침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오직 애슐리가 전해 준 도시락 때문이었다.
‘…점심!’
“전하, 점심 드셔야죠!”
레티시아는 잠긴 물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미카엘은 아쉬운 듯 레티시아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점심 바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레티시아는 빠르게 바구니에 든 음식을 바닥에 펼쳤다.
애슐리가 챙겨 준 음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면서도 달큼한 빵, 신선한 과일, 잘 구운 통통한 햄, 그리고 애슐리가 말한 따뜻한 레몬차까지…….
호르헤 경이 있었을 적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레티시아에겐 여전히 호화롭게 느껴졌다.
“전하, 어서 드세요.”
“엄지.”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 먼저 먹으라고 말하며 음식을 밀어 주었다.
레티시아는 푸흡 웃었다.
황궁, 아니 이 제국 어딜 가도 그녀에게 식사를 양보하는 사람은 이 황태자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레티시아는 이럴 때만큼은 눈앞의 소년이 자신이 하늘처럼 모셔야 할 황태자라는 사실도 잊고 그저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다.
미카엘이 그 미소를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 * *
일과는 밤늦게야 끝났다. 미카엘이 레티시아와 헤어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하, 이젠 주무실 시간이에요.”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이럴 땐 정말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한참을 달랜 다음에야 미카엘은 겨우 침실로 향하는 발을 뗐다.
미카엘의 침실은 거대한 집무실을 통과해야 갈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동안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힘을 주어 집무실 문을 열었다.
‘……?’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둠에 반쯤 잠긴 낯선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