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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150)

29화

어슴푸레한 빛으로도 제법 덩치가 큰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항상 이렇게 늦으십니까?”

낯선 목소리, 낯선 말투. 레티시아의 몸이 팽팽히 긴장했다. 그녀는 미카엘을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누구시죠?”

“너 같은 천것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남자의 말과 동시에 가해진 악력에 레티시아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눈물 하나 보이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바닥에 부딪친 팔꿈치가 쓰라렸다.

그때였다.

미카엘이 입을 연 건.

“책상.”

“책상 말씀이십니까?”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전혀 놀란 느낌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간신히 용기를 짜내어 미카엘의 의중을 전달했다.

“전하께선… 귀하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책상.”

미카엘은 그에 동의한다는 듯 레티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내려다보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대놓고 레티시아를 무시하는 투로 말했을 뿐.

“하녀, 이번만큼은 네 수작에 넘어가 주마. 나는 하워드 그레이엄 후작, 전하의 후견인이다.”

‘후견인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의 정체에 소스라친 레티시아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제국의 황태자에게 어떻게 후견인이 붙는다는 말인가?

황제가 아닌 황태자의 공식적인 뒷배는 있을 수도 없고, 있었어도 안 되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미카엘의 뒤로 물러섰다.

그레이엄 후작은 그녀의 위치를 하녀라고 규정했다. 황제가 이 사람에게 후견인이라는 힘을 준 이상 복종해야 했다.

레티시아는 뒤로 물러나던 도중 제법 놀라운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카엘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레티시아는 단순히 미카엘의 말뿐만이 아니라 각종 감정마저도 쉽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미카엘은 이미 다 알고 있었어.’

호르헤 경이 없는 지금, 대체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미카엘은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후견인이 지정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이 남자가 오늘 나타나리라는 것도.

‘미리 얘기를 해 주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금방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미카엘은 짐작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미카엘은 평소 확실치 않은 것에 대해선 워낙 말을 하려 들지 않았기에 충분히 이해할 만한 범주였다.

“전하.”

후작이 레티시아는 완전히 무시한 채 미카엘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동안 근심이 깊었을 겁니다. 이제 제가 있으니 아무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트링켓.”

레티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트링켓이 쓸데없다는 의미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트링켓은 가죽도 보잘것없고 고기도 질겨 일감 없는 사냥꾼들조차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번식력과 식욕만큼은 왕성해 종종 국가에서 나서 트링켓을 잡아들여야 했다.

‘트링켓 같은 놈!’이라는 욕도 세간에서 제법 많이 쓰였는데, 어디에도 쓸 수가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번역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적나라한 욕을 내뱉은 것이다.

“트링켓?”

하지만 놀랍게도, 후작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트링켓.”

미카엘은 항상 그랬듯 해석 대신 자신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아.’

그제야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후작이 트링켓의 의미를 모를 수밖에 없다. 트링켓은 일반 평민들이 쓰는 속어였지, 귀족들의 고상한 어휘 축에는 들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습니다. 전하께선 이제 저만 믿으면 된다는 사실 하나만 알아 두십시오.”

“달.”

이번엔 후작은 미카엘의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조금 전과 달리 매우 완고했다.

“달.”

“…….”

“달.”

레티시아는 조금 긴장했다. ‘달’은 왜 그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단어 중 하나였지만, 의미 자체는 분명했다.

이유.

미카엘은 계속해서 후작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다.

후작은 계속되는 ‘달’의 향연에 굉장히 언짢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만하십시오, 전하! 어리광을 부리고 싶으시다면, 유모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레티시아의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미카엘의 나이는 열 살.

평범한 귀족 자제였다면 아직 유모의 치맛자락에 매달릴 나이였지만 황태자는 그래선 안 되었다.

‘저자는 미카엘을 황태자로 취급하고 있지 않아.’

좀 더 정확히는, 둔해 빠진 저능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든 싫든 자신은 미카엘의 번역기. 미카엘의 의사는 전달해야 했다.

“후작님, 전하께서는 후작님께서 후견인이 되신 이유를 묻고 계십니다.”

좀 더 정확히는, 미카엘은 자신을 믿으라는 후작의 말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적당히 둘러댈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후작은 대답은커녕 주름진 입을 꾹 다문 채 레티시아를 빤히 노려보았다.

레티시아는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후작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살의가 뼈마디에 깊숙이 박히는 듯했다.

마침내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이 어떻게 이유란 거지?”

“그, 그건 모르겠어요.”

후작은 코웃음을 쳤다.

“이유를 다 말할 수 있다고 들었다만. 그것마저 아닌 모양이군.”

“몇, 몇 가지만……. 대부분은 다 이유를 압니다.”

다행히도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후작은 더 이상의 질문을 않고 미카엘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전하,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뭐든 하십시오. 저 마녀를 거치지 말고.”

“달.”

레티시아는 얼어붙은 입을 움직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제가 마녀인 이유를 물으십…….”

그녀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후작이 그녀를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는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배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거렸다.

“이제 그런 수작이 계속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꼬마 마녀야.”

“후작님, 저는……!”

“더 이상의 말은 허하지 않겠다. 나가라! 이곳은 애당초 일개 하녀 따위가 있을 곳이 아니니.”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미카엘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는 그 소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다.

“레티시아.”

하지만 후작은 냉혹한 얼굴로 나가는 문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급기야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전하, 오지 마세요.”

“…레티시아.”

“오지 마시라구요!”

레티사아는 쿵, 하고 발을 굴렀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영특하던 미카엘이, 왜 저렇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지 야속하기만 했다.

‘그레이엄 후작에 대놓고 반항해선 안 돼!’

설령 미카엘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해도, 아직 열 살짜리 꼬마일 뿐이다.

황제가 직접 붙여 준 후견인에 대놓고 맞설 수 있는 위치는 절대 못 되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레이엄 후작은 얼마든지 미카엘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사고사나 자살로 위장할 만한 힘이 있었다.

“싫어.”

“……!”

레티시아의 눈이 커지다 못해 동공에서 뛰쳐나갈 듯했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귀를 잘 매만졌다.

‘미카엘……?’

귀를 몇 번이고 의심해 보았지만 아직 레티시아의 귀에는 그 잔향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싫어.’

미카엘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확고하고, 분명하게.

“전하…….”

레티시아는 메어 오는 목으로 미카엘을 불렀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미카엘의 뒤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그레이엄 후작도, 그로 인해 분명 지금껏 없었던 위험에 빠졌을 그녀의 위치도 알 바가 아니었다.

오직, 미카엘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레티시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과 혀를 간신히 움직여 미카엘에게 일렀다.

“저, 저는… 가야 해요.”

“싫어.”

미카엘의 완강한 목소리가, 다시금 어둑한 방에 울려 퍼졌다.

됐다.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미카엘은 그녀 없이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후작, 미카엘은 절대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거야.’

레티시아의 눈이 크게 커졌다.

어느덧 얼굴에 표정이 완전히 없어진 후작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시는 전하 곁에 얼씬거리지 마라.”

코앞에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 * *

레티시아는 헐떡이며 문을 열었다. 아늑한 공간에서 수를 놓고 있던 애슐리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좀 늦으셨네요. 피곤하실 텐데 다리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애슐리…….”

“레티시아 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레티시아는 이제 도저히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애슐리에게 폭 안겨 한참을 울먹거렸다.

“전하께서 또 못된 장난이라도 치셨어요?”

“아니,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간신히 애슐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저, 저… 가야 해요.”

“어디로요?”

애슐리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레티시아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용기가 좀체 나지 않았다.

“저, 궁에서 나가야 해요. 그래서 지, 지금 짐을 꾸리려고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거나, 건강하게 잘 있으라는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도통 나오지가 않았다.

“전하께서… 그러라고 하셨나요?”

“…….”

레티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감히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었다가 애슐리가 다칠까 싶어 두려웠다.

“내일이면 애슐리도 알게 될 거예요.”

애슐리는 레티시아의 두루뭉술한 말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얼추 짐작한 모양이었다.

“…도와드릴게요, 레티시아 님.”

“그냥 레티시아라고 불러 주세요. 말도 놓으시고……. 전 이제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실은 원래부터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미카엘의 말을 번역할 수 있다는 효용성이 그녀를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위치에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애슐리는 레티시아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레티시아 님은 여태까지 제가 모셨던 레이디 중 가장 훌륭한 분이세요. 이렇게 가실 분이 아닌데…….”

레티시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훌륭한 레이디는커녕 번역기로서의 몫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떠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녀에 불과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짐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패물도, 옷도 그녀에게 주어진 게 아닌 황가의 재산에 속했으니 챙겨 갈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애슐리는 열심히 그녀를 도와주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하필이면 이 밤에……. 레티시아 님, 제가 잃어버렸다고 할 테니까 금가락지 한두 개 정도만 챙겨 가세요.”

“애슐리가 감옥으로 면회 오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레티시아는 조용히 웃어넘겼다. 그동안 호르헤 경에게 받은 돈만 생각해도 섭섭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는 격이 되었지만, 호르헤 경도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다.

“레티시아 님…….”

애슐리의 눈이 붉게 변했지만, 레티시아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애슐리도 그만두는 걸 생각해 봐요.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질 테니까.”

“레티시아 님이 안 계시는 곳에, 제가 왜 있겠어요?”

“음, 전하가 계시니까?”

레티시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애슐리는 웃지 않았다.

“레티시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전하께는 레티시아 님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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