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예전엔 그랬죠.”
레티시아는 짐으로 꽉 채운 가방의 잠금쇠를 잠갔다.
“이제는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그게, 무슨……?”
“모르시겠어요? 전하께선 이제 평범하게 말씀하실 거예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게.”
어쩌면 이쯤에서 자신이 떠나 주는 게 미카엘을 위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저, 정말인가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미카엘은 단어 하나를 말했을 뿐이지만, 레티시아는 그가 곧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간 미카엘은 레티시아 없이는 좋고 싫다는 표현 하나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지나치게 덥거나 추워 몸에 한계가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어 다니는 아기들조차 호불호 정도는 표현할 수 있는데도!
이제 ‘싫다’는 말로 싫은 의사를 표현할 수 있으니, 나머지 말들이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히려 자신이 그의 곁에 없는 게 정상적인 말을 트기에 더욱 편할 수도 있었다.
“애슐리, 이제 안심해요. 전하는 더는 저자들에게 놀아나지 않으실 테니까.”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애슐리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전하께선 레티시아 님이 이렇게 떠나신다는 걸… 알고 계시긴 한가요?”
레티시아는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아예 떠난다는 건 모를 것 같은데.’
그레이엄 후작이 자신을 대놓고 내쳤으니, 여태까지처럼 항상 같이 있을 순 없으리라는 것 정도는 미카엘 역시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황궁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리라는 것까지, 그 어린 소년이 예측했을까?
“아마… 모르실걸요.”
“충격이 크시겠군요.”
애슐리가 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로 중얼거렸다.
“저만 해도 너무,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안이 벙벙한데 전하께선 오죽하실까요.”
“…죄송해요, 애슐리.”
“레티시아 님이 죄송하실 일은 아니잖아요. 분명 이유가 있을 테고… 지금 저에게 제대로 말을 해 주시지 않는 이유도 있겠죠.”
“…….”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 없이 혼자 남을 애슐리에게 모든 일을 설명해 주기야 쉽다. 어쩌면 그것이 레티시아가 할 도리일지도 모른다. 애슐리가 위험에 대비할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하지만 애슐리가 도리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어차피 애슐리는 레티시아의 직속 하녀라는 점에서 이미 그레이엄 후작이 가장 경계할 만한 사용인 중 한 명이다.
그레이엄 후작이 누구인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애슐리가 알고 있다는 티를 실수로라도 내비치면 그녀에게 해가 갈 게 뻔했다.
‘잠깐만.’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생각해 보니, 야반도주는 자신 혼자만 해야 한다는 법도 없었다.
“애슐리, 저랑 같이 떠날래요?”
“제가요? 레티시아 님이랑?”
애슐리의 밤색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레티시아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애슐리가 레티시아가 없는 궁에 있기 싫다는 말을 하더라도, 그건 미카엘을 위해 레티시아를 붙잡기 위함이지 순수하게 레티시아가 좋아서가 아니다.
어쩌면 애슐리는 전생에 읽은 소설 속 레티시아처럼 돈을 계속해서 보내야 할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애슐리가 차분히 거절했을 때,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 님은… 가세요. 저는 여기 있겠어요.”
“잘 있어야 해요, 애슐리.”
레티시아는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왜 대부분의 사용인이 빠져나가 버리고, 자신조차 없는 황태자 궁에 애슐리가 계속 있으려고 하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돈.
황태자 궁의 전직 하녀가, 어디서 황태자 궁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겠는가?
“저야 당연히 잘……. 레티시아 님이야말로 지내실 곳은 있으세요? 고향엔…….”
애슐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여태까지 레티시아는 애슐리에게 제법 속마음을 터놓았고, 그중엔 가정사도 끼어 있었던 탓이었다.
“걱정 마세요. 돈은 충분히 벌었으니까.”
레티시아는 짧게 웃었다. 애슐리의 눈엔 자신은 어디까지나 아이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물론 본디의 꿈처럼 수도에 작은 가게를 열 수준은 못 되었다. 하지만 처음 상경했을 때의 자신보다야 몇 배는 나았다.
작은 숙소를 잡고, 좋은 일자리를 몇 달간 구하러 다닐 정도는 돈은 충분히 모았다.
‘그동안 좀 쉬기도 쉬고.’
집을 뛰쳐나가기 전까지는 눈을 뜨면 일했고, 눈을 감아도 쉴 수가 없었다.
뛰쳐나오고 난 이후에 달라진 것이라곤 미카엘이 눈을 감으면 쉴 수 있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아예 남부로 내려가 볼까.’
책에서 본 남부의 따뜻한 휴양지들이 떠올랐다. 일은 고되더라도 푸른 바다와 백사장이 펼쳐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더 모아서 수도에 작은 가게를 열게요. 애슐리도 놀러 와요.”
“뭘 하실 생각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레티시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원래는 작은 식당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작저의 부엌에선 줄곧 감자와 당근만 깎았었고, 황태자 궁에 온 이후엔 주방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식당을 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상점이나… 그냥 옷가게를 할지도.’
레티시아가 미래에 대한 별 계획이 없다는 걸 드러냈는데도 애슐리는 면박을 주거나 더 붙잡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레티시아 님이 뭘 하시든 꼭 갈게요.”
“애슐리가 제 손님 1호 되어 주는 거, 아니에요?”
“어머, 영광인데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다시는 애슐리와 함께 이렇게 웃을 수 없겠지.’
레티시아는 그동안의 자신이 다분한 특권을 누려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애슐리처럼 다정한 친구마저도 그녀가 미카엘의 번역기로서 일했기 때문에 곁에 둘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에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였다.
“편지 자주 보낼게요.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요.”
“레티시아 님의 편지를 받기 위해서라도 그만두지 말아야겠는데요?”
“…고향 집 주소를 알려 줘요.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제 고향은 여기랍니다, 레티시아 님.”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어요. 작위와 재산이 있긴 했지만… 삼촌이 모조리 가져갔고요.”
“…애슐리.”
“함께 떠나지 못해서 죄송해요, 레티시아 님. 제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라서… 도저히 이곳을 떠날 수가 없네요.”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슐리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결코 떠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황태자 궁 따위는 가볍게 떠나 버릴 수 있다고…….
하지만 동시에 레티시아는 이 삭막한 궁이 애슐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고 바로 문 쪽으로 돌아섰다. 애슐리의 서글픈 시선을 더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잘 있어요, 애슐리.”
애슐리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 * *
‘이렇게 빨리 쫓겨 나올 줄은 몰랐는데.’
레티시아는 고요한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렇게 정이 붙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장소 하나하나에 미카엘을 따라다녔던 기억이 서려 있다 보니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여긴… 비밀 장소가 있던 곳이었는데.’
레티시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미카엘은 몸을 숨길 비밀 장소들과 신비한 힘을 가진 성소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방해만 될 거야.’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 밤중에 궁을 완전히 빠져나간다면 아무리 그레이엄 후작이라도 자신의 뒤를 추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레이엄 후작의 표현에 따르면 일개 하녀 따위를 왜 힘들게 추적하겠는가?
레티시아는 황태자 궁의 본관을 완전히 빠져나온 후 잠시 심호흡했다. 널따란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간 미카엘의 곁에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황태자 궁을 홀로 빠져나가는 것은 나름의 도전이었다.
다행히 보름달이 훤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황궁을 충분히 빠져나가 수 있을 듯했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달빛 속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미카엘……?”
“레티시아.”
더러운 마룻바닥에서 한바탕 구른 듯한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레티시아의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럴 순 없었다. 미카엘은 일개 하녀를 쫓아 나와서는 안 되었다…….
“전하, 왜 여기까지 나오신 거예요? 제발, 제발 들어가세요…….”
“레티시아.”
“전하, 전 못 가요. 못 간다고요. 이제 전… 전하께 방해만 될 거예요.”
“설탕.”
설탕에 개미가 꼬이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레티시아처럼 좋은 사람에게 방해꾼이 꼬이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러니 미카엘에게 방해가 된다 한들 그것은 레티시아의 탓이 아니었다.
“전하…….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제가 빠지는 게 제일 나아요. 전하께선 이제 저 없이도 말을 잘하실 거잖아요.”
“마차.”
마차의 말, 바퀴, 마부……. 그중 무엇 하나 없이 마차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미카엘은 자신과 레티시아의 관계가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애원했지만 미카엘은 꿈쩍도 않은 채 자신 나름의 대답을 내놓았다.
‘말이… 똑같아.’
레티시아의 심장이 조금 전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절망으로 너덜거렸다.
분명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미카엘은 자신과 그레이엄 후작에게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싫다고.
하지만 지금 미카엘이 늘어놓는 단어들은 그때의 명확한 말과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본디는 ‘싫어’가 돌아왔을 법한 레티시아의 말에도, 미카엘은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여러 단어들을 댔다.
레티시아는 한 차례 더 미카엘의 ‘싫다’는 대답을 유도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일시적이었던 걸까?’
그녀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다,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혀를 깨물 뻔했다.
‘분명, 후작이 뭔 짓을 했어.’
그레이엄 후작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 이미 조금 전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미카엘의 황태자로서의 위치가 공고해지는 건 그가 바라지 않는 일일 터.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붙잡기 위해 내뱉은 말은, 레티시아에겐 희망이었지만 후작에겐 제거해야 할 변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카엘의 말문이 닫혀 버린 거야.’
어쩌면, 영원히.
레티시아의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이 맺혔다.
미카엘이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눈물과 함께 그 삿된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레이엄 후작이면 몰라도, 미카엘이 그녀를 속일 리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상황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미카엘의 트일 뻔한 말문은 닫혀 버렸다.
그녀가 자신 한 몸 편안히 살겠다고 여기서 도망쳐 버린다면?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만나기 이전으로, 아니 더욱 나쁜 상황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때처럼 미카엘을 충심으로 보좌할 호르헤 경이 아닌, 꿍꿍이가 가득한 그레이엄 후작이 그의 곁에 있을 테니까.
쿵.
레티시아의 손에서 가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전하 곁에 있을게요.”
그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번에도 이 작은 소년에게 붙잡히고 만 것이다.
“…….”
미카엘이 계속 그렇게 바라보기만 할 테냐는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티시아는 자신보다 서너 살 어린, 하지만 이젠 어린아이로만은 보이지 않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어둠에 잠긴 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