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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50)

31화

Chapter 5. 황태자의 약혼녀

그레이엄 후작이 황태자의 공식 후견인이 된 지 6년이 흘렀다.

황태자 궁의 신입 하녀 베리티 패로우는 새로운 직장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멋지다는 황태자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원래 높으신 분들은 마주치지 않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녀는 속으로 얼굴 한번 못 본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만약 자신이 몰락 기사의 손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일자리는 꿈에도 못 꾸었을 것이다.

황태자 궁에서 일한 지 3년쯤 되었다는 선임은 베리티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열여섯 번째 탄생회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베리티는 들어오자마자 가장 성대한 행사를 준비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안됐네. 제일 바쁜 시기에 들어오다니.”

“상관없어. 원래 있던 집에선 날마다 파티였는걸.”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마.”

선임 하녀의 경고에 베리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도 이렇게 좋은 자리를 놓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선임 하녀는 베리티에게 황태자 궁의 구조와 그녀가 앞으로 맡아서 할 일들을 알려 주었다.

“넌 레티시아 님과 함께 일하게 될 거야.”

생소한 호칭에 베리티는 바로 따지듯 물었다.

“왜 레티시아 님인데?”

“그냥. 다들 그렇게 불러.”

“신분이 엄청 높은 분이야? 원래는 시녀로 갈 분이었다던가……?”

황궁의 하녀는 보통 하급 귀족의 딸이나 부유한 평민처럼 신분이 보장된 소녀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레티시아 님’이라고 불릴 정도면 보통 신분이 아닐 것이다.

시녀가 아닌 하녀로 입궁한 것이 의아하긴 해도, 황족의 시녀쯤 되면 부모가 들여야 할 돈이 제법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라고? 둘 다 아니야.”

선임 하녀는 코웃음을 치며 베리티의 추측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렇다고 ‘레티시아 님’의 정체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도 않았다.

‘뭐, 본인에게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해 주겠지.’

하지만 베리티의 추측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있잖아, 왜 다들 널 레티시아 님이라고 불러?”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네. 분명 그렇다고 들었는데…….”

“그걸 믿니?”

레티시아 우즈는 베리티가 상상했던 숨겨진 비밀이 있는 신비한 소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결치는 새빨간 머리칼과 빛을 품고 요동치는 금안이 예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

몸가짐이나 말투에서 딱히 특별한 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뭐야, 나랑 별로 다를 게 없네.’

베리티는 크게 실망했다. 황태자 궁에 들어오고 싶었던 데엔 나름 고위 귀족과의 연을 잡아 보고 싶었던 이유도 컸던 것이다.

‘그냥 내가 신입이라고 선임이 놀려 댄 게 틀림없어.’

베리티는 레티시아가 자신의 연줄이 되리라는 희망은 고이 접어 두고 그녀를 따라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제법 흥미로운 일을 맡고 있었는데, 바로 황태자가 사용하는 서재의 청소였다.

“책은 어질러져 있더라도 그대로 둬. 건드리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시니까.”

베리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어질러진 책들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상대는 무려 제국의 황태자. 개똥을 바닥에 바르라고 해도 따라야 했다.

레티시아는 능숙하게 미로처럼 널브러진 책들의 사이사이를 청소하고, 베리티에게 장서들이 다치지 않게 책장을 닦는 요령을 알려 주었다.

귀족의 저택에서 제법 오래 일한 베리티가 보기에도 레티시아는 능숙하고 열심히 일했다.

따라서 베리티가 그녀와 친해져야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어?”

“6년 정도.”

“와.”

베리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면 선임의 말이 영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6년이라니!

나이가 이렇게나 어려 보이는데 6년이라니. 아마 이대로 계속 황태자 궁에서 일한다면 언젠가 하녀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단하다.”

“대단하기는.”

레티시아의 멋쩍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베리티는 딱히 자신을 뽐내려고 하지도 않는 선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서재 청소는 힘들지는 않았지만 보기보다 넓은 데다 조심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법 오래 걸렸다.

청소를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는데, 저녁참을 먹을 때가 다 되어서야 끝날 정도였다.

“내일부턴 연결된 방들이랑 복도도 같이 청소해야 해.”

“으아…….”

베리티는 뻐근한 허리를 짚었다.

“힘들지?”

“생각보다 할 만하긴 한데… 그래도 힘들어. 맞아.”

두 소녀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베리티는 웃다가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가는 남은 음식마저 사라지고 없을 시간이었다.

“얼른 가자. 이러다 저녁을 쫄쫄 굶겠어.”

레티시아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먼저 가.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

베리티는 서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황태자의 말에 따라 손을 대지 말아야 할 책들이 바닥에 어질러져 있는 걸 제외하면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분명 그들이 오늘 해야 할 일은 끝이 났다.

“무슨 일인데?”

“그런 게 있어.”

베리티는 레티시아가 제법 당황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도와줄게. 둘이서 하면 더 일찍 끝날 테니까.”

“혼자서 할 수 있어. 첫날이라 피곤할 테니 얼른 들어가서 쉬어.”

찬찬히 보니, 그런 말을 하는 레티시아야말로 베리티보다 곱절은 더 피곤해 보였다.

“나야 괜찮으니까 도와줄게. 자, 어디서 뭘 해야 하는데? 얼른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괜한 참견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베리티 패로우.”

베리티는 여태까지 친절하기만 하던 레티시아의 찬바람 쌩쌩 부는 듯한 어조에 놀라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야?”

“…….”

레티시아 우즈는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은 채, 나가는 문을 향해 손짓했다. 축객령이라도 당한 기분이 든 베리티는 조금 화가 난 나머지 일부러 바닥을 쿵쿵 찧으며 나갔다.

‘뭐? 레티시아 님? 개가 웃겠네!’

어쩌면 레티시아 님이라는 호칭엔 저런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놀리는 의도가 다분히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사이인 자신에게 저럴 정도면, 좀 더 편한 사이에겐 대체 어떻게 대하겠는가?

‘그건 그렇고, 대체 뭘 하길래 날 내쫓은 걸까…….’

만약 배가 조금만 덜 고팠다면 베리티는 돌아가서 레티시아가 대체 뭘 하는지 훔쳐보았을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 떠올랐기에 더더욱.

‘남자를 만나는 게 틀림없어.’

황궁의 시녀와 하녀들은 자유롭게 남자를 사귈 수 있었기 때문에 레티시아의 연애는 딱히 흠이 되지 못했다.

분명 저렇게까지 자신을 쫓아내려고 하는 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유달리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거나.

하지만 자신이 오늘 하루 동안 겪은 레티시아 우즈는 분명 그런 성격과는 무척 거리가 멀었다.

레티시아 본인에게는 딱히 문제가 없었으니, 숨기려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상대가 문제다.

‘설마… 유부남?’

베리티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유부남과 사귀는 하녀들은 자신의 이전 직장에도 종종 있었다.

‘얌전해 보이더니, 부뚜막에 올라갔다 이거지?’

베리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심심하고 엄숙할 줄로만 알았던 황태자 궁에 이렇게 재미있는 동료가 있었다니!

결국 부엌엔 늦게 도착해서, 남은 음식이라곤 다 식은 스튜와 가장 인기 없는 빵밖에 없었지만 그마저 맛있게 느껴졌다.

‘꼭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내야지.’

베리티는 딱히 동료의 약점을 알아내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따분한 일상을 즐겁게 해 주는 가십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날 이후, 베리티는 호시탐탐 레티시아의 비밀을 캐낼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좀체 틈을 보여 주지 않았다.

대신 베리티는 다른 하녀들에게서라도 레티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캐내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대부분이 그녀를 ‘레티시아 님’이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를 알아낸 것만 제외하면.

베리티의 룸메이트인 멜라니는 베리티만큼이나 가십을 좋아했고, 레티시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주절주절 알려 주었다.

“황태자 궁에 레티시아 님보다 오래 일한 하녀는 아무도 없어. 다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금야금 그만뒀거든. 레티시아 님이 제일 고참이야.”

“그래 봤자 겨우 6년이잖아.”

“기간이랑 상관없어. 내가 여기서 4년을 일했는데, 들어왔을 때만 해도 레티시아 님보다 오래 일한 하녀들이 제법 있었거든.”

“그래서?”

“그 하녀들이 전부 레티시아 님에게 깍듯이 대하더라구. 애초에 레티시아 님이라고 부른 것도 그 고참들이야.”

“……!”

“그래서 다들 레티시아 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어디 몰락한 고위 귀족 영애라도 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부모가 여기까지 돈을 달라고 찾아온 적이 있었거든. 뭐… 귀족은 아닌 것 같더라.”

“이상한데…….”

“내가 보기엔 뒷배가 있어. 대체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몰라?”

“소문만 많아, 소문만.”

멜라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베리티는 멜라니를 졸라 그녀가 들었다는 소문들을 모조리 캐냈지만, 그중 무엇 하나 마땅해 보이는 게 없었다.

‘내가 직접 알아내야겠어.’

기회는 황태자의 탄생회를 겨우 일주일 남겨 놓고 찾아왔다.

황태자 궁의 하녀들이 해야 할 일은 점점 쌓여만 갔다. 그날 역시 일찍 일과를 마치기엔 글러먹은 날이었다.

평소엔 아무리 일이 많아도 불만 없이 묵묵히 일하던 레티시아가, 그날따라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서둘렀다.

‘오늘이겠네.’

베리티는 흥분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묵묵히 일을 마쳤다. 역시나 레티시아는 자신을 최대한 빨리 내쫓으려고 했다.

“늦었네. 피곤할 테니 이만 가 봐.”

“알겠어. 좋은 밤 보내, 레티시아.”

하지만 베리티는 레티시아의 예상대로 곧바로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미리 봐 뒀던 숨기 좋은 복도의 조각상 뒤쪽에 숨어 귀를 쫑긋 세웠다.

또각.

그렇게나 베리티가 기다리던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베리티는 멀리서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에 집중하느라, 레티시아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쉿.”

어느새 다가온 레티시아의 손이 베리티의 입을 틀어막았다. 체구가 작은 레티시아는 힘이 센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말에 베리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죽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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