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죽기는 왜 죽어?’
말도 안 되는 협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인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의 나지막한 한숨이 들려왔다. 그녀는 베리티에게서 손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떠나. 죽고 싶지 않으면.”
레티시아가 떠난 자리엔 속삭이는 듯한 협박이 남았다.
하지만 순순히 자리를 피해 줄 베리티가 아니었다.
베리티는 천천히 레티시아를 향해 다가오는 상대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자신이야 사용인들의 얼굴을 잘 몰랐지만, 멜라니는 누군지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요. 오늘은 불청객이 있어요.”
레티시아의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미.”
“위험하진 않고, 신입 하녀예요. 베리티 패로우. 보기보다 골칫덩어리라 잘라 내야겠어요.”
베리티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레티시아 우즈는 얼마나 잘났길래 저 정체불명의 밀회남에게 자신의 해고를 사주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밀회 상대가 제법 신분이 높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나.’
황태자 궁엔 당연히 신분이 상당한 자들이 드나들 터. 일개 하녀와의 로맨스를 들키지 않으려는 건 당연하다.
종합했을 때, 레티시아의 말은 그냥 자신에게 들려주려는 허풍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로 그녀의 상대방은 베리티 같은 일개 하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잘라 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지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리티는 레티시아의 경고를 따라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는커녕 그 반대로 행동했다.
레티시아의 상대를 보기 위해 뛰쳐나간 것이다.
‘어차피 여긴 물 건너갔어.’
베리티가 전 직장과 전전 직장에서 배운 게 한 가지 있다면, 쫓겨나더라도 무언가를 얻어 내고 쫓겨날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이 좋은 직장에서 해고될 몸. 입막음조로 돈 한 푼이라도 받아 내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
하지만 베리티는 당당하게 뛰쳐나가자마자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서고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베리티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눈을 꽉 감아 버리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의 밀회 상대는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베리티는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황태자 궁 곳곳에 걸린 초상화 속 얼굴이었기에.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흐르는 금처럼 반짝이는 머리칼. 이러한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베리티가 넋을 빼놓을 정도의 미남자는 마치 기어가는 벌레라도 본 것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직시했다.
베리티는 깨달았다. 레티시아 우즈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지금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 * *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꽁무니가 빠져라 달려가는 베리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법 오랜만이네.’
베리티 패로우는 그녀의 정체를 궁금해한 첫 번째 동료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역시 아니리라.
“소문이 퍼지기 전에 전하께서 처리해 주셔야겠어요.”
“부루핌.”
전설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미카엘의 말에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상관있어요.”
“동전.”
오히려 좋다니?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가 좋다는 거예요?”
미카엘은 그녀를 쿡 찌르더니, 이내 그 자신을 찔렀다. 이번만큼은 굳이 레티시아가 아니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제스처였다.
지난 6년 동안 미카엘의 언어 능력을 키우고자 하는 레티시아의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개중 몇 안 되는 발전이 있었다. 후작조차 잘 모를 만큼 매우 미미하지만 레티시아에게는 큰 희망이 되어 준.
이제 미카엘은 그 자신과 레티시아만큼은 누구든 알아볼 수 있는 제스처로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레티시아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곤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와 전하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게 좋다고요? 말도 안 돼요!”
“어둠.”
미카엘이 내놓은 답에 레티시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미카엘은 물론, 레티시아마저 밝은 공간보다 어두운 공간을 안전하다고 느낀 지 제법 오래되었다.
‘소문이 퍼져야 안전하다니…….’
문제는, 미카엘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황태자의 약혼녀가 아닌, 밀회 상대인 하녀는 권력에서 비켜나 있으면서도 비호의 대상이 될 테니까.
레티시아는 입술을 핥으며 반박을 시도했다.
“저야 더 안전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만큼 전하의 입지는 좁아질 거예요.”
“무지개.”
“전하…….”
레티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것처럼, 미카엘의 일은 레티시아가 걱정할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일개 하녀인 레티시아가 주제넘게 황태자를 보호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레티시아에게는 미카엘이 아직도 어리디어린 소년으로만 보였다.
레티시아는 6년 전, 그 어리던 미카엘의 손을 잡고 황태자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마주친 후작의 얼굴을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후작은 당장이라도 레티시아를 잡아먹을 듯한 노기를 띠었지만, 놀랍게도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선 안도감이 느껴졌다.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강단은 있군.’
‘…….’
‘좋다. 전하께서 널 원하시는 듯하니 궁에 남아 있게는 해 주마. 하지만 그 반역자처럼 특별 대우를 받게 해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그날 이후,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비서에서 하녀로 돌아갔다.
후작은 레티시아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를 바라는 듯한 언행을 보였지만, 레티시아는 오히려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녀라는 직업을 대체 왜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비서 시절보다 보수가 훨씬 쪼그라든 건 불만스러웠지만, 다른 하녀들에 비해 특별 대우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레티시아는 금세 새로운 위치를 받아들였다.
미카엘이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곁을 지켜야 했던 비서 시절보다 몸은 더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적응하지 못하는 건 다른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레티시아에게 존칭을 붙여 불렀고, 레티시아의 일을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초기 한두 해의 이야기. 그 뒤로 후작의 체제에서 점점 달라져 가는 황태자 궁의 상황에 기존의 하녀들은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한둘씩 차례로 그만두었다.
마침내 고참 하녀들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애슐리마저 그만두었을 때, 레티시아는 그간 참아야 했던 눈물을 터뜨렸지만 그녀를 붙잡지는 못했다.
왜 애슐리가 떠나려고 하는지 너무나 잘 이해했으므로.
이렇게 레티시아가 황태자 궁에서 가장 오래 일한 하녀가 되면서, 어느덧 ‘레티시아 님’은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는 별명이 되었다.
대부분의 하녀들은 그 별명이 다소 비밀이 많아 보이는 레티시아를 놀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베리티처럼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 같은 신입들도 종종 있었지만, 모두 황태자 궁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베리티 역시 그들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레티시아라고 신입 하녀들을 쫓아내는 게 달가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미카엘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소문을 퍼뜨린다면 순식간에 미카엘은 어린 시절 친했던 하녀 하나에게 휘둘리는 바보가 될 터인데.
“베리티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어요. 전하께서야말로 상관하지 말아 주세요.”
“울타리.”
“저는 전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절 보호해 주려고 하실 필요가 없다고요.”
미카엘은 조금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레티시아는 문득 이 의중 모를 소년의 머릿속이 궁금해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전하, 몇 번이고 약속해 주셨잖아요.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겠다고.”
지난 6년.
후작은 몇 번이고 레티시아에게 모멸감을 주는 언사를 벌였다.
그에게도 레티시아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 후작의 목적은 단순히 레티시아의 기를 죽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미카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레티시아에게 되레 화로 돌아올 뿐이었다.
다행히 미카엘은 어느 순간부터 더는 레티시아에게 신경을 쓰는 체를 하지 않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결국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이제 더는 소문을 막는 일에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며 반대하지 않으리라.
“얼른 들어가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을 테니까.”
“금.”
“일이 없다고요?”
레티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대체 왜 저를 불러내신 거예요?”
레티시아가 지난 몇 년 동안 서재 청소를 도맡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카엘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 놓은 책들을 통해 남겨 놓은 신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미카엘은 만날 시간과 장소만을 간략하게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정확한 용건이 무엇인지는 그를 만나서야 알 수 있었다.
용건은 대개 같았다. 업무.
미카엘은 레티시아 없이는 남들이 이해할 만한 글을 쓰지 못했기에 서류 작성을 위해서는 레티시아가 필요했다.
레티시아는 항상 미카엘에게 자신은 비서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툴툴거렸지만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을 돕기 위해 황태자 궁에 남았으니까.
하지만 별 용건 없이 미카엘이 자신을 불러냈다?
다소 기분이 상할 만도 한 일이었지만 레티시아는 금세 냉정함을 되찾았다.
분명 미카엘은 업무가 아닌 다른 일로 자신을 불러냈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업무보다도 더욱 중요한 용건일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 미카엘의 답변을 재촉했다.
“대답해 주세요, 전하. 무슨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