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도서관.”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제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고요? 대체 뭔데요?”
“독니.”
“…….”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독니는 미카엘이 처음으로 쓴 단어였지만, 레티시아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레이엄 후작은 독사였다. 그가 독니를 내어 보이는 건, 회심의 일격을 가할 때뿐이었고.
“어느 정도는 포기한 줄 알았는데…….”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연회.”
“그래요, 그분이 이렇게 큰 행사를 그냥 넘어갈 리는 없죠. 무슨 일인지는 전혀 모르시고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에 연약한 표정이 걸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레티시아에겐 전혀 효과가 없었다.
“전하도 모르시는데, 제가 뭐 짚이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미리 막을 순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상, 알고 당하는 것이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할 수 있겠네요.”
* * *
베리티 패로우는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몇몇 하녀들이 그렇게나 들떠 있었던 신입 하녀가 그만둔 이유를 궁금하게 여겼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베리티의 존재는 금방 잊혔다.
그 대신,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탄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레티시아는 바삐 일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후작의 꿍꿍이를 알아내려고 애썼지만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한숨과 함께 한탄을 내뱉었다.
“힘들다…….”
“레티시아 님의 입에서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레티시아 다음으로 오래 일한 일라이자가 슬쩍 그녀를 놀렸다. 레티시아는 일라이자를 째려보았다.
“놀리지 마. 여태까지 수십 번은 더 들었을 텐데, 뭘 새삼스럽게 그러고 있어?”
“그래도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볼 때마다 신기한걸. 너도 사람이구나 싶어서.”
“내가 뭐라고…….”
일라이자는 레티시아의 볼을 꼬집었다.
“자, 울상 좀 그만 지어. 곧 탄생회가 시작되잖아. 그럼 이 고생도 다 끝나는 거지.”
“끝나기는. 뒷정리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하디?”
“넌 빠져도 되잖아.”
“…….”
“빠질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지?”
레티시아는 일라이자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일라이자는 지금의 동료들 중 그녀의 과거를 잘 아는 몇 안 되는 하녀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녀와 황태자 간의 교류가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챈 유일한 동료이기도 했다.
“일라이자, 네가 싫은 건 아니지만 가끔 얄미울 때가 있어.”
“가끔이라니 다행이네. 나는 우리 레티시아 님이 늘 얄밉던데.”
“일라이자!”
레티시아는 일라이자를 향해 소리쳤다가, 그녀가 일부러 지어 보인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기분 좀 나아졌어?”
“훨씬. 고마워.”
“별걸 다 고마워한다.”
잡담도 여기까지였다.
두 하녀는 당장 오늘 오후에 시작될 탄생회를 위해선 짤막한 휴식도 사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각자의 업무로 돌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티시아는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쳤다. 바삐 일하다 보니 어느덧 무대 뒤의 사람들은 사라져 주어야 할 때가 왔다. 사용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리를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단순한 연회가 아닌 탄생회이니만큼, 주방 하녀들은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고 나머지 하녀들은 부지런히 그 음식들을 날라야 했으니까.
탄생회를 위해 다 같이 새로 맞춘 옷으로 갈아입은 레티시아는 주방과 연회장을 바쁘게 오가느라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탄생회의 시작도 눈에 담지 못했다.
고위 귀족이 나타날 때마다 커지는 웅성거림과 동요를 통해 어느 유명 인사가 황태자 궁에 몇 년 만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과실주가 담긴 술잔들을 한가득 올려놓은 은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다 몸을 흠칫 떨었다.
오케스트라가 가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아는.
‘이걸로 미카엘과 연습했었는데…….’
레티시아는 금세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내었다. 이렇게 허튼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후작의 꿍꿍이나 좀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면 일이나 똑바로 하거나.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계속해서 자신이 잘 아는 곡들을 연주했고, 레티시아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화려한 연회장을 배회했다.
미카엘이 처음 보는 귀족 영애에게 춤을 청하고 있었다. 레티시아가 잘 아는 미카엘과는 전혀 딴사람 같은 면모를 보이면서.
잘생긴 황태자가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청초한 귀족 영애는 얼굴을 붉혔다. 황태자의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은 둘 모두에게 별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둘은 이내 연회장의 한복판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지난 6년, 후작 아래에서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미카엘은 훌륭하게 성장했다. 이제 레티시아가 사사건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레티시아가 천천히 주방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레티시아 님!”
“……?”
신입 하녀의 새된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바로 레티시아에게로 집중되었다. 레티시아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비품실에서 꼭 레티시아 님을 데려와 달라고…….”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신입과 함께 연회장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에 내리박히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품실은 항상 한산한 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연회장에 쓰이는 사소한 장식들부터, 연회가 끝난 후 손님들에게 하나씩 쥐여서 돌려보내는 답례품까지 모두 관리하는 곳이 아닌가!
정상적인 궁이라면 지금쯤 겨우 스무 살짜리 하녀 대신 하녀장이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 하녀장이 그만둔 이후로 후작은 새로운 하녀장을 뽑지 않았다. 그 이유를 눈치채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녀장이 되려면 황태자 궁에서 5년은 일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유일하게 충족하는 하녀는 바로 레티시아였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쥐여 주고 싶진 않았겠지. 아, 비유가 안 맞나?’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뛰던 레티시아는 금방 비품실에 도착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레티시아가 발을 들이자마자 비품실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으니까.
“이걸 다 나보고 책임지라고?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죽을까? 죽으면 니들이 다 편해지겠지? 아니, 덮어씌워야 할 사람이 없어서 아쉬우려나?”
“비젯타, 그런 말이 아니잖아!”
레티시아는 비품실 한편에 잔뜩 시들어 버린 채 놓인 귀한 꽃, 실바텐을 보고 상황을 직감했다. 본디라면 은은하게 빛나는 은과 비슷한 색이어야 할 꽃잎들이 모두 검게 시들어 버린 것이다.
장식용으로 쓰이는 꽃이라면 대체품이 널려 있었지만 실바텐은 달랐다. 탄생회가 끝났을 때, 황태자 궁을 떠나는 손님들의 손에 하나씩 들려 보내야 할 꽃이었으니까.
레티시아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도, 누가 책임 당사자인지도 묻지 않았다. 사태를 해결하는 데 거들지는 못할망정 도움이 되지 않을 질문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딱히 특정한 누구를 가리킨다고 할 수도 없는 몸짓으로 동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실바텐은 재작년부터 정원에도 심지 않았어?”
사실, 그들의 일자리가 황태자 궁만 아니었더라면 이건 사고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다른 궁에 실바텐을 요청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당연히 그에 합당한 재화가 빠져나가기야 하겠지만, 황태자 궁의 예산에 비하면 그건 돈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태자 궁은 아직도 황궁 전체에서 다소 고립된 위치였고, 후작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유지하려는 편이었다.
즉, 그들은 실바텐을 어떻게든 황태자 궁 내에서 조달해야 했다.
정원에 관상용으로는 그다지 쓰지 않는 실바텐을 심게 된 게 미카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 같은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예상했을 것이다. 미카엘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태자궁이 파탄으로 굴러갈 뻔한 상황을 막은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므로.
“그러게. 정원이 있었네?”
“하지만 백 송이는 될 텐데 그걸 어느 세월에…….”
“게다가 정원사한테 직접 말해야 하잖아. 그 영감탱이가 우리 말을 들으려고 하겠어?”
황태자 궁의 정원사는 호르헤 경의 실각 전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용인 중 하나였다.
당연히 후작은 그 역시 잘라 내고 싶어 했지만, 이미 정글이나 다름없이 변해 버린 황태자 궁의 정원을 감당해 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칠순이 넘은 정원사는 본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모르지. 레티시아 님 말이라면 들을지도.”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하녀들의 시선이 레티시아를 향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달갑지 않은 주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말해 볼게. 하지만 안 된다고 할 게 뻔하니, 다들 큰 기대는 하지 말아.”
“그럼 그때 날 산 채로 불태우든가 알아서 해. 다들 됐지? 이야, 레티시아 님 덕분에 내 화형식이 30분은 미뤄졌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보이는 비젯타가 신경질적으로 시든 꽃들을 내팽개쳤다.
“…….”
비젯타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확실한 방법이 없다면 비젯타는 정말로 비참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레티시아는 어두컴컴한 비품실에 옹기종기 모여 자신만을 바라보는 동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칼은 하나씩 있지? 없으면 챙겨. 정원에 가져가야 하니까.”
대부분의 하녀들은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단도를 들고 다녔다. 호신용이라기보단 궂은일을 할 때 요긴하게 쓰는 도구에 가까웠다.
“그걸로 협박이라도 하게? 지하 감옥에 갇히기는 싫어!”
레티시아는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 말을 꺼낸 하녀를 잠시 흘겨보았지만, 대놓고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야. 정원사를 최대한 오래 붙잡고 있을 테니, 너희들이 그동안 실바텐을 몰래 칼로 꺾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