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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50)

34화

정원사의 고집은 레티시아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 또한 아니었다.

아무리 실바텐이 없으면 안 된다고 애원하고, 애초 실바텐의 용도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쓰이는 것이라고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이럴 때는 무단으로 채취해 오는 수밖에 없다.

경악에 질린 눈들이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안 들킬까?”

“안 들키겠지. 내가 그분을 실바텐과 최대한 먼 곳으로 끌고 갈 테니까.”

“허락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시도는 해 볼게. 하지만 대답이 뻔한데, 굳이 거절을 기다렸다가 움직일 필요는 없지?”

“그건 그렇네.”

동의하는 웅성거림이 동료들 사이에서 일었다.

“하지만, 너는?”

레티시아는 익숙한 목소리를 무리 속에서 골라내었다. 일라이자가 어딘가 굉장히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손을 들고 있었다.

“나? 내가 왜?”

레티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는 말인가?

“레티시아 우즈, 다른 애들이 정말로 정원에 널린 실바텐 하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

“…….”

레티시아는 그제야 일라이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녀는 일라이자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다들 자기가 책임지기 싫으니까 입 꾹 닫고 있는 거야.”

“상관없어.”

“……?”

“내가 책임질게, 일라이자.”

“레티시아 님……!”

곳곳에서 감격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라이자는 예외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레티시아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뒷감당 어떻게 할 건지 말해 주기 전엔 못 보내 줘.”

“잘 설득해 볼게.”

“그게 전부야?”

“나 못 믿어?”

“응. 못 믿겠…….”

일라이자의 강경한 대답은 그녀를 막아선 신입 하녀에 의해 끊어졌다.

“저희는 레티시아 님을 믿어요!”

일라이자는 그 당돌한 신입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지만, 신입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저희가 비겁하게 굴었다면 두 분께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저희는 그만큼 레티시아 님을 믿어요.”

“대놓고 얘를 이용해 먹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는 거, 알아?”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어요. 저희는 그런 얘길 들어도 싸니까. 그래도 레티시아 님을 막지는 말아 주세요.”

“잠깐만…….”

레티시아는 손을 들어 점점 과열되어 가는 다툼을 막았다.

“둘 다 그만해. 그리고 일라이자,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는 갈 거야.”

“레티시아!”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너, 항상 생각 없이 일 벌이는 거 다 알거든?”

일라이자는 분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결국 한 발짝 물러났다.

레티시아는 정원으로 떠나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일라이자는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씩씩거리고 있었고, 비젯타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자기가 벌여 놓은 난장판을 치우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서둘렀지만 정원으로 떠나는 발걸음은 복잡한 상념에 뒤엉켜 가볍지만은 않았다.

일라이자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지금, 별다른 계획 없이 정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정원에 자라난 실바텐을 생각했음에도 말을 꺼내지 않았던 이유 역시 일라이자가 말한 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꺼이 모험을 감수했다.

한때, 어렸던 레티시아를 움직였던 알량한 책임감이나 착하다는 칭찬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녀 자신이 지게 될 리스크가 현저히 적기 때문이었다.

정원사와의 마찰? 다른 궁이었다면 정원사와의 합의가 문제가 아니라 감히 황실의 사유물이라 할 수 있는 정원의 꽃들에 손을 댄 죄로 오른손이 잘릴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 궁의 정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곤 정원사밖에 없었고, 그 문제 정도는 레티시아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일라이자의 말대로, 굳이 레티시아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다른 하녀들 역시 충분히 정원사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 대가로 엄벌에 처해지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레티시아에겐 다른 동료들에게 없는 용기가 있었다. 비록 작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큰 차이인.

모두가 예상했듯이 정원사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바텐? 그것도 백 송이나? 그것들을 다 잘라 가는 건 아주 죽이겠다는 소린데.”

“안 잘라 갔다간 진짜 사람 목숨이 날아갈지도 몰라요.”

“그거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면, 저희 사비를 들여서 실바텐을 다시 들여놓을게요.”

정원사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거부의 표현이라기보단, 귀찮게 달라붙는 벌레 떼를 내쫓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그만 가소. 이 노인네의 임무는 꽃들을 지키는 거지, 평소에 날 보면 도망치기만 하는 이 동네 사람들 지키는 게 아니니까.”

레티시아는 황태자 궁을 ‘이 동네’라고 표현하는 정원사의 기행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실바텐 말고 다른 꽃도 안 되는 건가요?”

“음…….”

정원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정원에서 별로 키우지도 않고, 실제 값어치도 얼마 되지 않는 식물들을 알려 주었다. 레티시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시간을 재어 보았다.

‘지금쯤 실바텐이 있는 곳까지 갔으려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최대한 오래 정원사를 붙들어 놓고 싶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희망은 금방 수포로 돌아갔다.

실바텐을 꺾다 손이라도 다친 듯, 누군가의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누구냐!”

정원사는 당장 삽을 치켜들고 침입자를 공격하러 달려갈 태세를 취했다. 레티시아는 그를 황급히 말렸다.

“술에 취해서 정원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은 멍청한 영식쯤 되겠죠. 영감님이 신경 쓸 사람은 못 되어요.”

“귀가 어찌 나이 든 나보다 더 먹었나. 여자 비명 소리던데?”

“그랬나요? 그러면 멍청한 영애겠네요.”

“…….”

정원사는 잠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그동안 둘은 비명 소리를 몇 차례 더 들었고, 목적을 달성한 이후 후다닥 달아나는 십수 명의 발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원사는 그들을 쫓아가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레티시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노인의 입은 사방이 고요해진 후에야 열렸다.

“날 속였군, 그렇지?”

“네.”

“왜 그랬나?”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넌 하녀야. 하녀가 해야 할 일은 청소, 요리 같은 집안일이지. 나 같은 노인네를 속여서 꽃들을 캐어 가는 게 아니라.”

“동료를 지키는 것도 제가 할 일이에요.”

“…못 말리겠군. 알아서 해.”

정원사는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레티시아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유한 반응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레티시아를 향해 휙휙 손을 내저었다.

“뭘 그리 가만히 있어? 썩 안 꺼지고.”

“…죄송해서요.”

“그래, 양심이 아주 없진 않으니 다행이구만.”

“탄생회가 끝나면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울게요. 저뿐만 아니라 시간이 나는 하녀들 전부 그럴 거고요.”

“상관없어.”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 꽃들은 어차피 내가 심고 싶어서 심은 것도 아니야. 이참에 뿌리까지 도려내야겠군.”

“아…….”

레티시아는 정원사의 말을 이해했다. 애초에 실바텐은 미카엘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해서 심으라 명한 꽃.

정원사가 평상시와는 달리 순순히 납득한 이유도 그에 있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어. 죽이려고 키우는 생명에 무슨 보람이 있다는 말이냐?”

“그 대신 저희는 살았어요.”

“…….”

“괜찮으시다면 실바텐을 한적한 곳으로 옮겨 심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정원사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레티시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몇 발짝 달려가 정원사를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약소하지만 받아 주세요.”

정원사의 짜증스러운 눈길이 레티시아의 손바닥 위에 놓인 거무스레한 씨앗 한 톨에 머물렀다.

“이건…….”

“아직 싹이 안 텄으니 충분히 여기서도 키울 수 있을 거예요. 나베암에서 온 곡물에 섞여 있더라고요.”

레티시아는 밝아지는 정원사의 얼굴을 보며 안도했다. 주방에서 야참을 먹던 도중, 다른 동료의 투덜거림을 듣고 확인해 보니 예전에 배웠던 희귀종의 씨앗이 곡물 사이에 묻혀 있었다.

언젠가는 쓰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챙겨 둔 게 정답이었다.

“늙은이 일은 다 시키는구만.”

정원사는 툴툴거리면서도 레티시아의 손바닥에서 씨앗을 낚아챘다.

“이 정도 뇌물로 내가 넘어갈 줄 알고?”

“그럼, 아닌가요?”

“…다음에도 바로 나한테 가져온다고 약속하면, 봐주도록 하지.”

“약속할게요.”

꺾어 온 실바텐을 확인한 하녀들의 입에서 안도에 가득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원래 준비했던 것보다는 조금 투박하긴 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모양새는 갖췄다.

레티시아는 곧바로 등을 돌려 비품실을 빠져나오던 도중, 그녀가 도저히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신입 하녀에게 붙잡혔다.

“쉬시게요?”

“아니, 연회장으로 가려고.”

“그냥 쉬시지……. 남은 일은 다 저희가 할게요.”

“괜찮아.”

신입 하녀의 눈은 레티시아에 대한 선망에 젖어 있었지만, 내막은 조금 달랐다.

레티시아는 후작이 탄생회에서 뭘 꾸미는지 알아내야 했다.

다행히 실바텐 소동은 그리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 않았지만, 늦장을 부려서 좋을 게 없으리라.

‘설마 그사이에 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

그런 레티시아의 생각을 비웃듯,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뭐지?’

몸이 뻣뻣이 굳었다. 레티시아는 본능적으로 미카엘을 찾았다.

미카엘은 좀 전에 춤을 함께 추었던 영애와 예의 그 의중을 모르겠는 얼굴로 나란히 서 있었다.

레티시아가 무언가를 추측할 사이도 없이 후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와 제 딸, 다이애나 그레이엄이 혼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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