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금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동쳤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지만 레티시아의 귀에는 먹먹한 이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동안 미카엘에게 혼담이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귀족이 끝이 보이는 황태자와 자신의 딸을 약혼시키고 싶어 하겠는가?
레티시아는 언젠가 호르헤 경이 암살 위협 때문에 자신을 미카엘의 약혼녀로 삼지 않았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호르헤 경이 실각하며 보호자가 사라졌음에도 미카엘은 단 한 번도 암살 위협을 받지 않았다. 마치 암살자들끼리 합의라도 본 것처럼.
황제의 명을 받은 후작이 미카엘의 후견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레티시아는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오직 모종의 균형이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뿐.
따라서 후작이 자신의 딸을 미카엘과 결혼시키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후작도 딸을 황후로 만들려는 욕심까지야 없겠지. 하지만 미카엘이 끝까지 살아남기야 한다면…….’
어차피 황제의 입장에서 미카엘은, 반역은 꿈에도 꾸지 못할 정도로 덜떨어진 황태자. 정통성 역시 직계 황족들에 비해 떨어지니 그를 이용할 세력 또한 없었다.
따라서 미카엘이 무사히 성장해 폐태자가 된다면 적당한 작위를 줘 시골에 앉힐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러기도 전에 황제가 사망하겠지만, 아직은 미래의 일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후작의 막내딸이 암살당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황태자는 황태자.
자신의 딸을 황태자와 약혼시킨 건 나름 후작의 도박인 셈이었다.
즉, 레티시아는 후작이 결코 딸의 안위를 위해서 미카엘과 약혼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은 균일할 수가 없어서, 고이 키운 단 한 명을 위해 다른 자식을 희생시키는 건 당연한 섭리였다.
그리고 이 경우, 미카엘의 약혼녀는 희생당하는 자식일 터였고.
‘불쌍해라.’
레티시아는 조금 연민을 가지고 다이애나 그레이엄을 바라보다가, 그만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미카엘은 그동안 그녀가 대외 석상에서 항상 봐 왔던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대신, 불타는 눈빛으로 연회장 전역을 노려보았다.
‘…화났구나.’
당연히 미카엘에겐 화가 날 일이었다. 아마 둘은 오늘 처음 보았을 텐데, 약혼이라니.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에겐 이 상황을 빠져나갈 힘이 없었으니까.
레티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미카엘이 누구와 약혼하고, 끝내 결혼을 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등을 돌려 연회장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갔다.
연회가 끝나고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동안 사용인들은 황태자의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지만, 심심풀이용 가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서재 문을 열었다. 혹여 미카엘의 신호가 남아 있을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멋모르고 그녀의 뒤를 캐내려 했던 신입 하녀가 그만둔 이후 서재 청소는 그녀 혼자만의 몫이었다. 사실, 그쪽이 레티시아에게 더 편하기도 했고.
“……?”
레티시아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예상과 달리 서재는 텅 비어 있지 않았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 선 귀족 아가씨가 고개를 들어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물빛 눈이 햇빛이 드리운 그늘 속에서 일렁였고, 연약해 보이는 병아리색 금발이 가냘픈 어깨에 쏟아졌다.
레티시아는 이 불청객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레이엄 후작의 막내딸이자 미카엘 데브란트 황태자의 약혼녀인 다이애나 그레이엄이 레티시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시아 우즈, 맞지?”
햇살을 받은 유리 조각처럼 청명한 목소리였다.
“…네.”
“생각보다 어리네. 아버지께 듣기로는 웬 요부가 궁에 들어앉아 있구나, 싶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다이애나 그레이엄의 나이는 레티시아보다 결코 많아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당당히 버티고 섰다.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종류의 시험이었다.
“후작님께서 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신 거죠?”
“그걸 내가 왜 너한테 알려 줘야 하지?”
“저에 대한 얘기니까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알 권리? 네게? 그런 건 없어. 하지만 난 너그러우니 조금은 알려 주지.”
다이애나는 레티시아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내가 어떻게든 내쫓아야 할 전하의 내연녀라고 하셨어.”
레티시아는 놀라지 않았다. 비슷한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가끔은 미카엘이 있는 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듣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은 미카엘의 약혼녀가 발표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이런 순간이 한 번쯤은 닥치리라는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전하와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럼, 어떤 관계?”
다이애나는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레티시아는 그에 대한 답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정말로 전하의 애인이라면 제게 겁을 줘서 쫓아내면 그만이죠. 왜 후작님께선 그러지 않으셨을까요? 어차피 저 같은 것이야, 가족들 목숨 위협 좀 하면 도망칠 텐데?”
“…….”
“후작님께 여쭤보세요. 정말로 제가 궁을 떠나길 원하시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제가 떠나길 바라지 않는 건 과연 누구일까요?”
“네 삿된 재주를 말하는 거니?”
“……!”
다이애나는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레티시아의 얼굴을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왜, 아버지께서 내게는 그런 같잖은 사실 하나 알려 주지 않았을 것 같았어?”
레티시아는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아가씨께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그럼 뭐지?”
“제… 능력이라고 할 것도 없는 재주는 후작님의 치부니까요. 굳이 알려 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6년.
한 사람을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말이 다이애나에게 전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그래서 아가씨께도 그 사실을 알려 주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바로 그 이유가 아가씨가 절 찾아오신 이유겠죠.”
“…….”
다이애나는 잠시간 말문이 막힌 듯 레티시아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안심했다.”
“네?”
“아버지께선 널 주제도 모르고 멍청하다고 말씀하셨거든. 하지만… 넌 그보다는 더 나은 사람인 것 같구나.”
레티시아는 그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기에도, 기분 나쁜 티를 내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론을 말하려는 다이애나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어야 하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자의 쓰디쓴 감정이 곱게 커 왔을 귀족 영애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부탁한다. 네 재주를 가르쳐 다오.”
“…그런 거였군요.”
그런 거였어. 레티시아는 속으로도 중얼거렸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다이애나에게 더 물어볼 것도 없을 정도로.
“그래. 물론 맨손으로 부탁하지는 않겠어. 네가 평생 꿈도 못 꾸어 봤을 부를 줄게. 원한다면 새로운 신분도…….”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의 말을 끊었다.
“신분은 필요 없어요. 얼마나 주실 건데요?”
다이애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마치, 레티시아에게 미카엘에 대한 조금의 의리를 기대라도 한 것처럼.
“네가 원하는 만큼.”
“저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아요. 정확히 얼마를 주실 건지,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다이애나는 짜증스레 말을 내뱉었다.
“우리 가문이 돈을 아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 같은 것에는 돈을 아낄 수도 있겠죠. 이미 전하의 안위에 상당한 자금을 소비하지 않으셨나요?”
“거기까지.”
후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레티시아가 후작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낯선 이가 풍기는 위압감에 놀라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하지만 지금의 후작은 좋게 봐 주어도 고생을 많이 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모든 상황이 제 마음대로 굴러갈 텐데도, 후작은 아집과 피로가 똘똘 뭉친 형태로 나날이 쪼그라들었다.
“마녀야, 네가 원하는 건 뭐지?”
“돈이요.”
레티시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전부 금화로 주세요.”
“……!”
그레이엄 부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레티시아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탓이었다.
은화는 오직 제국에서만 통용되었다. 금화는 녹여서 금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대륙 어디에서든 화폐로 사용이 가능했다.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인가?”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후작님께도 나쁜 얘기가 아닐 텐데요?”
“그 말은 맞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를 원하지?”
“…….”
레티시아는 물끄러미 서재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편지 봉투와 흰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를 부를까?’
허무맹랑한 액수를 부른다면 거래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후작의 입장에선 그 자신의 자산을 거덜 내느니 차라리 레티시아를 계속 황태자의 궁에 두는 게 나았다.
“잠깐만요.”
“지금 뭐 하는 거지?”
레티시아는 웅성대는 그레이엄 부녀를 무시했다. 그녀는 원칙대로라면 미카엘만이 쓸 수 있는, 하지만 무척 손에 익은 깃펜을 잡고 흰 종이에 글씨를 그들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써 내려갔다.
“도움이라도 요청하려는 건가? 누구에게?”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종이를 편지 봉투 안에 집어넣은 다음, 책상 위의 풀을 이용해 밀봉했다.
“후작 각하를 상대로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법이죠. 주신다는 대로 받겠어요. 단…….”
그녀는 잠시 심호흡했다.
“너무 적게 받아서도 안 되겠죠? 이 봉투 안에 든 건 최소 금액이에요.”
“…교활한 마녀 같으니.”
마침내 레티시아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작이 중얼거렸다. 레티시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제게 얼마나 주실 건지 먼저 말씀해 주세요. 여기에 적힌 것보다 큰 금액이라면 다이애나 아가씨께 모든 걸 알려 드리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