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50)

36화

다이애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께서 제시한 액수가… 봉투를 뜯었을 때 나온 금액보다 낮으면?”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경우엔 가르쳐 드리지 않겠어요. 돈이 그렇게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그렇군.”

다이애나의 말투는 어딘지 감탄하는 어조로 들리기까지 했다.

“그냥 네가 얼마를 원하는지 불러라.”

후작이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얼마나 더 네 욕심을 부려야 성에 차겠느냐?”

“욕심이라뇨?”

레티시아는 가볍게 반문했다.

“저는 분명 주시는 만큼만 받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후작은 레티시아가 든 봉투가 마치 흉측한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네게 강제할 수도 있다. 가족들의 손가락이 네가 보는 앞에서 다 잘려 나가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레티시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왜 웃지?”

“그렇게 얻어 낸 결과를 믿을 수 있으시겠어요?”

레티시아는 굳이 그녀의 가족들과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없었기에.

“…네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전하께서, 그렇게 얻어 낸 다이애나 아가씨의 능력에 감복하실까요?”

다이애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부러 말문을 닫으실 수도 있다는 소리구나.”

“아가씨는 이해가 빠르시군요.”

“저것의 말을 듣지 마라. 못 하는 말이 없는 마녀지 않느냐.”

“아버지, 그냥 저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겠어요. 돈을 원한다고 하니, 많이 줘 버리죠.”

“다이애나.”

그레이엄 후작은 막내딸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네가 안 되는 거다.”

“…….”

“저것은 이미 우리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려고 하다니…….”

다이애나는 레티시아의 손에 들린 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네? 돈이면 뭐… 그렇게 큰 액수가 들어 있기야 하겠어요? 기껏해야 시골 출신 황궁 하녀인데.”

후작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결국은 딸의 설득에 넘어갔다.

침묵은 길었다. 레티시아는 기꺼운 마음으로 후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길어지는 건 좋은 징조였다.

마침내, 후작의 입이 열렸다.

“550만 리브레. 전부 금화로.”

레티시아는 실룩거리는 입술을 자제했다. 아직은 축배를 들기엔 조금 일렀다.

“그걸 어떻게 믿죠?”

“내가 약속을 어길 사람으로 보이나?”

“아시잖아요?”

레티시아는 손으로 필기구를 가리켰다. 후작의 입술이 비틀어졌지만,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레티시아 우즈에게 한 달 이내에 550만 리브레를 지급하겠다는 증명서를 적어 내려갔다.

‘됐어.’

550만 리브레.

레티시아가 예상했던 금액보다 곱절은 많은 액수였다.

만약 레티시아가 단순히 큰돈을 원했다면 진작 후작에게 적당히 큰 액수를 제시하고, 돈을 받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후작에게서 가져올 수 있는 최대치를 원했다. 레티시아가 모르는 건 물론, 후작 자신조차 정확한 수치를 모를.

그래서 후작의 입에서 직접 나오게 할 방법을 썼다. 그 과정에서 후작의 기분이 퍽 상한 건 생각지 못한 보너스였다.

레티시아는 후작이 자신의 인장을 증명서에 찍은 다음에야 밀봉된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부녀의 꼭 닮은 눈들이 봉투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책상에 있던 편지 칼을 집어 들어 봉투를 여는 후작의 손이 살짝 떨렸다.

“…….”

후작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분노가 맹렬히 일어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작게 미소 지었다.

“나를 놀려 먹었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고 해 두죠.”

“하! 이건 조롱이지.”

후작은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흰 백지에는 왼쪽에 조금 치우친 형태의 ‘1’이 적혀 있었다.

“난 단돈 10리브레를 말해도 되었다. 그런데 네까짓 것에게 웬만한 자작령을 사들이고도 남는 돈을 제시했어. 이게 날 조롱한 게 아니라면 무엇이지?”

“…아버지.”

다이애나가 후작의 소매를 붙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끝난 일이에요.”

“…….”

후작은 손을 치켜들었다.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겪어 본 일이었기에, 이어질 행동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레티시아는 후작과 다이애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다이애나를 자신 쪽으로 크게 잡아당겼다.

퍽!

후작의 손날이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레티시아는 황급히 다이애나에게서 떨어졌다. 머리가 얼얼했지만 그보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충격을 더 받은 상태였다.

“…….”

몇 분간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려 하지 않는 침묵이 흘렀다. 후작은 노기를 감추지 못한 채 손을 떨었고, 다이애나는 놀란 눈으로 레티시아만을 바라보았으며, 레티시아는 후작이 써 준 증명서를 손에 꼭 쥔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결국, 침묵을 깨트린 건 후작이었다.

“원하는 대로 받았으니 이제 원도 한도 없겠지. 시작해라.”

후작은 폭풍처럼 성큼성큼 걸어 방을 빠져나갔다.

레티시아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먼저 입을 열어야 할 쪽이 그녀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다행히 다이애나가 입을 열기까지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있잖아,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 물어보세요.”

레티시아는 높으신 분들을 접대할 때면 으레 띠곤 하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쉽게 승낙했지?”

“…쉽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후작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요.”

“그 봉투 놀음은… 나도 놀라긴 했어. 그건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애당초 돈을 얼마나 주겠다고 하든 네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왜 저를 그렇게까지 자극해 가며……?”

다이애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봤잖아. 우리 아버지.”

“그렇네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 없는 답이었다.

“어쨌든 내가 너에게 먼저 제의한 것조차 아버지 생각이야. 본인이 말하면 네가 듣지도 않고 거절할 거라면서, 날 시키셨지.”

“그건 맞는 말이네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6년 동안 자신이 후작을 잘 알게 된 것처럼 후작도 자신을 잘 알게 된 모양이었다.

“대답해 다오. 왜 단숨에 수락했지? 돈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글쎄요?”

레티시아는 작은 심술을 부리기로 결정했다. 유일한 밑천을 내놓는데,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지 않겠는가.

“아가씨 좋을 대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실제 이유는 간단했다. 다이애나 그레이엄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미카엘과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호르헤 경조차 레티시아에게 가르쳐 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레티시아와 미카엘 사이의 대화는, 그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라기보단 마법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호르헤 경이 떠난 이후엔 그 어느 누구도 레티시아에게 미카엘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적이 없었고.

“…아버지 말뜻을 알 것 같은데.”

“요부라는 말이요?”

“…겉은 어리고 순해 보여도 속은 사악한 마녀니 조심하라고 하셨어.”

“과대평가를 하셨네요.”

“아니. 내가 보기엔 정확한 평가야, 레티시아 우즈.”

다이애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우즈 선생.”

“…….”

레티시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연약한 소녀의 손에선 레티시아와 달리 험한 일 한번 해 본 적 없는 자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다이애나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자, 그럼 바로 수업을 시작할까?”

레티시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청소할 시간이 없겠는데.’

후작과의 거래와는 별개로, 그녀는 황태자 궁의 하녀였다. 주 업무는 서재 청소인.

만약 다이애나 그레이엄을 가르치느라 업무에 소홀해진다면 미카엘이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차릴 것이다.

‘걱정을 끼치는 건 싫으니까…….’

레티시아는 당연히 후작 부녀와의 거래를 미카엘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이 업무에 소홀해졌다고 미카엘이 생각하는 게 싫었다.

“청소를 도와주신다면요. 저도 보기보다 바쁜 사람이거든요. 만약 싫으시다면…….”

“알았어.”

레티시아가 놀랄 틈도 없이, 다이애나는 그녀가 바닥에 떨어트렸던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보아하니 내가 건드리면 안 될 것들도 있는 것 같은데.”

“…후작님께 들으셨어요?”

“그냥, 추측이야.”

“바닥을 청소할 생각이 없다면, 책장이라도 닦아 주세요.”

레티시아는 그녀에게서 빗자루를 빼앗고, 걸레를 건네주었다. 다이애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바닥이구나. 그렇지? 그럼… 이 책들인가?”

“아가씨, 정말 제게 뭔가를 배우기를 원하신다면 청소에만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앗, 미안.”

다이애나는 정말로 실례했다는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어. 내 실수야.”

“…….”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열심히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카엘은 오늘만큼은 암호를 남겨 놓지 않았다.

그녀는 자꾸 자신 쪽으로 돌아보는 다이애나에게 보란 듯이 책들을 아무렇게나 책장에 꽂아 넣었다.

다이애나는 걸레질을 하면서도 힐끔거리며 레티시아가 책을 꽂아 넣는 모양새를 살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제법 유쾌한 상황이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안쓰러워 레티시아는 슬쩍 언질을 주었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어요. 딱히 암호 같은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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