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래 보이더구나.”
그렇게 대답하는 다이애나의 눈은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서재는 물론 그와 이어진 방의 청소를 끝냈다.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의 상태를 살폈다. 연약한 귀족 영애의 볼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생각보다 힘든데.”
“제가 맡은 일은 쉬운 축이에요.”
“이게?”
다이애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리가!”
“…….”
레티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다이애나에게 훈계를 할 수도 있었다.
이보다 힘든 일은 세상에 많다고, 그녀가 여태까지 겪은 건 세상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중 어느 무엇도 이 아가씨에게 통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레티시아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해해요. 고문당해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보다, 당장 내 손에 박힌 가시가 아프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겠죠.”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화를 내겠지.’
다이애나는 그레이엄 후작보다야 속을 읽기 쉽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었으나 사용인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에게는 놀랍게도, 다이애나는 버럭 화를 내거나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 어디서 들었지?”
“네?”
이번엔 레티시아가 놀랄 차례였다.
“그냥, 제 생각인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다이애나는 좀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누가 말했지?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실 리는 없고… 네가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뻔하니. 전하에게서 들었니?”
“전하요?”
레티시아는 입을 가렸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이애나가 왜 방금 전 자신이 한 말을 남에게서 들었다고 생각하는지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이애나 역시 지성은 오직 귀족들만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일 테니.
하지만 그 출처가 미카엘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웃어도 흠이 잡히지 않을 거리였다.
“전하께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면 제가 후작님께 그만한 거금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
“너와 단둘이 있을 때면 평범하게 말씀하시는 게 정말 아닌 거니?”
다이애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티시아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다이애나의 말은 겉으로는 순진한 귀족 영애의 억측인 듯했지만, 어딘지 그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여태껏 레티시아의 직감은 썩 잘 맞아 왔지 않았던가.
“후작님께선 여태까지 그걸 의심하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 내가 생각한 거야.”
“완전히 잘못 짚으셨어요. 전하께서 굳이 그러실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많지.”
다이애나가 천천히 말했다.
“널 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잖아.”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계시는군요.”
“모르는구나.”
레티시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어쩌면 자신은 다이애나를 조금 얕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레이엄 후작의 딸이라고 해 보았자 자신보다 한두 살가량 어릴 듯한 소녀.
하지만 다이애나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을 가지고 자신을 효과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나를, 황후로…….’
다이애나는 조금 전 두 가지 의미를 암시했다.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공식적인 반려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와, 미카엘이 그저 허수아비 황태자로 머물다 물러나지 않고 황위에 오르리라는 의미.
둘 모두 위험하기 그지없었으나 레티시아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든 것은 후자였다.
어차피 후작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딸에게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애인이라는 말을 열심히 주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위험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무례하구나. 감히 네가?”
다이애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지만,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그들이 이곳에 함께 있는 목적을 상기시켰다.
“청소는 이쯤이면 되었어요. 이제 제가 후작님께 받은 돈값을 해야 될 테니까요.”
“…천박하지만, 예상은 벗어나지 않는구나. 좋다. 어디 수업을 시작해 보렴.”
세 시간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의기양양하게 서재를 빠져나가는 다이애나를 기진맥진한 채 배웅했다.
‘뭐 저런 사람이……!’
다이애나는 마치 레티시아에게 주기로 약속한 돈값을 제대로 뽑아내려고 작정한 것처럼 레티시아에게 온갖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하나같이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사항들이었기 때문에 레티시아는 곧이곧대로 답변해 주었다.
물론, 미카엘과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엔 다이애나는 마치 명인의 비법을 듣는 자세처럼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지만, 이는 잠시간에 불과했다.
레티시아가 때와 상황에 따라 직감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내 먹잇감을 뜯어 먹으려는 사냥개처럼 캐물었으니까.
‘만약 같은 상황이었는데 전하께서 네 해석과 다른 의미를 뜻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글쎄요. 딱히 그랬던 적은 없고, 제가 영 딴소리를 하면 전하께서 거듭 알려 주셔서…….’
‘거듭 알려 준다는 건 말을 반복한다는 거지?’
‘네.’
‘오히려 강조의 표현일 수도 있지 않아?’
‘…….’
‘레티시아 우즈, 나와 내 아버지는 추측에 돈을 지불한 게 아니야. 명확한 답만을 제시해. 그래야 내가 전하와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지.’
명확한 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레티시아가 속으로 ‘미카엘 언어’라고 이름 붙인 미카엘만의 단어 용법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건 물론 미카엘이 성장하면서도 급격히 바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쓰던 말을 그다음 날부턴 한 번도 입에 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다이애나에게 지금 알려 주는 말들 역시 미카엘의 내부에서 언제 의미가 바뀔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도저히 그 설명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레티시아가 할 수 있었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전하와 직접 대화해 보시면 제가 뭘 말했는지 아실 거예요.’ ‘과연 그럴지 봐야겠구나.’
다이애나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는 자의 미소였다.
‘어쩌려나…….’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좋아하는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다이애나가 미카엘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이제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미카엘과의 유일한 창구가 자신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그에게 제한이 되고 있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그리고… 미카엘이 저렇게 된 게, 나 때문일지도 몰라.’
미카엘은 지금 열여섯.
황제가 된 미카엘은 정상적으로 말했으니, 열여섯 살엔 어느 정도 말문이 트였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사용하는 어휘들이 늘어나고 그 의미가 변화하는 게 발전의 전부였다.
미카엘이 그 자신과 레티시아 둘만 알아볼 수 있는 제스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희망적이었지만, 레티시아는 그걸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기기만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영영 말을 저렇게 할 수도 있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왔다. 레티시아는 미카엘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던 자신이 평범한 하녀로 돌아갔을 때, 미카엘이 보인 반응을 기억했다.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미카엘은 레티시아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들을 고래고래 외쳤으며, 레티시아의 이름만을 한 시간 내내 되뇌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미카엘은 그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스스로 만들어 내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로 레티시아와 연락하는 것.
레티시아는 흔히 언어의 창조에 비견되기도 하는 암호 제작을 어떻게 미카엘이 해냈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계는 커.’
이 모든 건 미카엘이 황제가 되기 전에 끝나야 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비록 자신에게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상대였으나, 다이애나가 미카엘이 세상에 내딛는 새로운 한 발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걸 떨어트렸네.’
그녀는 그레이엄 후작에게 보여 주었던 종이를 바닥에서 주워 올렸다. 아무래도 청소하던 중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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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는 잠시 종이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 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
한숨이 입 안에 감돌았다. 미카엘이 문이 아닌, 비밀 통로의 입구에 기대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묘한 빛깔의 푸른 눈이 즐거운 듯 빛났다.
레티시아는 그 통로를 기억했다. 밖에서는 통로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지만, 통로 안에서는 이 서재를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미카엘은 상당한 시간 동안 그녀를 엿보고 있었으리라.
“거기에 얼마나 계셨어요?”
“머리.”
“처음부터요? 세상에… 알은체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자갈.”
“전하께서 감히 전하께 반하는 논의를 방해한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를 가져갔다. 다음 순간, 미카엘의 수려한 눈썹이 올라갔다.
“거울?”
레티시아는 피식 웃었다. 거울은 그 어떤 거짓도 없이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미카엘은 정말로 그녀에게 단 1 리브레를 썼는지 묻고 있었다.
“저도 바보는 아니랍니다.”
“…….”
“못 믿으시는군요. 그 종이, 잠시만 주세요.”
레티시아는 책상 위 올려진 등잔에 종이를 가져다 대었다.
그녀가 일을 끝마치기도 전에 미카엘은 이미 모든 사실을 눈치챈 듯했지만, 그래도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고 싶었다.
레티시아는 원하는 만큼 종이에 열을 가한 다음, 미카엘을 향해 펼쳐 보였다.
좀 전 그레이엄 후작 부녀가 보았던 1 옆에, 그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숫자가 선명히 드러났다.
10,000,000
천만 리브레.
후작이 약속한 550만 리브레의 약 두 배가량 되는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