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미카엘은 조용히 책상 위 놓인 여러 개의 잉크병 중 가장 작은 잉크병을 집어 들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을 가해야 글씨가 나타나는 특수 잉크는 제법 많은 돈을 투자해야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제가 뭐랬어요. 언젠가는 쓰일 때가 있을 거라고 했죠?”
“불가사리.”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불가사리라니? 불가사리는 그 별을 닮은 생김새 때문에 모조품이나 가짜를 의미했다. 지금 쓰일 만한 단어는 전혀 아니었다.
“…다리.”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불가사리의 다리는 아무리 잘려 나가도 새로 재생된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 역시 새로운 불가사리로 자라난다.
불가사리를 공격한 적이 오히려 불가사리를 도와주게 되는 셈이다.
‘내 계획이 후작의 허를 찌를 만큼 대단하다는 거야.’
하지만 레티시아의 눈시울이 시큰해진 이유는 미카엘의 칭찬에 감동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어를 조합했어!’
그간 단어 한 개를 겨우 내뱉는 게 전부였던 미카엘이 두 가지 단어를 조합해서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레티시아는 축축해진 눈가를 얼른 손등으로 훔쳤다. 미카엘 앞에서 또 울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이 나를 걱정하게 만들어선 안 돼. 미카엘은 아직 어리잖아…….’
비록 레티시아보다 키가 훌쩍 커졌을지언정, 스무 살이 열여섯 살짜리의 동정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정말 기뻐요.”
“……?”
미카엘이 레티시아의 반응이 왠지 달갑지 않은 듯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레티시아는 그가 설명을 원한다는 걸 알았지만 목이 메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기억 속 소설과 달리, 여태껏 미카엘의 언어가 제자리걸음이라는 사실이 레티시아의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설과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으나,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모든 변화는 레티시아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중 가장 나쁜 차이점이 바로 미카엘의 언어 능력이 어릴 적과 별다른 게 없다는 점이었고.
평소, 레티시아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어릴 적과 달라진 미카엘의 표현이나 한결 풍부해진 제스처를 위안으로 삼으면서.
하지만 레티시아의 가슴 깊은 곳엔 불안과 죄책감이 뒤엉킨 기묘한 감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자신 때문에, 미카엘의 언어가 제자리걸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레티시아 때문에 미카엘이 영영 말을 되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오르는 날에는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 경우, 레티시아는 평생 미카엘의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게 레티시아가 불러일으킨 거대한 나비효과에 책임을 지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카엘을 위해서 자신이 전생에 읽은 소설 속 폭군처럼 미카엘이 말을 완벽하게 할 수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지금, 미카엘이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다.
“달.”
레티시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미카엘이 자신에게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기뻐하는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아, 그, 제가 왜 이러고 있냐면요…….”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꼴까닥 삼켰다. 미카엘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진실의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내보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 전하께서 말을 조금만 더 잘하시면, 저도 이 일을 그만둬도 되겠다 싶어서요.”
그 말이, 미카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
미카엘의 얼굴에서 죽은 사람처럼 표정이 싹 빠져나갔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지난 6년간 미카엘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핀 자신이었다.
지금 미카엘이 무척 심기 불편한 상태이며, 심지어 그 사실을 레티시아에게서 숨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덴 딱히 거창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안한 거야, 미카엘도.’
레티시아는 바싹 마른 입 안을 혀로 적셨다. 미카엘은 아직 열여섯이다. 아직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래의 일로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셔요. 제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전하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레티시아조차 둘을 완전히 분리해 낼 수 없는 교묘한 말이었다.
그녀는 이제 미카엘이 폭군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봐 온 미카엘은 결코 폭정을 휘두르다 암살당한 폭군으로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레티시아는 황태자의 하녀, 혹은 비서라는 신분을 포기하더라도 미카엘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미카엘이 그걸 원해야 하겠지마는.’
하지만 미카엘 곁에 붙어 있느라 그녀만의 작은 가게를 열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카엘에 대한 책임감과 안타까움은 오랜 기간 자라 이제 레티시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미래를 알게 되어 집을 뛰쳐나왔을 때부터 소중히 간직한 꿈은 미카엘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미카엘의 일렁이는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빛을 받으면 푸른빛과 초록빛을 오가는 미카엘의 눈은 이번만큼은 어떠한 빛도 담지 않은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전하, 절 못 믿으시겠어요?”
“…….”
미카엘은 말없이 레티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손은 차가웠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붙들어 매는 미카엘이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레티시아는 안도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카엘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고, 레티시아의 손을 쥔 힘도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 * *
“전하께 말씀드렸어?”
다이애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자존심이 높아 레티시아의 머리 위에 있고 싶어 하는 다이애나도 미카엘 당사자의 반응만큼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카엘이 모든 걸 엿듣고 있었다고 일러 버리고 싶은 못된 충동이 일었지만,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못된 감정들을 참는 데 익숙했다.
“뭐라고 하셨지?”
“뭐……. 별말씀 없으시던데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래도 다이애나의 입버릇은 ‘그럴 리가 없다’인 모양이었다.
“전하께선 그런 분이세요.”
다이애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죠. 본인이 거부한다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아시니까.”
“그 말,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반역죄로 잡혀 들어가고도 남을 말인 거 알아?”
“하지만 아가씨는 그러지 않으시겠죠? 제가 없어지면 안 되니까.”
“…….”
다이애나는 분한 듯 열기 띤 눈으로 레티시아를 노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도 말이 통하는 상대가 늘어나면 좋아하실 테니까요.”
“…너는?”
“저요? 저도 좋아요.”
레티시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애당초 그녀가 겨우 돈에 움직인 이유도 미카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길 바라서가 아니었던가.
“왜지?”
“네?”
“내가 전하와 대화하는 법을 배운다면… 네 입지가 좁아지는 게 아닌가?”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이애나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미카엘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레티시아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에 빛이 바랠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이 황태자 궁에서 차지하고 있는 알량한 지위가 미카엘의 고독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아버지가 널 바로 전하의 곁에서 쫓아낼 텐데도?”
“과연 그러실 수 있을까요?”
레티시아는 반문했다.
“이미 후작님께선 저를 한 번 쫓아내었다가, 다시 불러들이셨어요. 모르시진 않으실 텐데요.”
4년 전.
레티시아와 황태자가 수시로 만나고, 대부분의 업무는 그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작은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그날로 레티시아는 짐을 싸서 황태자 궁을 나가야만 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황궁에 출입할 수 없는 신분인 졸부의 저택에 자리를 잡았다.
‘일주일도 못 버티고 후작이 직접 나를 찾아왔지.’
레티시아의 추측대로, 다이애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초조한 티를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니까.
“아버지께서 그러셨던 이유는, 전하와 대화할 수 있는 게 오직 너 하나였기 때문이었어!”
“다이애나 아가씨.”
레티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가씨께 모든 걸 가르쳐 드릴 수는 없어요. 아가씨 역시 그걸 원하시진 않을 거고요.”
“왜? 나는, 나는……. 전하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를 원해. 너 역시 그 대가로 돈을 받은 거고.”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행의 제 금고를 두둑하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하와 완벽하게 대화한다는 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서요.”
“무슨 소리지?”
“전하의 말은… 계속 변해요. 어제는 좋다는 의미였는데, 오늘은 싫다는 의미일 수도 있죠.”
“…….”
“한 가지 말이 다섯 가지 의미를 담고 있을 때도 있어요. 전하의 입에서 제가 난생처음 듣는 말이 나올 때도 있고요. 이걸 다 익히실 수 있겠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눈치를 잘 보셔야 해요.”
“눈치?”
다이애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역시, 이 자존심 높고 기세등등한 귀족 아가씨와 눈치는 그다지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이애나의 말은 레티시아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