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가 그동안 해 왔던 일이니, 못할 것도 없겠구나.”
“……?”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입만 뻐끔거렸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아뇨.”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놀랐다니?”
“다이애나 아가씨는 딱히 누구의 눈치를 보셔야 할 분은 아니시잖아요.”
레티시아에게, 눈치란 항상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의 미덕이었다.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후작의 막내딸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
“솔직하구나.”
다이애나의 한숨이 들려왔다.
“네 말도 맞아, 레티시아 우즈. 내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눈치를 보고 있어.”
“후작님인가요?”
“그래.”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아버지의 눈치를 보다니, 참 이상하지?”
“이상하지 않아요.”
레티시아는 조용하게 말했다. 아마 다이애나가 뜻하는 ‘눈치’와 레티시아가 여태까지 생존을 위해 갖췄어야 했던 ‘눈치’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같은 종류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레티시아는 굳이 그 사실을 다이애나에게 상기시키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속으로는 알고 있을 테니까.
“저도… 가족의 눈치를 보는 게 시작이었거든요.”
“그럼 내 상황을 좀 이해하겠네.”
“대충은요.”
“아버지는… 날 사랑하셔. 분명히 아끼시지. 어쩌면 오빠보다도, 언니보다도 더. 하지만… 가끔씩 소름 끼칠 때가 있어.”
다이애나의 태도는 맹랑한 하녀를 가르치려는 귀족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꼭… 고해 같아.’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에게서 눈을 피하지도, 딴청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녀는 딱히 다이애나의 개인 상담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고민을 진지하게 토로하는 자의 말은 그에 알맞은 태도로 경청해야 하는 법이다.
“이따금 생각하지. 내가 아버지가 펼쳐 놓은 체스 판에서 뛰쳐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레티시아가 조금만 더 생각을 했더라면 그녀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얌전히 밀어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의 말은 레티시아가 오랜 기간 간직해 왔던 번득이는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기에.
“괜찮아요.”
“뭐가?”
“뛰쳐나가도, 괜찮다고요.”
레티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동시에 배 속이 울렁거렸다.
“저도 그랬거든요.”
“…….”
다이애나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잘 빚은 조각상 같은 다이애나의 얼굴에 일순간 파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놀란 거야.’
레티시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제 가족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저는 평생을 체스 판 위 졸병 역할만 하다가 죽었겠죠.”
“폰이야.”
다이애나가 정정했다.
“알아요. 저도 배웠으니까.”
“폰이, 체스 판의 끝까지 도달하면 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
레티시아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제가 어디 체스 판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는 폰이던가요?”
폰 하나가 체스 판의 끝까지 도달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폰들이 죽어 나간다.
레티시아가 보기엔 자신은 물론 다이애나 역시 결코 퀸이 되기 위해 움직여지는 폰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왜 너를 조심하라고 하셨는지 알겠어. 너무 많은 걸 배웠구나.”
“…….”
“하지만 정확해. 그래, 나 역시 퀸이 될 수 없지…….”
“…….”
다이애나는 무거운 시선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가냘픈 다이애나의 얼굴은 어딘가 구조를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너 같은 용기는 없단다. 자, 아까 하던 거나 좀 더 가르쳐 줘. 전하께서 목이 마르실 땐 뭐라고 말씀하신다고?”
레티시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보통 그녀와 미카엘의 대화는 본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본인이 물을 드세요. 그러지 못할 경우엔…….”
달칵.
문이 열렸다. 레티시아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황태자의 약혼녀가 비밀리에 교육받는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었으니까.
‘생각보다 이른데.’
원래 미카엘은 해가 진 이후에나 레티시아와 다이애나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서재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 들어왔다는 건, 다이애나와 얘기하라며 후작이 정해 놓은 스케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
미카엘은 이 상황을 여느 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이 상황에 동조해 버린 자신에 대한 미약한 죄책감을 느꼈다.
“…….”
미카엘은 다이애나가 아닌, 레티시아를 쳐다보았다.
“저… 두 분이서 대화 나누시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다이애나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레티시아를 쳐다보았다. 다이애나 역시 도와 달라는 듯 레티시아의 손끝을 건드렸다.
결국 상황을 정리하는 건 레티시아의 몫이었다.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레티시아는 황태자와 황태자의 약혼녀에게 올릴 수 있는 열 가지도 넘는 인사말을 알고 있었지만 그중 무엇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면서 사라지는 게 이 둘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둘 중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달칵.
레티시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바로 가는 게 좋겠지.’
청소는 이미 끝났다. 원래라면 다이애나를 몇 시간은 더 가르쳐야 했지만, 미카엘이 왔으니 다이애나에 대한 레티시아의 의무 역시 종료되었고.
레티시아는 자신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미카엘과 대화하고자 하는 자가 호르헤 경 이후로 처음 아닌가!
‘아, 그레이엄 후작도 몇 번 시도하긴 했지. 제대로 말하라며 어린 소년을 윽박지르는 것도 시도라고 볼 수 있다면.’
그녀는 닫힌 문 옆에 몸을 기댔다. 황태자 궁의 문들은 어느 정도의 소리는 막아 주었지만, 문틈 바로 옆에서 귀를 기울이면 웬만한 대화는 다 들렸다.
레티시아는 아주 잠시만 듣고 갈 생각으로 귀를 기울였다.
“전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침묵이 흘렀다.
“저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여전히 침묵.
레티시아는 굳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이애나의 당황한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미카엘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자신과 대화하려는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했다. 입 하나 뻥긋하지 않는 건 미카엘답지가 않았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탄생회에서 감사했어요. 엄청 겁을 먹고 있었는데, 친절하게 대해 주셨으니까요.”
“무당벌레.”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미카엘이 지금보다 어렸을 때 후작에게 종종 그랬듯, 무례한 단어를 내뱉어서가 아니었다.
‘왜 무당벌레가 여기서 나오지?’
무당벌레는 결코 내려가지 않는다. 오직 높은 곳을 향해 계속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꼭대기에 도달하면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미카엘은 무당벌레를 이상주의자를 의미할 때 말하곤 했다.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아냐, 다이애나 아가씨에게 이상주의자라고 말한 거일 수도 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엘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뜻을 파악하는 데도 한계가 컸다. 벌써부터 지레짐작하는 건 옳지 않았다.
물론, 불쌍한 다이애나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전하, 제가 불편하시다는 건 충분히 알겠어요. 제가 만약 전하의 입장이라도 기분이 전혀 좋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 아버지를 보아서라도 저와…….”
“물.”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카엘은 이번에도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내뱉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모, 목이 마르세요?”
“의자.”
“제가 잘못 알아들은 건가요?”
“바위.”
“죄송해요, 제, 배움이 아직 짧아서…….”
다이애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기어들어 가는 수준이었지만 레티시아의 귀에 아프게 박혔다.
미카엘과 다이애나의 문답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그중 무엇 하나 제대로 통하는 대화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몇 번이나 들어가 대화를 끊으려고 문고리를 만지작거렸지만, 비겁하게도 문을 열지는 못했다.
마침내,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 다이애나가 미카엘에게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또각.
아주 조금의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이애나의 물기 어린 눈이 커졌다.
도망칠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레티시아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다이애나에게 알려 주어야 할 사실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멍하게 서 있는 다이애나 대신, 열려 있는 문을 닫았다. 이제 복도엔 오직 그녀와 다이애나뿐이었다.
다이애나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엿듣고 있었구나?”
“…네.”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
“…….”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상관없어.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다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안 그러니?”
“다이애나 아가씨.”
“응?”
레티시아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분명 저 문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미카엘은 지금 그녀가 할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몇 년에 한 번쯤 볼까 말까 한 큰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 안쓰러운 귀족 아가씨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에요. 전하께서 엉터리로 말씀하셨어요. 일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