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전하께서?”
다이애나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왜…….”
“모르겠어요.”
“정말 그러니?”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짚이는 게 아예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카엘 본인이 아닌데, 어떻게 그 속을 다 알겠는가. 잘못 얘기했다가 둘의 사이만 더욱더 갈라놓는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뭐, 그냥 심술인 것 같긴 한데…….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카엘은 아직 어렸다. 원치 않은 약혼에 화나 약혼녀를 박대한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티시아는 다이애나가 미카엘에게 속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레티시아에게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전하께선 그냥 내가 싫으신 거야. 널 밀어 내고 네 자리를 차지하려고 드니까.”
레티시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에 조금 날카롭게 대답했다.
“다이애나 아가씨, 전하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위로 고맙긴 한데… 위로가 하나도 안 되는구나.”
다이애나는 힘없이 웃었다.
“정말 위로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다른 여자와 함께 공유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는 꼴을 보느니, 벌써 이 궁을 박차고 나갔겠죠.”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의 말이 하얀 거짓말로만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저를 필요로 하는 동안만 옆에 있기로 맹세했을 뿐이에요.”
“그랬구나.”
“못 믿으시는 거죠?”
“아니.”
다이애나가 고개를 저었다.
“믿을래.”
비록 레티시아가 원했던 신뢰의 표시보다는 소망의 표시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대놓고 거부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내 공부가 부족한 것도 맞는 것 같구나. 오늘은 밤까지 가르쳐 주겠어?”
“네.”
레티시아는 문제의 원인은 다이애나가 아닌 미카엘에게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손하게 대답했다. 태연한 척하는 와중에도 부들부들 떨리는 다이애나의 어깨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레티시아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레티시아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이마를 짚으려는 신입 하녀의 손길을 거절했다.
며칠 전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열감기라도 된통 걸린 모양이었다. 아마 밤늦게까지 다이애나를 가르쳐 준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바텐 사건 이후로 자신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하는 모양인 신입 하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아파 보이셔요……. 제가 대신 청소할게요. 들어가서 쉬세요. 어차피 여긴 하녀장도 없으니까, 뭐라 할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아.”
“걱정도 많으셔. 레티시아 님, 아무도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지 않아요!”
레티시아는 이 순진한 신입 하녀에게 일전에 호르헤 경에게서 들은, 황궁의 벽에는 귀와 눈이 달려 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후배에게 친절을 베풀기엔 목이 너무 아프고 귀에 이명이 띵하니 울렸다.
“레티시아 님, 진짜 안 괜찮으신 거 같은데…….”
“괜찮아.”
쉰 목소리가 나왔다. 만약 레티시아가 맡은 일이 말 그대로 청소였다면 진작 들어가서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애나와 미카엘이 엮여 있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따라오려는 신입 하녀를 부드럽게 돌려보내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다이애나는 여느 때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잔 모양인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다 미카엘 때문이야.’
레티시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어제도 다이애나는 미카엘과 대화를 시도했고, 미카엘은 일부러 말이 되지 않는 대답을 이어 나갔다.
레티시아는 둘을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미카엘은 그녀가 다이애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녀에게 일거리만 잔뜩 던져 줄 뿐이었다.
은연중에 자신은 다이애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비치면서.
‘누가 그걸 모르냐고!’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왜 그렇게까지 다이애나를 꺼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여태까지 봐 온 귀족들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다이애나는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약혼자 아닌가. 좋든 싫든 평생을 함께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벌써부터 적대시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의 딸이라서 꺼리는 걸까?’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후작의 사위가 되는 건 언젠가 닥칠 황제의 붕어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단순한 호불호를 가지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생각보다 미카엘이 폭군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는 뜻이리라.
“그냥 가서 쉬지?”
레티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다이애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코앞에 와 있었다.
“이런 상태로 뭘 가르치겠다고.”
“아가씨도 마찬가지신걸요.”
“아파서 상황 판단이 제대로 안 되는구나.”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서 쉬어.”
“하지만…….”
“그동안 널 늦게까지 붙들고 있어서 미안했어.”
“……?”
레티시아는 순간 자신이 열 때문에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미안하다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결코 그레이엄 후작의 딸에게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사실 욕심이었거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전하의 말을 알아듣고 싶다는……. 나 때문에 무리해서 이렇게 되었구나. 미안해.”
만약 레티시아의 상태가 조금만 더 괜찮았다면 다이애나의 푸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을 것이다.
레티시아 우즈는 평범한 하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뜨거운 열기와 다이애나의 약한 모습에 레티시아의 자제력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그게 왜 욕심인가요? 다이애나 아가씨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자시잖아요.”
“…….”
그렇지 않아도 안색이 좋지 않았던 다이애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약혼자라……. 약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약혼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네?”
“레티시아 우즈, 나와 전하가 언젠가 결혼식을 올리긴 할 거라고 보니?”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전생에 읽었던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황후는 없었던 듯했다. 그렇게 포악한 폭군에게 황후가 있었다면 분명 한 번쯤은 언급이 되었을 테니까.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어.”
다이애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레티시아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결국 다이애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돌아가렴. 오늘은 너도, 나도 뭔갈 할 정신이 아니구나.”
“저, 청소를…….”
“청소는 내가 할게.”
“그럴 순 없어요.”
“레티시아 우즈, 지금 내 말을 거역하고자 하는 거니?”
“…….”
“돌아가, 얼른. 아니면 내가 몸소 숙소로 데려다줄까?”
“아, 아뇨…….”
레티시아는 가볍게 무릎을 굽힌 뒤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왔다. 오늘 다이애나의 상태는 열에 들뜬 머리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이상했지만, 적어도 레티시아의 상태를 지적한 말만큼은 맞았다.
‘토할 것 같아.’
레티시아는 복도를 걷다 말고 헛구역질을 했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껐다 켜는 것처럼 눈앞이 반짝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 몇 분 만에, 눈앞은 완전히 캄캄해졌으니까.
* * *
‘푹신해…….’
레티시아는 두툼한 솜이불에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렇게 푹신한 침대는 미카엘의 비서에서 하녀로 강등된 이후 처음이었다.
하녀 숙소의 침대는 기본적인 매트릭스와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꺼운 거칠거칠한 이불이 전부였으니까.
그 말인즉슨, 이 침대는 결코 레티시아나 동료 하녀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
소름이 몸을 한 차례 훑었다. 레티시아는 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기만 하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앞이 가물거려 앞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누워 있어선 안 되는 방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다이애나 아가씨가 나를 옮겨 놓으신 건가…….’
레티시아는 구르듯이 이불에서 빠져나왔지만 바닥으로 내려갈 힘은 부족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다이애나야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이 호화로운 방으로 옮겼겠지만, 레티시아의 복잡한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니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리라.
‘이러고 있는 걸 들켰다간 이상한 소문만 쌓여.’
레티시아는 메마른 입을 침으로 적신 다음, 다이애나를 불렀다.
“다이애나 아가씨.”
쉬다 못해 거칠거칠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이애나는 자신을 이곳에 옮겨 놓은 후 집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기적인 배려였지만, 귀족들은 원래 다 그런 법이다.
“휴우…….”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초라한 침실까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제대로 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여야지.’
레티시아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미카엘과 함께 황태자 궁의 웬만한 장소들은 다 다녔기 때문에 이곳이 어딘지 바로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한숨 푹 잔 덕분인지 시야는 더 이상 가물거리지 않았다.
‘……?’
레티시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혀를 깨물 뻔했다.
황태자 궁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침대, 각종 거장들이 손수 그린 벽화, 그리고 당대 가장 위대한 조각가가 1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천장 조각까지.
레티시아의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동시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그녀는 한때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 있었다.
바로 미카엘의 침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