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미카엘이……?’
그렇지 않아도 열이 오른 머리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바닥을 짚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나를 여기에…….’
미카엘이 쓰러진 자신을 발견했다면 다른 사용인을 부르면 그만이다. 황태자 궁의 사용인들은 미카엘이 자신에게 다가와 무어라 말을 걸면, 그게 무슨 의미이건 간에 그를 따라가도록 교육이 되어 있었다.
“전하?”
레티시아는 소리를 내어 미카엘을 불러 보았지만, 지나칠 정도로 호화로운 황태자의 침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시종 한 명 없는 걸 보니 미카엘은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는 밖에 나간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야.’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항상 그녀의 건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렸을 때야 그저 이런 미카엘이 귀엽고 대견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옛날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 버렸다.
‘하기야, 아무도 없으니 나를 데리고 들어올 수 있었겠지.’
미카엘은 시종들을 따돌리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대놓고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배려심이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남의 시선을 피해 자신을 침실로 옮기는 조심성 정도는 발휘했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폭신한 카펫이 발목 근처까지 올라왔다. 레티시아는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어서 나가야 하나.’
레티시아가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그림자가 그 주인보다 먼저 방에 드리워졌다.
“레티시아.”
당연히, 미카엘이었다. 그는 침대 바로 옆에 주저앉은 레티시아를 발견하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레티시아는 칼칼한 목을 가다듬으며 항의했다.
“전하, 저는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요…….”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찻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 레티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게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물을 거부하기에는 목이 너무 말랐다.
미카엘은 따뜻한 물을 홀짝거리는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침대.”
“네, 쉴게요. 여기에서 말고요.”
“창문.”
“저는 여기서 쉴 수 없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달.”
“그야, 여긴 전하의 방이니까요. 제 방이 아니라. 저는 제 방에서 쉬고 싶어요.”
“…….”
미카엘의 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레티시아는 어느새 비어 버린 잔을 바닥에 놓고 다시 일어섰다. 물 한 잔의 힘인지, 이제는 제법 다리에 힘이 붙었다.
“약.”
“의사한테 가라고요?”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의사는 무슨. 저는 건강해요!”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힘이 빠져 미카엘의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었다.
“약.”
그러더니 레티시아가 일전 한 번 드나들었던 비밀 통로가 위치한 벽면에 눈길을 주었다.
“외부 의사를 여기로 데려오시려고요? 안 돼요!”
레티시아는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손을 뻗어 미카엘을 가로막았다. 그가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하려 드는지 짐작이야 당연히 갔다.
‘그야, 내가 걱정되니까.’
레티시아는 자신이 미카엘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자신은 미카엘의 유일한 우군이자 세상과의 소통 창구였다. 당연히 걱정될 만도 했다.
하지만 이건 지나쳤다. 그녀뿐만 아니라, 미카엘에게도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이다.
“전하, 제 방으로 돌아가면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할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레티시아는 웅얼거렸다. 처음에야 놀라서 목소리가 커졌지만, 계속 말을 하다 보니 목이 꽉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레티시아.”
노력이 무색하게도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레티시아는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염려를 볼 수 있었다.
“전……!”
레티시아는 입을 열었다가, 자신을 안아 올리는 미카엘에 놀라 그대로 굳어졌다. 레티시아는 손발을 내뻗으며 미카엘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몸을 조금 꿈틀거리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이건 과보호잖아…….’
미카엘은 그녀를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레티시아는 더는 반항하지 않고 겉보기엔 얌전히 누웠는데, 기가 너무 막혀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손을 잠시 잡고 토닥거렸다. 레티시아는 힘없이 한숨을 흘렸다.
“전하, 저흰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잖아요…….”
“약.”
“돌아가면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하겠다니까요?”
레티시아는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는 미카엘의 시선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은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레티시아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내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거지…….’
사실, 레티시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한들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누가 일개 하녀를 위해 의사를 불러 주겠는가? 아무리 황태자 궁에서 일하는 하녀라 해도 귀하신 분들이 부리는 부품에 불과했다.
만약 누군가가 일을 못할 정도로 크게 아프면 위로금을 조금 쥐여 준 채 쫓아내는 게 황궁이 돌아가는 생리였다.
간혹 사비로 의사를 불러들이는 사용인들이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레티시아 역시 그런 부류는 아니었고.
“버드나무.”
“버드나무라니요…….”
레티시아는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가장 기본적인 약재 중 하나가 바로 버드나무 껍질이었다.
의사를 부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야생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달여 먹었기 때문에, 마을 근처의 버드나무들은 속껍질이 모두 드러나곤 했다.
즉,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의사를 부르지도 않고 혼자 민간요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정확한 생각이었다. 레티시아 역시 버드나무 껍질이나 구해서 먹어 볼 생각이었으니까.
돈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그동안 의사의 진찰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크게 아픈 적도 드물뿐더러, 좀 쉬면서 버티다 보면 지나가는 병에 괜한 돈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때, 미카엘의 시종 중 한 명이 돌아온 모양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레티시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차피 들키겠지만 이렇게나마 미카엘의 시종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레티시아가 이불을 완전히 뒤집어썼을 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환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몇 번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지만 특유의 쇳소리 때문에 정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친……!’
저자는 시종이 아니었다. 미카엘은 그 자신의 주치의를 불러온 것이다. 겨우 레티시아를 위해!
‘전하, 이건 좀 아니잖아요…….’
직계 황족의 전담 주치의는 평범한 의사들이 아니었다. 모든 분야에서 두루 두각을 나타낸 제국 의학원 최고의 수재 출신인 건 물론, 필요한 경우엔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직접 맛보아야 했다.
물론, 전담한 황족의 명이 있다면 그 어떤 환자든 보아야 하는 게 그들의 임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상 역시 황족과 친분이 있는 귀족이나 중요한 심복의 경우였다. 레티시아 같은 평범한 하녀를 직계 황족의 전담 주치의가 진료한 적은 아마 제국 역사상 전례가 없을 것이다.
‘다이애나 아가씨가 몰랐으면 좋겠는데.’
레티시아는 열과 스트레스 탓에 자꾸만 무겁게 내리눌리는 눈꺼풀을 지탱하려 애쓰며 생각했다.
어찌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미카엘이 그녀가 억지로 머리끝까지 올린 이불을 확 벗겨 내었을 때도 저항 한번 하지 못했다.
의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레티시아의 열을 측정하고 각 증상을 살폈다.
“심각하군요.”
“뭐가요……?”
“이건 습지병입니다.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뼈까지 병이 들어 평생을 앓을 수도 있으니, 제가 내일 보내 드릴 약을 석 달간 꼬박꼬박 드십시오.”
의사의 목소리에선 다소 경멸하는 투가 느껴졌지만, 레티시아는 그런 사소한 사실에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습지병은 제국의 풍토병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그 발병자가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습지병의 주된 원인은 바로 영양실조였으니까.
미카엘 역시 그 사실을 놓치지 않은 듯했다.
“주방.”
“아시잖아요, 전하. 제가 주방 하녀들에게 괴롭힘당할 성격인가요…….”
“접시.”
“굶은 적도 없어요. 잘 먹고 잘 자는…데…….”
레티시아는 정말로 억울해졌다. 자신이 영양실조일 리가 없었다. 만약 황태자 궁의 하녀가 영양실조에 걸린다면, 제국은 이미 식량난으로 멸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의사는 미카엘과 레티시아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대략 눈치챈 듯했다.
“습지병은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어떤 연유로든 약해진 몸에 습기가 침투해서 걸리는 병입니다.”
“요새 조금 무리해서 일하긴 했어요.”
“조금 무리해서 걸리는 병은 아니지마는…….”
의사가 코웃음을 쳤다.
“여튼 석 달간 푹 쉬고 약도 꼬박 챙겨 먹는다면 뒤탈은 없을 겁니다.”
쉴 수가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의사의 역할은 끝났다. 선택은 레티시아의 몫이었고.
의사는 미카엘을 향해 경례한 후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의사의 진료가 끝나자마자 이불을 레티시아의 목까지 덮고 가지런히 펴 주었다.
레티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 절 보내 주실 생각이 없으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