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미카엘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초록빛과 맑은 푸른빛을 오가는 눈동자가 즐거운 기색을 띠었다.
“알겠어요.”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이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꺾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디 미카엘의 고집을 꺾을 시도나 할 수 있는 위치던가.
아무리 레티시아가 생각하기에 지금 미카엘의 행동이 바보처럼 느껴진다고 한들 계속해서 거부할 순 없었다.
게다가…….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려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동시에 미카엘이 그녀의 이마를 훔치던 손수건을 부드럽게 빼내었다. 레티시아는 이미 비어 버린 컵에 미카엘이 물을 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한 가지로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전신을 타고 회오리쳤다.
만약 미카엘의 고집을 꺾고 좁은 사용인 숙소로 돌아갔다면, 지금쯤 딱딱한 침대에 누워 곰팡이 핀 천장만 열에 들떠 가물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레티시아는 6여년 만에 느껴 보는 푹신한 침대에 폭 파묻혀 황태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이젠 감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는 미카엘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7년 전, 레티시아는 어둠 속에서 미카엘을 만났다. 그때도 미카엘은 이전까지 레티시아가 받은 적 없는 배려와 친절을 선사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도.
레티시아는 지금, 그간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순수한 보살핌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고 있었다.
물론, 호르헤 경이 실각하기 전이나 레티시아가 잠시간 미카엘의 비서였던 적엔 애슐리가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그건 레티시아를 돌보는 게 애슐리의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후작에 의해 레티시아가 평범한 하녀로 돌아가게 된 이후에 상황은 당연히 달라졌다. 애슐리는 여전히 그녀를 어려워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 보살펴 주지 않았다.
레티시아 역시 이전처럼의 보살핌을 바라지 않았다. 만약 애슐리가 똑같이 행동하려고 했다면 화를 내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레티시아의 식은땀을 닦아 주는 미카엘의 손길이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받아 보는 순수한 보살핌이었다.
불현듯 깨달음이 레티시아를 덮쳤다.
‘여기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건… 나야.’
동시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막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미카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레티시아 자신의 만족을 위해.
레티시아는 괜스레 눈가를 문질렀다. 자괴감이 파도처럼 훅 밀려 들어왔다. 그때, 미카엘이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나쁜 생각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진심으로 그녀를 염려하는 얼굴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약.”
약이 너무 늦게 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레티시아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평소엔 침착했지만, 간혹 이렇게 성급하게 굴 때가 있었다.
“곧 오겠죠. 전하의 주치의이니까, 실력도 보장되어 있을 테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푹 쉬면 낫는다잖아요.”
“눈송이.”
“네. 제가 너무 간단하게 말하긴 했죠……. 이건 복잡한 문제인 것도 맞고요. 하지만 전하께서도 너무 비관적이시라고요!”
레티시아는 숨을 쌕쌕 내쉬며 말했다. 미카엘은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렇게 아픈데도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때, 시종이 주치의가 제조한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잘 교육받은 시종은 최대한 아무것도 못 본 체하려 노력했지만, 자꾸만 레티시아에게로 가는 눈길을 숨길 순 없었다.
미카엘은 시종에게서 약병과 티스푼을 낚아채듯 건네받고는 침실에서 완전히 밀어 냈다.
“…….”
그렇지 않아도 열에 달아올라 있던 레티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내일이면 모두가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알겠구나.’
그동안 다이애나에게 자신이 미카엘의 애인이 아니라고 한 말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미카엘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요. 뭐라고 하셨죠?”
“아.”
미카엘은 약병을 든 채 천천히 말을 되풀이했다. 레티시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파서 그런지 미카엘의 말이 평소와 달리 바로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카엘이 조금 답답하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아……?”
그때, 작은 티스푼이 레티시아의 살짝 벌린 입으로 쏙 들어왔다. 쓰고 신 약물이 순식간에 레티시아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미카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레티시아가 약을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하, 지금 이게 무슨… 웁!”
레티시아의 말은 미카엘이 다시금 그녀에게 약을 떠먹이면서 끊겼다.
잠시 후, 약병이 텅 비자 미카엘은 귀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약병을 과일 껍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레기통에 떨어트렸다.
“전하…….”
레티시아는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저는 애가 아니라고요. 혼자서 먹을 수 있었어요.”
오히려 레티시아보다 네 살이나 어린 미카엘이 애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투덜거림은 전혀 귀에 담지 않은 듯 커튼을 치고 방 안의 조명을 모두 껐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 미카엘의 간호에 황당하다 못해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미카엘은 더는 예전의 서투른 소년이 아니었다. 분명 예나 지금이나 미카엘은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지 결코 주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왔는지 의아했지만, 레티시아의 의구심은 피로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졸려요, 전하.”
레티시아는 더는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감기는 눈꺼풀 너머로 자신을 향해 배시시 미소 짓는 미카엘을 본 것 같기도 했다.
* * *
다이애나 그레이엄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수수한 드레스에 화장기 없는 얼굴, 이리저리 뻗치는 머리카락을 간신히 정리한 수준의 머릿결은 어딜 보나 외출을 위한 치장은 아니었다.
시녀가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다이애나 님, 정말 이대로 가셔도 되겠어요? 머리도 덜 말았고, 목걸이 하나 안 하셨는데…….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함에서 목걸이와 귀고리 정도만 골라 보시는 건 어떨까요?”
“됐어.”
다이애나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가 후회했다. 자신의 유일한 시녀는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았다.
좋은 군주는 유능한 부하를 아껴야 한다는 게 장차 후작가를 물려받을 오빠의 입버릇이었다.
물론 다이애나는 군주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되지 못할 운명이었지만, 이상을 따라서 나쁠 건 없는 법이다.
“오늘은 문병을 가는 거야. 그러니 화려하게 꾸미는 게 오히려 실례가 되겠지.”
“문병이요?”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편찮으신 건가요?”
“아니.”
“그럼 누군가요?”
“…….”
다이애나는 잠시 침묵했다. 아픈 건 그녀의 비밀 스승이자 황태자 궁의 일개 하녀인 레티시아 우즈였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애인이기도 하지…….’
하지만 다이애나는 그중 무엇도 시녀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는 사람.”
시녀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친구분이시군요? 어떤 가문의 영애이시려나.”
“그런 거 아니야.”
“다이애나 님도 참, 이럴 때 보면 수줍으시다니까.”
다이애나는 시녀의 놀림에 반응하는 대신 어제 황태자 궁에 돌았던 기묘한 기류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레티시아 우즈는 그날따라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뒤늦게 헐레벌떡 나타난 하녀가, 레티시아가 아프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인즉슨, 다이애나가 황태자 궁에 들른 유일한 이유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다이애나는 정작 그녀 자신의 약혼자인 미카엘 황태자와는 레티시아 우즈나 아버지, 그레이엄 후작의 주선 없이는 잠시도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어제, 다이애나는 사용인들로 복작거려도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황태자 궁에서 시간만 죽이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간 레티시아는 조금 피곤한 정도로는 결코 그녀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므로 크게 아픈 게 분명했다.
다이애나가 순수한 의미의 문병을 결심하는 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다이애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해 왔다. 염려와 위로 역시 윗사람의 의무 중 하나였다.
“집사한테 말해서 아픈 사람이 잘 먹을 만한 보양식을 준비해 달라고 해 줘.”
“과일과 꽃이 아니라요?”
시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보양식은 비슷한 신분의 귀족 영애의 문병 선물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과일과 꽃이 나으려나.”
“당연하지요. 음식은 입에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영애분께서 조금 기분이 나쁠 수도 있으니까요.”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선한 과일과 꽃을 준비해 달라고 말하던 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시종이 방에 발을 들이지 않은 채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이애나 아가씨,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예. 최대한 빨리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이애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별것 아닌 일로 자신을 급하게 부를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후작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머리가 새빨갛게 변한 후작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
다이애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분노로 가득 찬 한숨을 토해 낼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전하께서…….”
그레이엄 후작의 입술이 흥분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그 마녀를 침실에 들였다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