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네……?”
“레티시아 우즈가 전하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했다. 아주 보란 듯이.”
그레이엄 후작이 딱딱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다이애나는 떨리는 다리를 제어할 수 없어 가까운 의자에 겨우 걸터앉았다.
“분명, 어제 아프다고…….”
“아픈 건 정말인 것 같지만, 그것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그레이엄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 마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
다이애나는 아버지가 레티시아 우즈에 대해 제법 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애나, 오늘 입궁은 하지 말거라.”
“아버지!”
그레이엄 후작이 혀를 잘게 찼다. 다이애나는 그 소리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연이어 핀잔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속없이 입궁했다간 네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느냐? 그리고 나는 또 어떻고?”
“이럴 때일수록 제가 가야죠.”
다이애나는 최대한 밝게 들리도록 애썼다.
“…….”
그레이엄 후작은 다이애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비슷한 눈길들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좋다. 한번 가 보거라. 그리고 지금 네 위치를 자각해.”
“네.”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 정신을 차릴 때가 왔지.”
“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레티시아 우즈에게 달려들지 말거라. 알겠지?”
다이애나는 자신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짤막하게 ‘네.’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은 눈길을 내려 서류를 훑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가 지금 한가히 잡무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나가라는 무언의 제스처가 분명했다.
다이애나는 천천히 집무실을 나섰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레티시아 우즈의 병문안을 가겠다는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선물은 빼야겠지만.
얼마간 후, 황태자 궁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물론,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후작 영애인 그녀가 눈치챌 정도로 수군거리거나 박대할 사용인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노기를 사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몸을 사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문제는 다이애나 본인에게 이 드넓은 황태자 궁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왜일까.’
다이애나는 그 이유를 자문해 보았다. 원래부터 황태자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점이야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황태자와 레티시아 우즈의 관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배신감은 아니었다.
다이애나는 성마르게 머리카락을 꼬았다. 여태까지 자신은 황태자 궁에 오는 게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면 반대였지.
평소라면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황태자 궁의 하녀에게서 별 괴상한 대화법을 배워야 한다. 실컷 배워 놨더니, 그 목적이었던 황태자는 일부러 그녀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레티시아 우즈의 귀띔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어느 순간부터 레티시아 우즈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성실한 애야. 보기보다 똑똑하고. 날 미워할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고.’
다이애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자신이 레티시아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를 속으로 나열했다.
그동안 레티시아 우즈 덕분에 자신은 억지로 황태자 궁에 떠밀리는 대신 제 발로 기꺼이 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레티시아 우즈는 이제 그녀의 스승이라기보단 그레이엄 후작의 묘사처럼 일개 하녀 주제에 겁도 없이 황태자의 곁을 차지한 경쟁자였다.
자신이 밀어 내야 할.
다이애나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도 안내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행선지는 항상 서재였기 때문에 가는 길은 익숙했다. 당연히 레티시아 대신 온 하녀가 청소를 하고 있을 테니, 그녀에게 레티시아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잠시 후 서재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발칵 문을 열어젖혔다.
“아가씨!”
바닥에 주저앉아 건성으로 걸레질을 하던 하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 무슨 일로…….”
하녀는 말꼬리를 흐렸는데, 그 의미를 모를 정도로 다이애나는 둔하지 않았다.
“레티시아 우즈는 어디에 있지?”
“예?”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레티시아 우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모, 모릅니다.”
“내가 감히 갈 수도 없는 곳에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다이애나는 벌벌 떠는 하녀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모르지는 않는다는 거구나, 그러면.”
하녀는 무엇 하나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다이애나는 어릴 적부터 꽉 닫힌 입을 여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은화를 한 닢 꺼내 하녀의 치마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하녀의 눈이 흔들리더니 말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방에 있어요. 나오기 전에 확인했거든요. 아가씨께서 염려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에요. 그리고…….”
다이애나는 은화를 한 닢 더 꺼냈다. 하녀는 새로운 은화가 주머니에 들어가자마자 말을 이었다.
“많이 아픈 것 같았어요. 꾀병 같지는 않았어요. 그게 궁금하셨다면요.”
“고맙구나.”
다이애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아프다면 문병을 안 가 볼 수가 없겠지. 방까지 안내해 주려무나.”
“아가씨, 그건……!”
다이애나는 하녀를 쏘아보았다.
“감히 내게 말대답을 해?”
하녀가 고개를 떨구는 동시에 승리감을 느낀 다이애나는 입꼬리를 보란 듯이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은화를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 * *
레티시아는 천장의 무늬를 처음부터 다시 세기 시작했다. 약 덕분에 열은 가라앉았지만,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반나절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어느 대상을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 대상을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먹는 것이라고.
레티시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미카엘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오히려 그를 곱씹게 되었으니까.
미카엘은 평소 레티시아가 그 자신을 살피는 모습을 그대로 거울에 반영한 것처럼 레티시아를 보살폈다. 레티시아가 목이 아파서 헛기침을 하면 바로 물을 건넸고, 시간이 될 때마다 약을 입에 밀어 넣었다.
겨우 열이 떨어져 침대에서 처음 일어나자 다리에 힘이 풀릴 경우를 대비한 듯 옆에서 허리를 붙잡고 이동을 도와주었다.
자괴감이 차올랐다.
자신은 비겁한 줄 알면서도 미카엘의 보살핌을 거부할 수 없었다. 미카엘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자신을 보내 주지 않았으리라.
‘어려서 그래, 어려서.’
미카엘은 아직 미성숙하다. 그의 친절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픈 레티시아를 방치하지 못하고 간병했을 뿐이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명은 그만하자.’
부질없는 궤변으로 그녀 자신을 속이기엔 너무 오랫동안 미카엘을 봐 왔지 않은가.
미카엘은 분명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들을 불러올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르겠다…….”
레티시아는 중얼거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미 상황은 끝났다.
미카엘이 보내 준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신의 동료들은 애써 모른 척을 해 주었다.
하지만 벽을 뚫고까지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무시할 정도로 레티시아는 뻔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황태자의 비공식적인 애인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 사실은 단 한 가지 결론만을 의미했다.
‘떠나야 해.’
레티시아는 지난 6년 동안 황태자 궁을 떠나, 자신만의 작은 가게를 차리겠다는 소망을 가슴 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망은 소망일 뿐.
미카엘이 전생에 읽은 소설과 달리 성군으로 성장해 제위에 앉기 전까지는 그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티시아 자신 때문에 미카엘의 언어 발달이 늦어졌다는 심증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레티시아는 인격을 부정당하면서까지 미카엘의 곁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제 그 누가 레티시아를 이전과 같은 동료로, 친구로 생각할까?
더군다나 미카엘에게는 약혼녀가 있다. 그레이엄 후작이 미카엘의 후견인이 된 것 자체가 전생에 읽은 소설과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결혼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레티시아가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에 처한 것만은 분명했다.
‘약속한 교육만 끝나면, 바로 떠나야겠어.’
그레이엄 후작은 레티시아가 다이애나를 성실하게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약속한 돈을 모두 그녀 명의의 제국 금고에 입금해 주었다.
다이애나 그레이엄의 교육이 끝난다는 건 미카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더는 레티시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했기에 떠나기에 적기였다.
문제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이애나가 결코 그녀에게서 더 이상의 수업을 받으려 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다이애나와의 대화를 계속 거부해 왔던 미카엘이 과연 협조하려 할까?
“모르겠어!”
레티시아는 반쯤 비명을 지르듯 한탄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천천히 문이 열린 건.
익숙한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귀를 때렸다.
“뭘 모르겠다고?”
천천히 고개를 든 레티시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이애나 그레이엄이 싸늘한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이애나의 뒤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그림자의 기척 때문이었다.
레티시아의 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위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