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50)

44화

레티시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다이애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위기감은 그간의 과로와 병에 지친 몸을 깨웠다. 레티시아는 의문의 그림자보다 한발 빨리 문을 밀쳐 닫는 데 성공했다.

“레티시아 우즈, 이게 무슨…….”

“막아요!”

다행히 다이애나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녀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았다.

레티시아는 자꾸만 돌아가는 문고리를 간신히 걸어 잠갔다.

쾅!

굉음과 함께 문이 크게 흔들렸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부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이 대낮에……!’

레티시아는 곧 암살자가 밤보다 더 안전한 시간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낮의 사용인 숙소는 일반적으로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레티시아의 방은 다른 하녀들의 숙소와 제법 거리가 있는 외딴 위치였기에, 일하러 가지 않고 땡땡이를 치는 하녀가 있더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도와주러 오리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다.

반격은 당연히 논외였고.

레티시아가 가지고 있는 무기 비스름한 것이라고 해 봤자 하녀들이 쓰는 다용도 칼이 전부였다. 날이 제법 잘 들었긴 해도, 암살자의 검에 비하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답은 단 하나뿐.

이 방에서의 탈출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

다이애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응.”

레티시아는 방 한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다이애나가 쓸데없는 말을 얹는 대신, 레티시아가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따라온다는 점만큼은 다행이었다.

레티시아는 침대를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이 정도를 못 움직일 자신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도움이 필요했다.

“침대, 같이, 치워 줘요.”

다행히 다이애나는 레티시아의 헐떡거림만 듣고도 전심전력을 다해 침대를 같이 옮겨 주었다.

레티시아는 땀이 흥건한 손으로 치워진 침대 옆으로 드러난 벽면을 더듬거렸다.

‘…있어!’

울퉁불퉁한 벽면에 튀어나온 못이 하나 잡혔다. 레티시아는 그 못을 잡아당기면서 바로 옆 벽면을 손바닥으로 세게 밀었다.

“어……!”

다이애나가 작게 놀란 소리를 냈지만, 문을 쿵쾅거리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볼품없어 보이던 회벽에, 사람 한 명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통로가 드러나 있었다.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 통로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건 무려 4년여 전이었다.

미카엘이 사용인들 구역까지 내려와 돌아다니길래 이상하다 싶었더니, 외진 곳에 있어 그동안 누구도 쓰지 않던 침실에서 비밀 통로를 찾아낸 것이다.

미카엘이 하도 원하는 통에 여기로 방을 옮기긴 했지만, 그동안 이 비밀 통로를 쓸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엘이 당시 이 방의 문에 대해 무어라 말한 게 떠올랐다.

‘문도… 뭔가 처리가 되어 있다고 했나.’

분명 철저히 훈련받았을 암살자들이 단 몇 초 만에 문을 따지 못하고 부숴 버릴 기세로 문짝을 발로 차고 있는 모습은 기이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레티시아는 성마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문이 아니었다.

‘대체, 이 통로는 어디로 통하는 거야!’

초조함 때문인지 예전엔 분명 기억하고 있었던 정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통로가 설령 미카엘의 침실로 통한다 한들 들어가야만 했다.

레티시아는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다이애나의 등을 떠밀었다.

“최대한 빨리 기어가요. 저들은 아마 이 통로도 알고 있을 테니까. 정확한 위치만 모를 뿐이지.”

“…응.”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낡은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는 와중에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통로로 들어갔다.

“우즈……?”

다이애나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가요, 계속.”

레티시아는 그동안 한 번도 이 통로를 확인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미카엘 역시 레티시아를 이 좁고 더러운 통로로 떠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은 당시 레티시아를 이 방으로 데리고 와서 비밀 통로를 보여 주기 전에 직접 통로에 들어가 보았고, 안전까지 모두 확인했다고 알려 주었다.

비록 4년 전이었지만, 레티시아는 당시의 미카엘이 이 통로를 제대로 확인했기에 운을 걸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는 빠르게 통로 입구 쪽을 매만졌다. 황태자 궁의 비밀 통로라면 대부분 갖추고 있는 장치를 찾기 위해서였다.

‘됐다.’

정해진 돌부리를 매만지자, 통로 입구는 완전히 봉해졌다. 만약 통로의 존재는 알지만 위치가 어딘지는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무것도 안 보여.”

꽤 먼 곳에서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를 닫았어요.”

“다행이네.”

레티시아는 속으로 다이애나가 한결 차분해진 점이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암살에 대응하는 교육을 받았던 것도.

소설과 달리 미카엘이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호르헤 경은 언제든 미카엘이나 레티시아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면… 감사하다고 해야겠어.’

호르헤 경은 열네 살짜리 소녀와 열 살짜리 소년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무력한 사람이 암살자에게서 달아나기에 가장 적합한 것들만을 미카엘과 레티시아에게 가르쳐 주었다.

암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춰야 하는 건 바로 침착함이었다.

암살자들은 목표 대상이 당황했을 때를 노리기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려 크게 당황한 사람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살아남을 기회를 코앞에 두고도 굳어 버린다.

만약 다이애나가 그런 타입일 경우,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혼자 도망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타깃은 황태자의 입이자 이제는 공공연한 애인으로 굳어진 자신이지 아직 미카엘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 보지 못한 다이애나가 아닐 테니까.

레티시아는 부지런히 다이애나를 쫓아 칠흑 같은 터널을 기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건 물론, 햇빛이 바닥과 천장에서 조금씩 새어 들어와 한결 이동이 편해졌다.

터널 넓이도 두 배가량 넓어져 이젠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안도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습격자가 입구를 찾아내지 못한 듯했다.

겁에 질린 숨소리를 내쉬며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기어가던 다이애나도 가벼운 질문을 던질 정도로 긴장이 풀린 듯했다.

“이전에도 여기에 들어와 본 적 있어?”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럼 어디로 통하는지도 모르겠구나.”

“네. 하지만 그건 저자도 모르겠죠.”

처음엔 계속해서 무언가를 물어 오는 다이애나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레티시아는 자신이 다이애나의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점차 극도의 긴장과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

갑자기, 앞서가던 다이애나가 비명을 질렀다. 레티시아는 황급히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죽은 뱀이 있어. 살아 있는 줄 알아서, 놀랐을 뿐이야.”

레티시아의 등에 소름이 쭈뼛 뻗었다. 그녀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최대한 노력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으응.”

“가만히 계세요. 제가 갈게요.”

다이애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벽에 붙었다. 레티시아는 빠르게 다이애나를 향해 다가갔다.

뱀들은 자연 환경과는 거리가 먼 데다 먹잇감이 별로 없는 비밀 통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 뱀이 있다는 건, 죽었건 살았건 누군가가 고의로 풀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뒤로 조금 빠져 주세요. 제가 볼…….”

레티시아는 입을 막았다. 독사 특유의 뾰족한 머리를 본 순간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호르헤 경의 교육에는 암살에 사용되는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을 익히는 것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레티시아는 바로 종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표족살모사였다.

표족살모사는 미동 없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죽은 뱀 특유의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시체라면 벌레 역시 꼬여야 할 텐데 씻어서 바싹 말린 것처럼 깨끗했다.

“뱀을 풀었네요.”

“…….”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푼 뱀은 아니니까. 아주 예전에 푼 것 같아요.”

“예전에?”

표족살모사는 눈이 나빠 움직임에 반응한다. 만약 아직 기력이 남아 있었다면 진작 다이애나를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패가 안 된 걸 보니 죽지는 않았어.’

왜인지 죽음만을 기다리는 아사 직전의 살모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약 뒤에서 이동을 재촉하는 다이애나가 없었다면 레티시아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슴푸레한 빛무리가 저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뒤에서 다이애나의 탄성이 들려왔다.

“출구……!”

“쉿.”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려 다이애나를 조용히 시켰다. 암살자가 아직 밖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입구 근처까지 나아갔을 때에도 암살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

레티시아는 통로에서 몸을 빠르게 빼냈다. 통로는 두꺼운 자재로 뒤덮여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올 정도의 공간이 존재했다.

신선한 공기를 폐에 담뿍 담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나오세요.”

곧이어 다이애나가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여긴 어디지?”

“모르겠어요.”

그들은 대체 성의 어느 부분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낡은 창고에 있었다.

둘의 시선이 창고만큼이나 낡고 더러워 보이는 문고리로 향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지 제법 오래 지난 듯한 문고리엔 희뿌연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행이야.’

푸르른 덤불이 들어오는 동시에 안도감이 벅차올랐다. 레티시아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바로 괴팍한 정원사 혼자 쓰는 낡은 오두막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부들이 말과 마차를 대기시켜 놓는 공간이 있었다.

보통 때라면 귀족 아가씨가 발을 들여서도 안 되는 장소였지만, 상황이 위급한 만큼 누구도 그걸 탓하지 않을 것이다.

“다이애나 아가씨.”

“으응?”

“이제 다 끝났어요. 빨리 마차를 타고… 댁으로 돌아가세요.”

“넌?”

“저는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죠.”

“위험하잖아!”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이 오만한 귀족 아가씨에게 일개 하녀 따위를 걱정하는 면모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다이애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널 쫓아왔어.”

“아가씨를 쫓아왔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내가 우리 가문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자살행위가 아닐까?”

“그건…….”

“입 다물어, 레티시아 우즈. 지금 너와 나, 중에 굳이 노려야 할 사람을 고르자면 바로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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