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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150)

45화

레티시아는 자신의 중요성을 다이애나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그 사실을 다이애나가 직접 제 입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왜, 내가 널 인정해서 놀랐어?”

“…….”

“어쨌든, 네가 돌아가게 내버려 둘 순 없어. 저들만 좋을 일이니까.”

“아가씨…….”

“이건 명령이다, 레티시아 우즈. 우리 가문의 마차를 타고, 그레이엄가의 보호를 받아.”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이애나 그레이엄은 자신이 여태까지 생각하던 것보단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진실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게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

“저는 황실의 하녀입니다. 후작가의 영애이시더라도 제게 명령을 내리실 순 없어요. 그리고…….”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후작저로 함께 돌아가면 아가씨도 위험해지실 거예요.”

“왜?”

“그들이 절 노렸잖아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계속 쫓아오지 않겠어요? 그들은 아가씨를 따라 제 방으로 왔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다이애나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왜 계속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거지? 문을 흔들던 건 분명 한 명뿐이었어. 당연히 그자는 성에서 너를 찾아다니고 있겠지. 내가 떠난 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거고.”

“…….”

“돌아가면, 넌 죽어. 그런데도 굳이 성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구나.”

레티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솔직히, 그동안 자신이 다이애나를 얕보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이애나는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판단력을 보여 주었다.

“이유를 말씀드리면 절 보내 주시겠어요?”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둘러말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빨리 다이애나를 떼어 내고 가 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전하께서 위험해요.”

다이애나의 반응은 이번에도 레티시아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너도 참,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니?”

“…네?”

“저들은 전하를 노리는 게 아니야. 절대로.”

“…….”

“전하를 노린다면 지금보다 더 으슥한 시간에 찾아왔겠지. 이렇게 전하의 곁에 사람이 많은 시간대가 아니라.”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 네가 알아들을까? 레티시아 우즈, 전하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이 제국에 아무도 없어.”

“다이애나 아가씨!”

“전하의 위치가 그 정도라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아?”

“…아가씨는 모르세요.”

레티시아는 다이애나가 모르는, 그리고 다이애나에게 알려 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알았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미래 황제가 되어 자리를 공고히 다진 건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이미 미카엘은 비밀 통로들을 통해 성 안팎을 자유자재로 다녔고,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가져다주는 일거리 중 황태자의 업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단이나 평범한 귀족의 영지와 관련된 서류들을 놓치지 않았다.

미카엘은 분명 다이애나나, 다이애나의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두 손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황태자가 아니었다.

암살자가 레티시아를 찾아온 이유 역시 단순히 허수아비 황태자의 번역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네 연인을 비하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사과하마. 하지만 저들의 목표는 너야.”

“그건 모르는…….”

“하나 더 알려 줄까? 제국의 황태자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천한 평민 출신 하녀를 죽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쉬울까?”

“…….”

“레티시아 우즈, 넌 대체 뭘 원하는 거니?”

다이애나는 말문이 막혀 버린 레티시아를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다이애나가 오늘 자신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면모들을 보여 주었다고 해도 결국엔 그레이엄 후작의 딸.

미카엘에 대해 다이애나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알려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대신, 레티시아는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녔던 물건을 꺼내기 위해 품속에 손을 넣었다. 오랜 노동으로 무뎌진 손끝에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단단히 싸맨 금속제 물건이 닿았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다이애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제가 잘못된다면… 아가씨께서 가지세요.”

다이애나는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손수건을 풀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죽는다면, 이걸 빼앗기겠지. 그보다야… 다이애나 아가씨가 가지는 게 나아.’

암살자는 레티시아를 죽인 후, 그녀가 가지고 있을 서류 등을 찾기 위해 몸을 수색할 것이다. 그의 손에 넘어가 어느 장물상에게 팔릴 걸 생각하니 차라리 다이애나에게 선물로 주는 게 나았다.

“…너…….”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다이애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레티시아가 7년 전, 미카엘에게서 받은 브로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가씨?”

“너, 이게 뭔지도 몰랐구나?”

레티시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무리 다이애나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대놓고 무시당하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황족의 징표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요. 제가 이걸 들고 황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도요.”

“누가 그랬지? 전하께서?”

“…….”

“아니구나. 그럼 누구지? 설마 아버지께서? 아니다, 내게 말씀을 안 하셨을 리가 없지.”

“호르헤 경께 들었어요.”

“그래? 그자가 그렇게 말하던?”

다이애나가 신경질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다가 잘려 나간 배신자라고 들었는데, 멍청하기까지 할 줄이야! 이걸 몰라보다니.”

“…호르헤 경은 아가씨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이 불쌍한… 것아.”

다이애나는 레티시아가 측은하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눈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전하께서 네게 이걸 주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는 하니?”

“……?”

“이건, 황가의 보물이야.”

다이애나는 이를 악물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 당연히 네가 알 리가 없겠지……. 나도 아주 오래된 기록에서, 우연히 본 거니까.”

“황가의 보물이라고 쳐요. 뭐가 달라지죠?”

다이애나가 레티시아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레티시아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다이애나가 한발 더 빨랐다.

그녀는 벽에 달린 귀가 듣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사람처럼 레티시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여기엔… 고대 마법이 걸려 있거든.”

“……!”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법이라니? 무슨 어린애들 동화책에나 나올 말을 이 콧대 높은 후작 영애가 지껄이고 있다는 말인가.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도 마법이나, 마법사에 관련된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괜한 조롱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레티시아는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다이애나는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브로치를 들어 올렸다. 햇빛을 받은 브로치가 빛을 머금은 것처럼 빛났다.

레티시아가 가끔 바라보며 위안으로 삼던 브로치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역시 기록에 적힌 그대로구나. 이것이 빛을 모은 걸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네?”

“이렇게 빛을 온종일 저장했을 때, 정확한 조작법만 안다면 훌륭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레티시아는 빛을 머금은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만 하는 어린 날, 번개를 맞았던 자신이 떠올랐다.

‘절대 우연이 아니었어.’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만약 이 브로치가, 당시 레티시아를 강타했던 번개를 품고 있다면 그 위력은…….

“어떻게 조작을…….”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다이애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지. 남에게 막 줄 물건은 아니라는 거.”

“…….”

“그러니, 부디 암살자에게 이걸 빼앗기지 않게 무사하렴. 황가의 보물이 정체불명의 인간에게 넘어가는 꼴은 볼 수가 없으니까.”

다이애나는 브로치를 레티시아의 손에 단단히 쥐여 주었다.

“…다이애나 아가씨.”

“가라. 전하께 이런 걸 받았으면… 받은 값을 해야지.”

레티시아는 속으로 자신은 이미 그 값을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릴.”

다이애나는 씁쓸하게 웃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그건 레티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티시아는 다이애나가 돌아서자마자 곧바로 정문 쪽으로 달려 나갔으니까.

천만다행스럽게도 해의 위치를 보니 지금은 하루 중 미카엘의 스케줄을 특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 중 하나였다.

검술 훈련 시간.

만약 지금 한창 훈련을 받고 있어야 할 연무장에 미카엘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암살자에게 당했다는 뜻이리라.

빠르게 달려가는 레티시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지금은 겨우 암살자 한 명이 찾아왔을 뿐이다.

쉽게 문을 따지 못하고 당황한 걸 보면 미리 사전 탐색을 하지도 않았고, 황궁의 비밀 통로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마치, 레티시아에게 이제 본격적인 위협이 시작되니 겨우 이 정도에 당황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려고 온 것처럼.

레티시아는 속으로 헛된 생각을 날려 버렸다. 어떤 암살자가 목숨을 걸고 경고를 위해 황궁에 침입한다는 말인가?

레티시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황태자 전용 연무장 문턱까지 도착했다.

챙!

칼날과 칼날이 맞부딪쳐 내는 금속성 소리가 귓가에 유난히 아프게 박혔다.

‘역시, 수련 중이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무장에 발을 들이려는 찰나,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레티시아는 회벽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늦었어……!’

저 멀리서 검은 두건을 깊게 눌러쓴 암살자와 미카엘이 호각으로 다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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