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도와주세요!”
레티시아의 입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피가 식었다.
‘모두 처리된 거야.’
레티시아는 쿵쾅쿵쾅 뛰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머리를 차분히 굴리려 애썼다.
검술에 항상 두각을 보여 왔던 미카엘이 당장 위기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히 도와주겠다고 달려갔다가 인질이 되어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야 해.’
레티시아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황급히 뒤로 물러서다가, 어둑한 벽면 그림자에 고인 핏물을 밟고 반쯤 미끄러졌다.
“허윽!”
본능적으로 입을 막았건만, 회랑엔 나지막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는 숨을 집어삼켰다. 자신의 비명이 아니었다.
곧 레티시아는 벽면 그림자 속에 기대앉은 남자를 발견했다. 흥건한 피는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미카엘의 검술 교사였다.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남자의 입에서 힘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도와, 줘…….”
다행히 호르헤 경은 그들에게 지혈법을 가르쳐 주었다. 레티시아는 그동안 왠지 모를 불안감에 수십 번도 넘게 연습했다.
노력이 헛되진 않았던 모양인지, 남자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아주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매 사이로 끝을 맺지 못하는 물음이 새어 나왔다.
“전하는…….”
“아직 대치하고 계세요.”
“내가, 가야…….”
“제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레티시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시라도 빨리 미카엘을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야 했다. 이미 이자를 지혈하는 데 쓴 시간도 아까웠다.
남자가 고개를 젓더니 신음과 뒤섞인 말을 토해 냈다.
“늦어.”
레티시아는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뒤로 돌아섰다. 말다툼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치맛자락을 남자가 힘없이 붙들었다.
“전하의 검… 진검이 아니야.”
“……!”
소름이 레티시아의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이자의 말이 맞아.’
미카엘은 검술 수련을 받을 때 진검과 훈련용 검을 섞어 가며 썼다. 하필 훈련용 검을 사용하고 있을 때 암살자가 침입했다면 미카엘은 상대보다 훨씬 못한 검으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레티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이 남자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도와줄 사람을 찾고, 그자를 데려오는 동안 미카엘이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었다.
지금은 호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잠시라도 틈을 보이는 찰나 암살자의 진검이 그의 목숨을 앗아 가리라.
“진검… 진검을 드려야…….”
남자는 바닥을 힘없이 더듬었다. 레티시아의 시선이 그를 따라 바닥에 꽂혔다.
‘아…….’
레티시아는 핏물에 잠긴 검을 집어 들었다. 질척이는 감촉과 훅 끼쳐 오는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티시아는 온몸에 핏물이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부여잡은 채 연무장의 상황을 살폈다.
‘……!’
온몸의 피가 바싹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미카엘이 암살자에게 밀리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여태까지 상대를 전혀 상처 입히지 못하게 고안된 훈련용 검으로 암살자의 진검과 대등하게 싸워 온 미카엘이 대단한 상황이었으니.
레티시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그녀는 이를 꽉 악물며 미카엘을 향해 달려갔다. 안전한 거리에서 검을 던지는 방법도 문득 떠올랐지만, 자신은 투포환 선수도 아닐뿐더러 자칫하면 진검이 암살자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타다닥.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리던 연무장에 레티시아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서로 검을 맞댄 두 남자는 레티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의 얼굴이 즉시 일그러졌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거리가 한참 떨어진 레티시아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그가 뭐라고 말하든 전혀 듣지 않을 계획이었다.
“전하!”
레티시아는 암살자에게 신경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미카엘에게 진검을 건네는 것뿐.
자신이 높은 확률로 암살자에게 붙들리리라는 생각은 레티시아의 머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미카엘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날이 무딘 훈련용 검을 떨어트리고 피투성이 진검을 잡아챘다.
“레티…….”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티시아는 곧바로 암살자에게 머리채를 붙들렸다.
“아악!”
눈앞에서 별이 번쩍 빛나는 동시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신 차려!’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무력하게 끌려갈 수는 없다. 이자의 목적은 결국 미카엘이니, 자신은 인질의 가치가 있는 동안은 무사할 것이다.
암살자에게 머리채를 붙들리고 휘둘리는 그 몇 초의 순간, 레티시아는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하녀들이 요긴하게 쓰는 다용도 칼은 볼품없었지만 날은 잘 들어 있었다.
서걱.
암살자의 거친 손에 단단히 붙들린 새빨간 머리채가 통째로 잘려 나갔다.
“레티시아!”
미카엘의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이 들렸지만 레티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암살자가 당황했을 지금, 그에게 다시 붙잡히지 않게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레티시아는 반쯤 기다시피 뛰어 입구로 되돌아왔다. 다행히 암살자는 진검을 쥔 미카엘을 상대하느라 그녀를 쫓아오지 못했다.
둘의 발밑엔 레티시아의 붉은 머리칼이 핏물처럼 널브러져 있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에서 미카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 머리카락이다. 미카엘이 죽어 버린다면 그녀의 머리카락을 아쉬워할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
‘사람을, 사람을 불러와야 해.’
진검을 쥐었다곤 하나 미카엘은 상대보다 훨씬 지쳤을 터.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검술 교관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죠? 도와줄 만한 사람이……!”
검술 교관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레티시아의 손을 힘없이 붙잡았다. 레티시아는 말라 가는 피의 질척이는 감촉이 싫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됐어.”
“……?”
“전하의 실력을 아직도…….”
남자의 말은 의미를 제대로 갖춘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고통에 겨운 웅얼거림 속에 사그라들었다.
“이봐요!”
레티시아는 남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는데, 이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우기 위해서였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헛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어.’
목숨이 위중한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호르헤 경이 일전에 알려 준 기억이 났다.
레티시아는 남자의 뺨을 찰싹찰싹 쳤지만, 이미 반쯤 혼절한 그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만 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한 레티시아는 도와줄 사람을 찾으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연무장 안을 살폈다.
“……!”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시린 바람이 금안에 서린 눈물을 핥고 지나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은 채 속에서 애끓는 울음을 토해 내지 않으려 애썼다.
‘교관의 말이 맞았어.’
분명 자신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데까지 걸렸을 시간은 3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터.
상황이 반전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
미카엘이, 바닥에 나뒹구는 암살자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 * *
평범한 아이들이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배우며 자라날 때, 그레이엄 후작가의 아이들은 완벽한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웠다.
다이애나 그레이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먼지와 흙을 뒤집어쓴 몰골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황실 관료들에게 우아하게 이유를 둘러대고 집에 곧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아가씨, 옷이 완전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해 있던 집사는 다이애나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았다.
“주인님께선 지금 바쁘십니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다이애나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비록 내가 모자란 딸자식이라곤 하나 아버지께선 나를 사랑하신다. 설마 습격을 당했다는데도 외면하실까? 안내해라.”
“습격… 말씀이십니까?”
“네게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
집사는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엔 다이애나를 후작에게로 안내해 주었다.
후작은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다이애나가 들어오자 짜증스러운 신음을 내며 기지개를 켰다.
“그 마녀에게 당해서 내게 쪼르르 달려온 게냐?”
“…….”
다이애나는 침묵했다. 사실, 그녀가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오늘 습격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였다.
“왜 말이 없지? 자세히 보니 꼴이 말이 아니구나. 도랑에라도 굴렀느냐?”
“…습격을 받았어요.”
“습격?”
후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서?”
“레티시아 우즈의 방에서요.”
“……!”
“오늘, 병문안을 갔었거든요.”
“쓸데없는 짓을…….”
“말해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암살자를 보내셨나요? 레티시아 우즈를 죽이려고?”
“다이애나 그레이엄!”
다이애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진노하는 순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워하고 꺼려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레이엄 후작은 이 거대한 후작령 전체를 호령했으며 구성원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었다.
비록 나이를 먹으며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곤 하지만 뼈에 박힌 인식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지금만큼은 물러날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히는, 지금 물러난다면 평생을 의심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엄습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노한 시선에도 기죽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대답해 주세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