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50)

47화

“다이애나, 이것아. 생각해 보거라. 내가 왜 그것을 죽이겠느냐? 아직 그것이 네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제가 배울 건 다 배웠으니까요.”

다이애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전하께서 절 거부하시는 게 문제지, 더 이상 레티시아 우즈에게서 배울 점은 없어요. 아버지께서도 그건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내가 암살자를 보냈다? 네가 뻔히 황태자 궁에 가 있을 때? 차라리 내가 노예의 자식이라고 하거라!”

“하지만 제가 레티시아 우즈의 병문안을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겠죠. 아버지는 절 잘 모르시니까요.”

다이애나는 후작이 고함을 버럭 친 뒤에야 자신이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다이애나, 근신이다! 내 허락을 받기 전까진 네 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라.”

고함을 듣고 달려온 시종들이 다이애나를 끌어냈다. 뒤늦게 달려온 다이애나의 시녀가 울상을 지으며 그녀를 원망했다.

“아가씨, 왜 그러셨어요…….”

“해야만 했어.”

다이애나의 눈에 안도감의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다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확인해야만 했어…….”

“뭘요?”

이번엔 다이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알려 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조금 전 아버지의 반응을 찬찬히 떠올렸다.

‘말은 중요하지 않아.’

누구든 그레이엄 후작가의 일원이라면 말과 표정은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었다. 가주이자 그들 남매의 아버지인 그레이엄 후작이라면 이미 경지에 올라 있으리라.

다이애나가 관찰한 건 바로 그레이엄 후작의 행동이었다.

만약 조금만 덜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후작은 다이애나를 내보낸 다음에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 궁에 암살자가 들어와서, 레티시아 우즈와 다이애나를 공격했다는 건 조금이라도 빨리 대응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 탓에 후작은 다이애나가 ‘습격’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황급히 손을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다이애나는 오직 가주만이 알고 있는 저택의 장치와 연락 체계를 잘 몰랐지만 후작이 정보망으로 연락을 보내고,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암살자를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

장치는 노출시키면 노출시킬수록 보는 눈이 많아진다. 후작이 다급하지 않았다면 후계자도 아닌 자신 앞에서 그렇게 눈에 띄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아버지는 아니야.’

다이애나는 시녀와 하녀들을 물리고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늘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아니라면, 누구지?’

시기가 너무나 애매했다.

물론, 다이애나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와 약혼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언젠가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카엘 황태자는 데브란트 제국의 소녀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질 법한 미모와 매너를 갖춘 완벽한 황자님이었지만, 그 실체는 잔혹 동화 속 힘없는 공주님과 비슷했다.

진정한 제국의 후계자를 위해, 잠시 자리를 맡았을 뿐인 화살받이.

다이애나는 친아버지의 손에 의해 전 제국의 암투를 대신 막아 줄 화살받이 옆에 선 새로운 화살받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아무리 미카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 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다이애나는 오빠처럼 후계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언니처럼 자신을 갈고닦아 제국 기사단에 들어가 한 부대를 호령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건 정략 약혼, 더 나아가 정략결혼을 하는 것까지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단순한 역할마저 자신에게 버겁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었다.

황태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그만의 특이한 대화법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명을 실패한 것도 모자라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겉으로는 레티시아에게 티를 내려 하지 않았을 뿐, 다이애나는 겁에 질려 오직 그녀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다이애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적이 보낸 암살자의 칼날에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 아버지가 보냈다면 나야 살았겠지만… 전하의 정적이 보냈다면 날 죽일 기회를 놓치지 않았겠지.’

다이애나는 푹신한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포근한 천과 솜이 그녀의 얼굴을 마치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가족의 정처럼 감싸 안았다.

사실, 다이애나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겉으로는 받아 온 가르침에 걸맞게 의무를 충실히 행했지만, 가슴이나 머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 딱 한 번. 딱 한 번 있었지.’

다이애나는 레티시아와 체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의 레티시아는, 다이애나에게 이미 짜 맞춰진 체스 판에서 도망치라고 권했다.

어차피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퀸이 될 수 없는 폰이라면서.

다이애나는 그때 당시엔 체스 판에서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보다 더 나은 삶은 알지도 못했고, 야반도주한 귀족 영애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충분히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그 말을 듣고서 다이애나의 마음속, 아주 오랫동안 멈추어 있었던 톱니바퀴가 삐꺽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녀 자신이 황태자의 약혼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내가 대신 화살받이가 될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정작 목숨이 구해진 건, 자신 쪽이면서!

오늘, 다이애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암투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면 암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한 채 메말라 죽어 가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가만히만 있을 거야?’

마음속 작은 목소리가 다이애나를 채근했다. 다이애나는 숨을 들이켰다.

다이애나는 탁자 위 종을 울렸다. 시녀가 불안한 기색을 띠며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부탁할 게 있어.”

시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울먹이듯 말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주인님께선 아가씨가 이 방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갔다간 저희 손을 자르신다고 하셨어요…….”

“그런 게 아니야.”

다이애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편지를 한 통 보내고 싶을 뿐이야. 그 정도는 괜찮겠지?”

“황태자 궁은… 어려울 텐데요.”

그녀의 사정을 짐작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닌데?”

다이애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고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해 준 유일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텟사 슈베러 교수님께.

자신은 이 판에서 가장 먼저 탈출하는 폰이 될 것이다.

* * *

우습게도, 그간 레티시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착각도 유분수였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암살자가 지하 감옥에 갇히고, 검술 교관이 치료받고, 미카엘의 호위가 몇 배로 강화되는 동안 레티시아는 태연하게 일터로 돌아갔다.

그때, 동료들의 경악한 얼굴은 아마 그녀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레, 레티시아 님!’

‘여길 어떻게……. 일단, 여기 앉으세요.’

‘배가 고프세요? 뭘 어떻게 해 드릴까요?’

처음에, 레티시아는 동료들의 완전히 달라진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미카엘의 애인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이건 도를 지나쳤다.

어쨌든 신분은 겨우 하녀일 뿐이었다. 그동안 배웠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황족의 불장난 상대는 만에 하나 작위를 수여받기 전까지는 그저 본디 신분으로만 취급되었다.

실마리를 쥐여 준 건 가장 친했던 일라이자였다.

‘저희를 보고 싶으시다면, 이런 누추한 곳이 아니라 레, 레티시아 님의 방에서 뵈었으면 좋겠어요.’

바닥만을 바라본 채 빠르게 말을 걸어온 일라이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로 돌아섰다.

레티시아는 그제야 동료들이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낯설게 취급하는지 깨달았다.

암살자의 습격 이후, 레티시아의 방은 보안이 용이하다는 핑계로 예전 그 호화롭던 방으로 바뀌었다. 미카엘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호위 겸 몸종을 붙이려고 했지만 레티시아가 극구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황태자가 대놓고 특별 대우를 하는데, 이 궁의 누가 자신을 평범한 하녀로 보겠는가?

만약 그레이엄 후작이 이전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중간에서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암살 사건 이후, 황태자 궁에 단 한 번도 출입하지 않았다.

그와 관련되어 다이애나 그레이엄이 아버지를 추궁하다가 근신령을 받았다는 소문이 크게 돌았다.

모두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입을 조심하는 레티시아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였으니 공공연한 사실인 모양이었다.

‘결국, 난 여기 갇힌 거나 마찬가지네.’

레티시아가 이 방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떼면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를 몰래 따라왔다.

처음엔 레티시아는 새로운 암살자나, 암살자를 보낸 측이 붙인 감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미카엘의 입에서 그 자신의 사람이니, 잘 대해 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줬어야 했는데!’

스륵.

카펫이 살짝 흥분한 레티시아의 발길질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고 고개만 까닥였다.

잠시 후,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을 크기의 판자가 빼꼼히 열렸다. 그 사이에서 미카엘이 카펫을 젖히며 기어 나왔다.

레티시아는 전혀 인사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마디도 먼저 입에서 떼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미카엘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