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레티시아.”
“저 화 안 났어요. 그게 궁금하시다면요.”
“레티시아.”
“아, 제 안위를 위해서 여기에다가 가둬 두고 계신다는 것 정도는 알죠. 저도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전하보다 네 살이나 많답니다.”
미카엘이 어딘가 슬프고 지친 듯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레티시아는 뾰로통하게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쳤다.
암살자를 상대해야 했다는 짠한 걱정도 잠시, 지난 일주일 동안 둘은 다퉈도 너무 많이 다퉜었다. 그리고 승자는 항상 미카엘이었고.
그 결과, 그녀를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특별 대우 해서 궁의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킨 건 누가 보아도 반감금이 아닌가!
그때, 미카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창문.”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창문은 언제나 자유자재로 열 수 있다. 미카엘은 결코 그녀를 가둬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달.”
“지금 이러시는 것에, 다 이유가 있다고요?”
레티시아는 웃기 시작했다. 웃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어련하시겠어요. 제겐 언제나 설명도 제대로 해 주지 않으시지만…….”
“찔레꽃.”
“위험하다는 소리는 질릴 만큼 들었어요.”
레티시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무력하게만 있어야 했던 시간 동안 뾰족하게 자라난 말들이 쌓여 비수가 되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레티시아는 사자 모양 브로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애쓰다가, 괜스레 브로치를 건네주었을 당시의 미카엘이 생각나 이불 속에 처박는 행동을 반복했다.
언제나 그녀에게 약간의 위안과 따뜻한 추억을 선사하던 브로치가, 이제는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제가 왜 지금 위험한지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바로 전하께서 절 이렇게, 특별 대우를 하시니까 위험한 거라고요!”
“거울.”
“착각이라고요? 글쎄요, 정말 착각일까요? 그때 전하께서 저를 침실에…….”
레티시아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날 왜 미카엘이 자신을 그의 침실로 데려갔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짜증스럽고 미카엘에 대한 원망이 쌓였다 한들 고마운 감정을 모를 정도로 이성을 잃진 않았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제가… 이런 걸, 무엇보다도 못 참거든요. 더군다나 전하께선 자유자재로 다니시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니까요.”
레티시아는 비밀 통로에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피치 못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다니긴 했지만, 암살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공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시작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고.’
레티시아는 자신의 안이함을 인정했다. 미카엘이 언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후작이 그 모든 암살자들을 막아 주리라고 생각했다.
‘잠깐만.’
레티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박였다. 후작은 당연히 암살을 방지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그가 미카엘이 암살자의 습격을 받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건…….
‘설마, 후작이.’
레티시아의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미카엘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하늘.”
“밖으로… 가고 싶으세요? 하지만 밖은…….”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은 대낮이다. 그녀와 미카엘은 남들의 눈길을 피해 만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미카엘은 뭐 어떠냐고 말하듯 손을 내저었다.
레티시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자신은 그동안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고, 나가는 순간 미카엘이 붙인 그림자가 따라붙어 방에만 있었다. 기분 전환 삼아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당연히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 쏟아지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기에는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 왔다.
‘그리고 미카엘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나가자고 할 리가 없어.’
미카엘은 항상 레티시아를 제멋대로 휘둘렀지만, 적어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는 않았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미카엘의 뒤를 따랐다.
미카엘은 서재로 레티시아를 데려갔다.
레티시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적지였지만, 서재가 목적지라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가슴에 부글거리던 불쾌감은 한층 가라앉았다.
‘서류 작업이구나!’
그동안 레티시아는 하녀 업무에서만 격리된 게 아니었다. 비공식식적이긴 했으나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미카엘의 서류 처리도 그녀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일주일.
레티시아 우즈가 자신은 더 이상 황태자 궁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아직 그녀를 필요로 한다면…….
‘남을 거야?’
어딘가 비웃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 울렸다.
‘떠나겠다면서?’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찬물을 한 대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황태자 궁에서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게 겨우 얼마 전이다.
그런데 미카엘이 자신을 서재로 데려왔다고, 순식간에 마음이 풀려 버리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레티시아.”
“네, 전하, 듣고 있어요. 오늘은 어떤 종류의 서류들이죠?”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결정을 하기 위해선 미카엘이 지금,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아야만 했다.
‘이렇게 가둬지기만 할 거라면…….’
레티시아는, 머리로는 미카엘이 결코 나쁜 의도로 그녀를 고립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단지 암살자가 그녀를 가장 먼저 습격했다는 점에 놀라, 철저하게 보호하려고 했을 뿐이리라.
바로 그 점이,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만약 미카엘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녀는 차분히 미카엘이 자신에게 건네줄 서류를 기다렸다.
침묵.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미카엘은 입을 열지도 서류를 꺼내지도 않은 채 얼어붙은 사람처럼 차분하게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전하, 제게 시키실 일이 있어서 여기로 온 게 아니었어요?”
미카엘은 단단히 결심을 한 듯 얼굴을 굳혔다. 청록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했다.
그는 천천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레티시아가 자그마치 6년 만에 듣는 단어였다.
“비서.”
* * *
그레이엄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황태자의 방문을 기다렸다.
황제의 명에 따라 황태자의 후견인이 된 이후, 안정제를 자주 찾게 될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오늘보다 더 초조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일주일간 그가 꽉 붙들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손 틈에서 새어 나가는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송이가…….’
후작은 흰 가닥이 섞이기 시작하는 콧수염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기다, 따끔한 통증에 손을 멈추고 한숨을 토해 냈다.
‘방심했다.’
그 암살자를 보낸 게 누군지는 정확히 몰라도, 오히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에게 뜻밖의 기회를 쥐여 준 결과를 낳았다.
황태자는 황태자 궁의 보안을 핑계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최측근 몇을 빼놓고는 외부인의 방문을 막았으며, 그 외부인 중엔 그레이엄 후작 자신도 들어 있었다.
만약 다이애나가 아니었다면 그레이엄 후작은 코웃음 치며 황태자의 명을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친딸이자 황태자의 약혼녀가 습격을 받았는데, 감히 어떻게 황태자 궁의 보안이 무너졌다는 말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 그레이엄 후작은 뒷방 늙은이처럼 오도 가도 못 하고 오직 오늘 서면으로 약속된 황태자의 방문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내, 문이 노크 하나 없이 크게 젖혀졌다.
그레이엄 후작은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누추하신 곳에 전하께서 오시다니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엄 후작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 바보 황태자는 그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조롱하는 말 하나 할 수 없었다.
“제 출입을 계속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년식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다는 걸 아실 텐데요.”
달칵.
황태자는 대답 대신 가지고 온 서류철을 열었다. 후작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황태자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파혼을 시켜야 할 수도.’
그레이엄 후작은 황태자가 약혼을 달가워하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 깜찍한 소동은 단지 그 빨강 머리 애인을 지키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좋다. 어차피 다이애나는 때가 되면 황태자를 무사히 실각시키고 다시는 황좌 근처로 오지 못하게 만들 패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깝기는 했지만 방심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
후작의 눈에 검은 글자들이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레티시아 우즈의 천박한 필체였지만, 글자가 품은 내용들은 혐오감마저 날려 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전하, 이 무슨……!”
“끝.”
황태자의 차가운 한마디가 방 안을 지배했다.
후작은 레티시아 우즈와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만큼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이제, 끝이었다.
모든 면에서.
황태자가 가지고 온 서류는, 그레이엄 후작이 암살 시도의 배후임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후작은 분명히 존재할 빈틈을 살피고 또 살폈지만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반쯤 넋이 나간 그의 입에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전하, 이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동안 제가 얼마나 전하께 충성을 바쳐 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겠냐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카엘은 새로운 종이를 한 장 그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짤막한 문장이 몇 개 적혀 있었다.
한때 나를 위해 애써 준 자를 매정하게 내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 궁에 둘 수도 없겠지. 뭘 해야 하는지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레이엄 후작.
역시, 레티시아 우즈의 필체였으나 후작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 숱하게 본 그녀의 필체보다 조금 더 산만하고, 조금 더 자유분방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후작에게 거대한 압박감을 실었고, 그는 당장 황태자의 요구에 응해야 했기에 필체에 대한 사소한 의문 따위는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져 버렸다.
후작은 바싹 말라비틀어질 듯한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폐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물러나겠다고……. 전하께선 이제, 후견인이 필요 없으신 나이시라고.”
황태자가 미소 지었다.
자신의 첫 승리였다.
그리고 앞으로 그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