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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150)

49화

Chapter 6. 체스의 규칙

황태자의 유일한 비서, 레티시아 우즈의 하루 일과는 얼굴이 확 찌푸려질 정도로 쓰게 우려낸 차 한 잔으로 시작했다.

‘쓰다.’

레티시아는 등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빗어 내리며 어제 미처 보지 못한 황태자 궁의 다음 달 예산안을 훑었다.

미카엘의 정식 비서가 된 지 어언 2년.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되찾은 옛 지위와 너무 많은 업무에 당황했지만, 지금은 서류와 함께 자고 서류와 함께 일어날 정도로 익숙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암살 기도는 2년 전, 다이애나와 미카엘을 습격했던 바로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하단 말이지…….’

레티시아는 펜을 움직이다 말고 멍하니 손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신기하긴 했다.

사실, 레티시아는 그레이엄 후작이 암살자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미카엘의 후견인에서 물러난 이후 더 많은 자들이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간 어느 정도는 방어막이 되어 주었을 그레이엄 후작이 실각했는데도 암살 시도가 단 한 번도 없었다니.

‘역시, 배후는 그레이엄 후작이었을까? 아니야. 결국 후견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일을 꾸밀 필요가 전혀 없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2년 동안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무엇 하나 가능성 있어 보이는 답이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미카엘은 후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며, 암살 시도 역시 그 이후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무척 잘된 일이었다.

‘분명 일라이자가 남방향에 보수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레티시아는 다시 예산안을 응시했다. 미카엘은 그녀 이외의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황태자 궁의 크고 사소한 일들은 모두 레티시아의 손을 거쳐 갔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레티시아는 되레 일이 많은 편을 반겼다.

이 일들을 미카엘이, 그리고 자신이 당당하게 맡아서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행운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미카엘의 비서로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그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수그러들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서 업무를 시작한 초기엔 다들 황태자가 그녀를 더 가까이에 두려고 수작을 부렸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황태자의 애인이라는 소문을 극구 부정하는 데다, 미카엘이 그녀에게 작위를 수여해 정식 정부로 들여앉히려는 시도도 하지 않자 소문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만약 진짜 애인이라면 애가 들어설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다른 소식이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정말로 일을 열심히 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황태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측근으로 인정할 때까지.

그 결과,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침실에서 하루를 보낸 탓에 일어났던 대소동은 단지 그녀를 측근으로 삼기 위한 미카엘의 묘안이라고 여겨졌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일라이자가 문에 부착된 유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미카엘이 고집을 부려 문에 끼워 넣은 특수한 유리는 밖에선 안을 볼 수 없었지만, 안에선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처음엔 무척 괴상한 아이디어처럼 느껴졌으나 금세 아주 편리한 장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일라이자가 왜 왔지?’

본디 위치를 되찾은 레티시아를 옛 동료들이 무척 어려워한 탓에 여전히 그녀의 친구로 남은 건 일라이자뿐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일이 무척 바쁜지라 그들이 만나는 건 한 달에 한 번 정도였고, 이렇게 일라이자가 먼저 레티시아가 바쁜 때에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레티시아는 세 개나 되는 잠금 쇠를 빠르게 풀어냈다. 이것도 미카엘의 고집이었다.

다소 유별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2년 전에 일어난 암살 시도가 미카엘에게 제법 충격이었을 터이기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안녕, 일라이자. 아침부터 무슨 일…….”

레티시아의 말이 뚝, 끊어졌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라이자와 복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른 하녀들을 살펴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하녀들은 모두 그녀와 어떤 식으로든 연이 닿았던 이들이었다. 이렇게 레티시아를 찾아왔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발생해 해결을 부탁하려는 까닭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이마를 짚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최대한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다들 무슨 일이야?”

“레티시아, 정말 모르겠어?”

일라이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를 잠시 굴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응.”

“오늘 생일이시잖아요, 레티시아 님!”

결국 참지 못한 어느 하녀가 소리를 쳤다.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겨우 생일 축하를 위해 모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은 미카엘과 일라이자 정도였고, 원체 레티시아 자체가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니 어느덧 잊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레티시아는 여태까지 여럿이서 한꺼번에 선물을 주고 함께 생일 축하도 하는, 이른바 생일 파티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일라이자가 시켰겠지.’

레티시아는 나머지 하녀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생일을 축하할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어느덧 하녀들 사이에서 맏언니 격이 된 일라이자가, 다들 한 번씩 레티시아에게 신세를 졌으니 생일을 축하해야 한다고 끌고 온 게 틀림없었다.

레티시아는 일라이자를 향해 몸을 기울여 작게 물었다.

“설마 이 모두를… 내 생일 축하해 주려고 아침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일라이자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싫어?”

“아니, 싫진 않은데…….”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레티시아는 그동안 다른 하녀들의 조촐한 생일 파티에도 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바빴고, 하녀들이 일과를 끝낸 후 각자의 생일을 축하할 때면 항상 미카엘과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일라이자가 기가 막힌 듯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네가 뭘 어떻게 해? 우리가 하는 거지.”

“그런 거야?”

“그래. 이 나이만 잔뜩 먹었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야.”

일라이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화려한 손짓으로 레티시아의 옛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들어가자!”

“나, 방 안 치웠어!”

당황한 레티시아가 소리쳤지만 일라이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가 치워 줄게. 생일 선물로.”

곧 레티시아는 멀끔하게 변한 방에서 선물을 한 아름 안은 채 멍하니 서 있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 패딩턴이 생일날 이렇게 선물 상자들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몇 번 보긴 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순식간에 지나 버렸고, 레티시아는 아이들처럼 어른들에게 선물을 가득 받을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굳이 성심성의껏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옛 동료들에게 산통을 깨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하녀들 역시 하루의 일과가 있으니 오래 머물지 못할 터. 이런 호의를 거절한다면 모두 크게 마음이 상할 것이다.

“정말 고마워……. 이런 건,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생일인데 당연히 축하를 받아야지. 무려 황태자 전하의 비서 나리께서 그런 것도 몰라?”

“하지만 그동안, 한 번도 내 생일을 축하한 적이 없었잖아…….”

“그야 내가 네 생일을 재작년에야 알았으니까 그랬지. 그리고 작년까진 우리 귀하신 비서님이 얼굴 한번 못 볼 만큼 엄청나게 바빴고.”

“그… 그거야 그러네.”

레티시아는 결국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일라이자의 말이 맞았다.

뻔히 서로의 주머니 사정을 아는데 선물을 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우기 싫어 생일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라이자가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졸라 어쩔 수 없어 알려 주었다.

그 뒤, 2년간이긴 했지만 일라이자는 자신에게 꼬박꼬박 선물을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일 파티까지 잠시나마 열어 주다니.

레티시아는 절대 과거의 연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과도한 업무는 그녀에게서 미카엘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를 앗아 갔다.

그랬기에 한때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반갑게 느껴졌다.

곧 옛 동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감사 인사 말고는 딱히 할 얘기도 없을뿐더러, 옛 동료들의 사소한 이야기들 중에 그들을 도울 만한 방안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레티시아는 추가 보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실 공사 때문에 물이 새는 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공인을 징계해야 한다고 미카엘에게 말해야겠어.’

하지만 레티시아의 관찰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라이자가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양 가볍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레티시아.”

“응?”

“테렌스 경이랑 잘되어 가? 나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으려나?”

레티시아는 무심코 마시던 찻물에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일라이자가 한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소문 다 났어.”

“소문이라니…….”

피로가 확 몰려왔다. 그놈의 소문들! 레티시아는 소문에 진실이 상당수 섞여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 관련된 소문들은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다 틀려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테렌스 경은, 그저…….”

“친절할 뿐이라고?”

“아니.”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친절하다는 이유로 값나가는 선물을 뿌리고 다닌다면 이미 테렌스 경 가문의 금고가 바닥이 났을 것이다.

테렌스 던워디는 백작의 차남으로, 한때 미카엘의 검술 교관이었다. 2년 전, 레티시아가 암살자의 칼에 찔린 상처를 응급처치하여 구해 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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