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 뒤로 테렌스 경은 자신의 시종을 시켜 레티시아에게 매달 선물을 하나씩 전달했다.
부유한 백작가의 차남답게 제법 고가의 선물이었기에 레티시아는 그 선물들을 차곡차곡 금고에 저장해 두었다.
언젠가의 장사 밑천으로 쓸 생각이었다.
“내가 그분을 살린 은인이잖아? 당연히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보답을 하셔야지.”
일라이자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레티시아 우즈,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러니 매달 선물 세례를 받는 건 당연하다? 늙어 죽을 때까지 받겠어.”
“당연하지는 않지만, 그분은 귀족이잖아. 귀족들은 그렇게 자기들 체면을 세우는걸.”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슈베러 교수에게서 귀족의 많은 에티켓을 배웠다.
만약 그녀가 테렌스 경과 동등한 귀족이었다면, 이미 던워디 백작가는 아들의 목숨을 살린 보답으로 그녀의 가문에 금은보화를 보냈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머릿속에서 각자의 경우를 대충 계산했다. 하도 많은 숫자를 보다 보니 생긴 버릇이었다.
“그래, 이거네. 내게 본인의 목숨값을 한 번에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매달 잊지 않고 챙겨 주는 게 훨씬 비용이 적게 들어.”
물론, 레티시아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성에게 매달 선물을, 그것도 귀금속을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테렌스 경이 자신과 잘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적어도 얼굴은 보고 선물을 건네주어야 할 게 아닌가.
그날 이후 2년이 지났음에도 테렌스 경의 얼굴은 딱 한 번 감사 인사를 받은 뒤론 본 적도 없다.
단지 그의 시종을 통해 매달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는 이유로 정식 교제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라이자는 이런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레티시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하자, 되레 당황한 듯했다.
“너, 되게 장사치처럼 말한다?”
“말 안 했나? 나, 어릴 때부터 장사꾼이 되고 싶어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쨌든 그분 얘기는 이제 끝. 시간도 없잖아! 다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레티시아의 말이 틀리진 않았던 모양인지, 간만의 일탈을 즐기던 하녀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 정말로.”
레티시아는 옛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대다수의 하녀는 일라이자가 열심히 설득해서 데리고 온 듯했지만, 만약 그들이 레티시아에게 호의를 가지지 않았다면 바쁜 아침 시간에 짬을 내어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도와줄 게 있다면 언제든 부담 없이 말해 줘. 그게 내 일이기도 하니까.”
그게 레티시아가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잠시 후, 뜻밖의 방문객들이 모두 떠나자 방 안에 남은 건 선물들뿐이었다.
레티시아는 마음과 정성이 느껴지는 선물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다, 일라이자의 축하 카드가 꽂힌 과실주 병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아까 못 봤었는데.’
일라이자는 그녀에게 예전부터 아끼던 상아 빗을 선물해 주었다.
빗은 이미 많았지만 레티시아는 그 선물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눈이 붉어질 정도로 감동했다.
일라이자는 레티시아에게 그녀가 가진 물건 중 가장 귀한 물건을 선물해 주었다. 겨우 매년 돌아오는 생일일 뿐인데.
‘두 개나 준비했다니…….’
일라이자의 생일이 돌아오면 자신이 받은 것보다 훨씬 더 호화롭게 축하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레티시아는 카드를 읽기 시작했다.
일라이자는 글자를 읽을 줄만 알지 제대로 쓸 줄은 몰랐다. 아마 다른 하녀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으리라.
카드에는 가지런한 필체로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좋은 산딸기주야. 누구랑 마실지는 네게 맡길게.
어이가 없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론 레티시아는 오늘 생일 축하를 받은 걸 자축하기 위해 이 산딸기주를 마실 생각이었다.
좋은 산딸기주를 혼자 마시는 것도 아까운 일이니, 당연히 누군가와 나누어 마실 것이고.
하지만 상대방은 일라이자가 기대했을 법한 로맨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레티시아는 끙끙거리며 산딸기주 한 병과 서류 더미가 한가득 든 가방을 들고 미카엘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자그마치 6년 동안이나 그레이엄 후작에게 빼앗겼었던 황태자의 집무실은 이제 완전히 미카엘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미카엘이 좋아하는 신선한 과일들이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고, 창문은 활짝 열려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미카엘이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레티시아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레티시아.”
“저야 뭐… 힘들긴 하지만, 어디 전하만큼 힘들겠어요?”
미카엘은 살짝 웃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뒤적거렸다. 가슴이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그간 항상 생일을 잊어버려 미카엘이 선물을 준 뒤에야 알아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미카엘은 테렌스 경과 달리 장신구 종류는 한 번도 선물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레티시아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을 유심히 지켜본 다음, 그 물건들의 가장 최고급품을 선물하곤 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자신에게 건넬 선물을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다.
달깍.
미카엘은 함에 소중하게 보관한 듯한 단검을 레티시아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단검은 금은보화가 박혀 있다거나 장인의 문양이 찍혀 있지는 않았으나, 손에 착 감기는 유려한 가죽 검집과 범상치 않은 시퍼런 날을 보니 레티시아는 죽었다 깨어나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요긴하게 쓸게요.”
“…….”
미카엘의 눈길이 다시 원래 길이를 회복한 레티시아의 머리카락에 잠시 머물렀다. 레티시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암요, 조심하죠. 아시잖아요, 그땐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걸.”
“손목.”
“네네. 혹시나 만약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아주 암살자 고놈의 손목을 댕강 잘라 버리겠습니다.”
“뼈.”
레티시아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제가 휘둘러도 뼈가 잘릴 수준이라고요?”
그녀는 기겁하며 단검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걸 검집에서 뽑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뭐, 호신용이라고 생각하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더군다나 미카엘은 항상 그녀를 과보호하려 드니, 이 단검을 지니고 있으면 그의 불안감이 한층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항상 자신에게 최고의 물건만을 선물하려는 미카엘의 마음에 기뻤던 것도 물론이고.
축하도 잠시, 그들은 함께 서류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무척이나 꼼꼼한 상관이었고, 레티시아 역시 일을 허투루 하는 건 싫었기 때문에 얼핏 단순해 보이는 안건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곤 했다.
어느덧 해가 하늘 정가운데에 떠올랐을 무렵 레티시아는 신음을 흘리며 기지개를 켰다.
“전하, 점심 드시겠어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시종은 이 시간 때 으레 그러했듯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러 황태자 전용 주방으로 달려갔다.
곧 시종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트레이에 실은 채 돌아왔다. 늘 보기만 해도 황홀한 음식들이 준비되었지만, 식사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식에 허비할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레티시아는 아침 내내 보던 서류들을 다시 검토하기 위해 가방을 뒤집었다.
서류를 모두 꺼내 놓고 보니, 큰 가방 안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산딸기주가 신경이 쓰여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미카엘의 질문하는 듯한 시선이 곧바로 레티시아에게 내리박혔다.
“산딸기주예요. 선물로 받았어요. 이따가 밤에 마실 생각이었는데, 지금 드시게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빈 잔 두 개를 꺼내 산딸기주를 조금씩 따랐다.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미카엘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황족에겐 잘 진상하지 않는 산딸기로 만든 술을 보자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봄기운 어린 바람이 술을 따르는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레티시아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가까운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미카엘은 성질 급하게도 이미 산딸기주를 한 모금 홀짝이는 중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세상이 거꾸로 돌았다.
쨍그랑!
미카엘이 곧바로 뱉어 낸 붉은 산딸기주가 화려한 상의에 피처럼 흘렀다. 동시에 그는 레티시아의 손에 들린 잔을 쳐내 억지로 바닥에 떨구었다.
극독.
동공이 확장되고 억지로 붙들다시피 한 손이 차가워지는 걸 보니 분명 암살용 독 중 하나였다.
“전하!”
레티시아는 미친 듯이 벨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곧바로 달려온 시종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의사를 부르기 위해 다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레티시아는 창백하게 질려 가는 미카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창백히 질려 가는 미카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간 숱하게 미카엘의 감정들을 겪고, 느끼고, 봐 왔기에 지금 역시 그의 감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미카엘은 분명, 웃었다.
하지만 섬뜩한 의구심도 잠시, 미카엘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자 레티시아의 머리는 오직 미카엘의 안위만을 위해 돌아갔다.
“서, 서랍…….”
손이 덜덜 떨렸다. 미카엘이 그 사물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의미를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서랍이라는 말이 가리킬 만한 사물은 이 집무실에 하나뿐이었다.
레티시아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빼내, 의자에 앉아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미카엘의 앞에 가져갔다.
무색무취에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종류의 독들만이 암살용으로 쓰였다. 때문에 미카엘이 미리 준비해 둔 듯한 해독제를 찾지 못한다면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으리라.
레티시아는 아주 잠시 미카엘의 시선이 닿은 서랍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서랍을 거꾸로 뒤집어 안에 든 복잡한 물건들을 모두 바닥에 흩뿌려 놓았다.
작은 시럽이 든 유리병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레티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유리병을 집어 올려 미카엘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이거죠?”
병을 응시하는 눈빛.
레티시아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