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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150)

51화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머리를 부여잡고 조심스레 시럽을 흘려 넣었다. 미카엘은 죽은 사람처럼 차갑고 경직되어 있었지만,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보니 무사히 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방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해독제를 먹었지만 산딸기주에 무슨 독이 들어 있는지는 모른다. 호르헤 경은 모든 독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는 없다고 말했다. 미카엘이 준비해 놓은 해독제가 정답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카엘의 손을 부여잡으며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신에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미카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티…시…….”

“전하, 억지로 말하지 마세요!”

레티시아는 기겁하며 미카엘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다행히 미카엘의 얼굴엔 어느 정도 핏기가 돌아왔고, 팔다리의 마비도 아주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안심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레티시아.”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눈이 따가웠다.

“괜찮으시다고요? 괜찮으실 리가 없잖아요. 곧, 의사가 올 테니까…….”

“껍질.”

레티시아의 눈이 일순간 초점을 잃었다. 알맹이가 없는 껍질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올 리가, 없다고요……?”

레티시아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럴 리가 없다. 방금 시종이 달려 나갔지 않은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곧 2년 전의 암살 기도를 떠올렸다.

‘그때도 도와줄 사람들은 모두 제거당한 뒤였어.’

불행 중 다행히도 다들 정신을 잃게 만드는 약만 먹고 쓰러졌기에 테렌스 경을 제외한다면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암살자 역시 그런 온유한 수를 쓰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종이 달려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주치의를 미리 차단해 뒀을 정도면 시종도 못 와야 정상인데.’

높은 확률로 시종이 매수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황태자의 음식은 주방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한 명이 맛보고 확인한 후 올라오니 눈에 띄지 않게 독을 타기 어렵다. 따라서 레티시아를 통해 맹독을 술에 타는 방법을…….

‘일라이자.’

피가 식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더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점차 마비가 풀리기 시작하는 다리로 의자에서 일어나 레티시아의 오른손을 꽉 붙들었다.

“문.”

“저 문으로, 나가자고요? 통로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해바라기 씨.”

“……!”

레티시아는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해바라기 씨는 꽃이 피어 있던 자리를 빼곡하게 메운다. 미카엘은 이미 그 비밀 통로들이 암살자들로 꽉 차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복도 역시…….”

“땅.”

“믿죠. 전 전하를 믿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전하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전 제 자신을 믿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알지 못할 만한 다른 통로가 있다면…….”

레티시아는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닫았다. 결국 이런 사안에선 미카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 미카엘에게서 받았던 단검을 꺼냈다.

‘이걸,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지만 레티시아가 단검을 꺼낸 순간, 미카엘이 단검을 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단검이 본래 있던 품속으로 그대로 밀어 넣었다.

“…꼭 필요할 때만 쓸게요.”

“…….”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대답이 마뜩잖은 모양이었지만 결국엔 수긍하고 손목을 놓아주었다.

어쨌든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날이 좋은 단검을 선물 받은 게 아니겠는가.

미카엘은 아직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레티시아의 부축을 완강히 거절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미카엘이 옳았어.’

그들을 도와줄 만한 사람들은 모두 제거당한 것이다.

아니면 매수당했거나.

미카엘은 처음엔 그녀보다 한 발 더 앞서 걸었지만, 이내 지쳤는지 숨이 가빠지고 다리를 살짝 끌기 시작했다.

“전하, 무리하지 마세요.”

레티시아는 그의 귓가에 대고 살짝 속삭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황태자의 생활공간, 즉 쿼터와 황태자 궁의 나머지 공간을 분리하는 복도 바로 코앞에 도착했다.

두 공간은 거대한 아치형 문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항상 열려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닫힌 채였다.

레티시아는 그 이유를 미카엘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암살자들이 저 문 뒤에 매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하를 생포하는 게 목적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레티시아의 손으로 미카엘에게 맹독을 먹이려 한 게 수상했다.

‘아니야. 보통은… 내가 먼저 마셨겠지.’

극도의 공포가 레티시아의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미카엘은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우연한 변덕이 아니었다면 술을 먼저 입에 대는 쪽은 레티시아였으리라.

‘그 술의 타깃은 나야.’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레티시아 우즈를 죽이고,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를 생포한다. 그렇다면 미카엘은 그 핏줄과 지위만 남은 채 세상과의 소통을 모두 단절당하게 된다.

“레티시아.”

미카엘이 조용히 그녀를 부르더니, 아치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머뭇거렸다. 자신이 해석한 바가 맞는지 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저기로… 나가시려고요?”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뜻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미카엘은, 레티시아 혼자 아치문을 열고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없이.

“저… 혼자요? 전하께서는요?”

미카엘의 손끝이 그들이 돌아온 복도를 가리켰다.

“집무실로 다시 돌아가시겠다니……. 그게 무슨, 무슨…….”

레티시아의 말이 덜덜 떨렸다. 미카엘의 조금 전 말은 그 자신을 죽일 사람을 얌전히 목을 씻고 기다리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제대로 반대하기도 전에, 미카엘은 조금 전까지 맹독을 먹고 마비에 걸려 있었던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문을 살짝 열고, 레티시아를 문밖으로 밀어 낸 것이다.

“눈.”

그의 위치를, 저자들이 물으면 순순히 말하라는 의미를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면서.

미카엘에 의해 아치문 밖으로 밀려난 레티시아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무척 잘 아는 얼굴이, 익숙지 않은 표정을 띤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시아.”

바로 일라이자였다.

레티시아는 지금,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미카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기 때문인지, 이런 상황이라면 으레 느껴야 할 법한 분노도 슬픔도 가슴속에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공허한 충격만이 레티시아를 지배할 뿐이었다.

황태자 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친구로 여겨 주었던 일라이자가 그녀를 배신했다.

‘아니, 배신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

겨우 돈에 매수되어 목숨을 걸 리가 없다. 일라이자는 처음부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레티시아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검은 망토를 두른 암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 우즈가 확실해? 다른 빨강 머리 계집애는 아니겠지?”

“확실해.”

그녀는 일라이자가 자신의 신원을 적에게 확인시켜 주는 모습을 보면서도 원망에 가득 찬 말을 쏟아 내지 않았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 또한 없었다.

상황만 조용히 관찰할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암살자는 일라이자를 포함한 여섯.

이들의 목적은 아마 홀로 빠져나온 미카엘의 생포이리라.

하지만 미카엘 없이 그녀 홀로 복도에 나왔다. 즉 그들은, 집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레티시아의 생각이 틀리진 않았는지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암살자가 성마르게 물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죽었나?”

“…….”

“경고한다. 대답해라.”

레티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신은 오직, 미카엘이 말해도 된다고 허락한 말만 입 밖으로 낼 것이다.

“전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입니다.”

“그래,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동안 너희 둘은 이 계집애를 처리해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나이 든 암살자는 일라이자와 다른 암살자 한 명만을 레티시아의 곁에 남겨 둔 채 나머지 암살자 셋을 데리고 황태자의 쿼터로 진입했다.

한편, 그들이 떠나자마자 레티시아는 다소 기묘한 상황에 부닥쳤다. 유일하게 남게 된 암살자와 일라이자가 서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레티시아의 생사 여부를 두고.

레티시아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는데, 딱히 목숨에 미련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련은 차고 넘쳤다. 탈출 방법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편에 가까웠다.

어느덧 토론이 일단락이 된 모양인지 암살자가 서서히 레티시아를 향해 다가왔다.

일라이자가 황급히 그 암살자의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우린 황태자만 제거하면 되잖아! 왜 얘를 쳐!”

“지나치게 중요한 인물이다. 살려 두었다간 다들 우리의 판단력을 의심할 거야.”

“얘는 고작 하녀일 뿐이야. 지금은 비서니 뭐니 해도, 엉터리 감투에 불과해. 그러니… 그래! 손이랑 혀만 자르는 건 어때? 아무것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도록.”

“…….”

암살자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일라이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레티시아는 자조했다. 설령 일라이자가 무릎을 꿇고 빈다 하더라도 암살자의 결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일라이자의 말대로 혀와 손이 잘리고 살아남는다 한들 무슨 차이점이 있겠는가?

어차피 불구가 된 그녀는 이 냉혹한 게임이 시작된 궁에서 금세 죽어 버릴 것이다.

마침내 일라이자를 완전히 떨어트린 암살자는 무방비한 상태로 서 있는 레티시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레티시아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어 검날을 그대로 받아쳤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건, 반 동강이 난 암살자의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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