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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50)

52화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암살자가 당황한 틈을 타 복도를 달려 도망쳤다.

자신은 미카엘이 준 단도 덕에 암살자의 검만 부러뜨렸을 뿐이다. 몸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으니 훈련받은 남녀에겐 곧 따라잡힐 게 뻔했다.

하지만 미카엘 없이 복잡한 황태자 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할 엄두도 안 날뿐더러, 미카엘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비밀 통로엔 암살자들이 득실거린다고.

그래서 레티시아는 붙잡힐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달리고, 또 달리는 것.

‘……?’

하지만 웬만큼 달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음에도 쫓아오는 모습은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복잡한 황태자 궁의 구조 덕에 그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상대는 그녀만큼 황태자 궁의 구조를 잘 아는 일라이자다.

‘……!’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일라이자야.’

다른 암살자는 분명 그녀를 계속해서 쫓아왔을 터. 일라이자가 그를 속여 엉뚱한 길로 새게 만든 게 틀림없었다.

‘…….’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라이자는 이미 독이 든 산딸기주를 선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과 미카엘을 죽이려 들었다.

실제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 살려 주었다 한들 이미 저지른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일라이자가 아니라면 자신은 이미 붙잡혔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눈을 문질러 시야를 가리는 식은땀을 걷어 냈다. 일라이자가 무슨 이유로, 뭘 했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이 장소를 빠져나가 믿을 만한 사람을 불러와야 했다.

잠시 후.

레티시아가 테렌스 경을 위시한 젊은 기사들을 불러왔을 땐 이미 상황은 모두 끝나 있었다.

피에 흠뻑 젖은 젊은 황태자가 반역자들을 모두 도륙한 것이다.

* * *

그 어떤 일이 일어났든 간에 레티시아의 자리와 그 의무는 이전과 동일했다. 레티시아는 여전히 온종일 미카엘의 입과 손이 되어 주었다.

그 덕에 황태자 궁 전체로 번졌던 소란은 금세 잠재워졌고, 하루아침에 사라진 사용인들과 미카엘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 감옥에 갇힌 일라이자를 만나 보겠느냐고 물었지만, 레티시아는 얼마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어차피 일라이자는 조만간 처형당할 터. 자신이 일라이자를 찾아갔을 때, 간수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말들은 오직 원망과 조롱뿐이리라.

레티시아는 결코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일라이자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원망할 수도 없었기에.

“전하, 전부 이상 없습니다. 이제 드셔도 됩니다.”

미카엘의 주치의가 정중하게 말하며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레티시아는 착잡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미카엘 이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의 주치의가 황태자의 입에 들어갈 모든 음식을 맛보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역사책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보안이 철저하게 강화된 건 당연해. 하지만 이건…….’

레티시아는 차라리 동물을 쓰는 방법도 제안해 보았지만, 동물에게는 독성을 나타내지 않으나 사람에겐 치명적인 독이 쓰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치의의 반론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결과, 미카엘은 물론 그녀조차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을 주치의가 맛본 다음에야 먹게 되었다.

미카엘이 레티시아 역시 자신과 동등한 경호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번엔 미카엘과 함께 그녀도 노려진 게 틀림없었으니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식사는 금방 끝났다.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레티시아는 여전히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서류들을 처리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이 든 음식도, 독이 든 음식을 먹고 탈이 난 사람도 없었다.

무척 평온한 일상이었다.

귓가에 이질적인 소리가 박히기 전까지는.

“으아아아!”

레티시아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누군가 복도에서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카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빼 들었다.

하지만 그녀나 미카엘이 제대로 대응을 하기도 전에, 기사단 한 무리가 우르르 집무실로 들어왔다.

“끄으윽…….”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초라한 남성이 어느 기사에게 목덜미가 잡힌 채 질질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피를 사방에 묻히면서.

레티시아는 곧 그 원인을 발견했다. 남성의 오른쪽 팔뚝이 조금 전 잘려 나간 듯 꿀렁이는 선혈을 토해 내고 있던 것이다.

“전하, 침입자를 잡았습니다.”

“…….”

미카엘의 시선이 흔들렸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미카엘은 내리기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할 때면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발.”

“전하께선 여기까지 어떻게 침입했는지 물으셨습니다.”

“…….”

침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레티시아는 쓰게 생각했다. 훈련받은 자들이, 겨우 팔 하나 잘려 나갔다고 순순히 대답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침입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한마디 내뱉었다.

“짐피나무.”

“……!”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짐피나무라니.

짐피나무는 이파리와 줄기에 미세한 가시들이 빼곡히 돋아난 독성 식물이었는데, 맨살이 스치는 즉시 가시를 타고 독이 주입되어 죽느니만 못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언뜻 듣기엔 독살과 관련이 있어 보였지만, 미카엘은 지금 이자에게 독을 쓰자고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짐피나무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문법 중 하나였다.

‘고문…….’

식은땀이 한 줄기 등허리를 타고 떨어졌다. 레티시아는 지금 자신이 이 말을 밖으로 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무지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제국은 고문을 금지하지 않았다. 특히나 황제의 명을 받은 기사가 자행하는 고문이라면 더더욱 절차상 문제가 없으리라.

문제는, 이제 이자를 고문할 모든 질문들과 방안들이 바로 레티시아의 입에서 나오리라는 사실이었다.

비겁하다 해도 좋았다.

레티시아는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언정 고문을 자신의 입으로 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고문과 사형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전생의 기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벼락을 맞고 살아남았다.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간절하게 만드는지는 익히 알았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저지르지 않은 죄를 얘기하면 목숨을 살려 준다고 했다면 레티시아는 그가 알려 주는 대로 줄줄이 읊어 자백했을 것이다.

맹세컨대, 슈베러 교수의 수업에서 고문에 대해 배웠을 적 미카엘의 생각 역시 레티시아와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고문을 선택한 이유를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침입자를 끌고 들어온 한 무리의 기사들은 황태자에게 영원히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이 아니다. 본디라면 진작 맹세하고도 남았겠지만, 미카엘이 못 미더운 황태자인 탓에 아무도 맹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살자들을 홀로 처치한 사건은 미카엘에게 득이 되었다.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지금 역시, 미카엘은 이자들 앞에서 강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전하…….”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애원하듯 불렀다. 미카엘은 그녀를 여느 때처럼 똑바로 바라보는 대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마치, 그의 표정을 레티시아가 읽어 내리는 걸 거부하는 것처럼.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문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

“여, 여기서요?”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숲.”

피가 차게 식었다.

짐피나무는 숲에서 자란다.

레티시아는 독처럼 느껴지는 말을 입 밖으로 겨우 끄집어내었다.

“고문실로… 이동하라고 명하셨습니다.”

* * *

“우우윽!”

레티시아는 고문실을 빠져나오는 즉시 속에 든 모든 걸 토해 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침입자는 고문실의 기구에 눕히고 겁을 약간 주자마자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모두 입 밖으로 뱉어 냈다.

그렇다 한들 고문실의 시체 썩는 악취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핏자국들, 잘 관리한 것처럼 보이는 고문 기구들이 없던 게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지금 깨닫기엔 너무 늦어 버린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앞으로 저 고문실에 자주 드나들 가능성이 크며, 오늘처럼 겁을 주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고문을 가하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금방이라도 미카엘을 원망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레티시아.”

“미안해하실 건 없어요. 전하께선, 해야 할 일을 하신 것뿐이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레티시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그 사실을 알았는지 미카엘은 그녀에게 대답 대신 부드러운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투덜거렸다.

“전하, 전 이젠 손수건 정도는 가지고 다닌다고요.”

하녀에게 깨끗한 손수건은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레티시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돈을 모았기 때문에, 여윳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의 비서로 되돌아온 후 상황은 달라졌다. 깨끗한 손수건은 상비품 중 하나였으며 레티시아는 더는 하녀도 학대받는 아이도 아니었으니 귀족 도련님의 손수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한마디 중얼거렸다.

항상 주의 깊게 그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레티시아가 순간 놓쳐 버릴 정도로 미미하게.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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