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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50)

53화

레티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카엘이 그녀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크기로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하, 다시 한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

미카엘은 그길로 입을 닫아 버렸다. 레티시아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변명이겠지.’

미카엘은 변명을 잘 하지 않았다. 그가 변명하는 몇 안 되는 경우는 정말로 레티시아가 큰 해를 입었을 때였다.

바로 지금처럼.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요. 이해… 이해한다곤 말씀 못 드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

“하지만 전하, 저는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마지막은 다분히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레티시아 본인조차 입 밖으로 내자마자 놀랐을 정도로. 하지만 미카엘의 경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카엘은 눈을 크게 뜬 채 레티시아를 내려다보더니, 살짝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소매를 집으려다 다시 뒤로 물렸다.

“…….”

“…전하.”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목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뒤로 천천히 돌아서서, 아직도 사방에 피가 튀어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빠른 걸음걸이를 따라잡기 위해 반쯤 뛰어가야 했다.

“전하, 조금만, 천천히 가 주세요.”

“…침대.”

“쉬기에는 아직 일이 많잖아요. 장소만 옮겨서…….”

“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피곤하신 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미카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레티시아는 그의 발뒤꿈치를 밟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의 옆에 섰다.

깊은 청록색 눈이 불안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곧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이를 꽉 악물었다.

레티시아가 그 이유를 떠올리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제가 그렇게나 방해가 되었나 보네요. 고문실에서.”

“…….”

“토해서 죄송해요.”

“…….”

“이만 쉬러 가 볼게요. 제 도움이 필요한 부분들은 꼭 메모해 두셔요. 내일 전부 처리할 테니까.”

“레티시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레티시아는 치맛자락을 잡아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레티시아는 금세 그 자리를 떠났지만, 등에 집요하게 내리꽂힌 미카엘의 눈길은 그녀를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오랜 버릇대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미카엘이 침대를 휴식을 뜻하는 말로 쓰는 것도 그녀의 그런 행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는 황태자의 침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제법 공을 들인 천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렇게 쉬는 거, 오랜만이네.’

아이러니하게도 하녀였을 적이 휴가를 훨씬 많이 썼던 듯했다. 황태자 궁의 사용인 복지가 좋아서가 아니라, 현재 레티시아가 맡은 업무량이 지나치게 과도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미카엘은 물론, 레티시아조차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었는데.

한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지나치게 걱정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당시의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순진했어. 멍청했고.’

어느 순간부터 미카엘은 그녀를 급속도로 앞질렀고, 레티시아는 그런 그의 수준을 그저 쫓아가기에 급급했다.

업무 진행은 빨랐지만, 레티시아가 미카엘과 동등한 수준이라서라기보단 그간 함께 지내며 맞춰 온 호흡이 맞은 덕이 컸다.

그런데도 레티시아가 압도적인 격차를 느낀 건 얼마 전, 암살 기도가 처음이었다. 자신이 반투명 유리창을 문에 달았을 당시 과보호라며 투덜거릴 때, 미카엘은 이미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레티시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나간 일을 곱씹어 보았자 무얼 하겠는가?

그녀는 화장대로 다가가 머리를 풀었다. 지난 2년 동안 고이 기른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쪽까지 차르륵 떨어졌다.

2년 전,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잘린 머리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그녀를 볼 때마다 무척이나 미안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일날 선물 받은 단도 역시 터무니없을 정도의 명검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더욱.

레티시아는 무심코 화장대 서랍에서 빗을 꺼냈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 새로 사야겠어.’

매일 빗다 보니 그녀가 애용하는 빗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평소라면 진작 샀겠지만 근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다 보니 전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레티시아는 혹여 쟁여 둔 빗이 있는지 서랍 안을 살피다,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했다.

상아 빗이었다.

일라이자에게서 받은.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상아 빗을 서랍 저 끝자락으로 밀어 버렸다.

‘…그냥, 다 같이 내다 버릴 걸 그랬어.’

산딸기주를 이용한 암살 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다음 날, 수사대가 그녀의 방에 들이닥쳐 옛 동료들이 준 선물들을 모조리 쓸어 갔다.

레티시아는 항변 한번 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다른 선물들에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그들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레티시아는 일라이자가 준 상아 빗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주머니에 넣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유품이 될 것 같아서.

언젠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일라이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전해 주고 싶었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감상적인 생각은 여기까지다. 오늘만 해도 침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이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겠지.’

그리고 레티시아 역시,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들을 그녀 자신의 입으로 가해야 할 것이다.

‘…….’

레티시아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직도 고문실에서 맡은 피비린내가 깨끗한 두 손에서 나는 듯했다.

“못 하겠어!”

레티시아는 나지막하게 부르짖었다. 처음, 미카엘의 번역기가 되었을 때 이런 일들을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미카엘이 자라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어른들과 미카엘 사이의 소통을 위한 가교가 되어 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의 언어 능력은 전생에 읽은 소설 속과는 달리 나아지지 않았고, 덩달아 레티시아 역시 험난한 황위 다툼에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도 내가 이런 일들을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그 어렸던 미카엘이 모든 선택을 그녀 자신에게 맡긴 그날 호르헤 경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레이엄 후작이 그들을 손아귀에 틀어쥐었을 때도, 떠날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떠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다면 미카엘은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허수아비가 되어 버릴 테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레티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업 자금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가끔은 미련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자신은 미카엘에게 매여 있었다.

‘어쩔 수 없어.’

레티시아는 항상 후회 없는 선택을 해 왔다. 몇 번을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길을 걸으리라.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자신이 앞으로도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레티시아는 눈을 문질렀다.

‘미카엘은… 괜찮은 걸까.’

생각은 미카엘에게로 옮겨 갔다. 그동안 자신은 미카엘이 황태자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미카엘을 위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라이자가 그녀에게 독이 든 산딸기주를 건네기 전까지는.

‘아니야.’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좀 더 정확히는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침입자를 고문하라고 명을 내리는 미카엘을 보았을 때, 레티시아의 가슴은 고통스럽게 조여들었다. 그가 평소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알고, 왜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지도 알았기에.

이제 레티시아는 결국 미카엘이 미치광이 폭군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는, 소설 속 등장했던 바로 그 잔혹하며 피에 미쳐 있는 폭군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미카엘은 너무나도 곧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폭군이 되기는 될 거야.’

미카엘이 아닌, 주변이 바로 그를 그렇게 만들 테니까.

‘…….’

그리고 레티시아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레티시아 역시 평생을 폭군의 번역기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빈말로도 잘 쉬었다곤 할 수 없어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분명 자신이 집을 뛰쳐나오지 않고 계속 착취당했다면 되어 있을 모습보다야 훨씬 나아 보였다.

레티시아는 언젠가 자신이 다이애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체스 판에서 뛰쳐나가라고, 했지…….’

그때는 다이애나도 레티시아도 체스 판 위의 무수한 폰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미카엘은 킹이며, 레티시아는 보잘것없는 폰에 불과했지만 그가 가진 유일한 체스 말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체스 판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알았다.

자신은 이 생지옥에서 살아갈 수가 없으며, 누구든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결정을 내린 레티시아는 겉옷 하나만 걸친 채 밖을 나섰다.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핏자국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아직도 공기 중에 남은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레티시아.”

레티시아를 발견한 미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티시아는 청록빛 눈에서 반가움과 미안함을 읽어 내렸다.

“전하.”

레티시아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미카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의 감정을 이번만큼은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겁게 느껴졌다.

“저… 여기를 떠나려고요.”

“…….”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그의 얼굴을 상상했다. 분노, 경악, 배신감, 슬픔……. 그 무엇이라도 말이 되었고 레티시아는 그중 무엇 하나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미카엘의 반응을 확인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드시 말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민하며 미루어 보았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녀는 미카엘의 답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 당장.

“같이… 가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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