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자칫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발언을 입 밖으로 불쑥 내뱉고는 여전히 바닥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펫은 핏자국을 빼기 어려웠는지 아예 새것으로 대체되었지만, 핏자국이 남은 자신의 신발이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그래,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행보를 정하자 그다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바로 미카엘이었다.
그녀가 사라지면 미카엘이 허수아비가 된다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미카엘의 언어가 제자리걸음인 원인이 바로 자신이니, 평생을 곁에 있어야겠다는 어쭙잖은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레티시아가 여태까지 감히 미카엘에게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근본적인 의문 때문이었다.
‘과연 미카엘이… 황위를 원할까?’
8년.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곁에서 지낸 시간이었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봐 왔다.
분명 미카엘은 자신의 의무에서도, 미래에서도 도피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나라의 청사진은 그 광채를 숨길 수 없는 원석처럼 찬란한 색채를 빛내곤 했으니까.
하지만 미카엘이 과연 황위를 원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레티시아는 오늘 큰 충격을 받았지만, 실은 침입자에게 고문을 가하는 정도야 약과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장 일주일 전만 해도 미카엘은 암살자들 서넛을 홀로 도륙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계속해서 일어나겠지.’
연속된 암살 기도와 살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고 고문해야 하는 황실의 암투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죽는 그날에야 끝날 것이다.
레티시아는 인정했다. 그렇다.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한 미카엘의 생각을 전혀 몰랐다.
황위에 관한 질문은 금기에 가까웠기에 여태껏 감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미카엘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간 생각해 오기도 했고.
‘진작 물어봤어야 했어.’
입이 썼다.
지난날들을 곱씹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만 확인하는 꼴이었다.
진작, 진작에… 미카엘이 사람을 죽이고 고문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기 전에 똑같은 질문을 던졌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레티시아는 오늘을 포함해 지난 일주일간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고, 치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티시아가 침묵에 압사할 것 같다고 느꼈을 때에야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크.”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미카엘은 그다지 화나거나 충격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할 말이 가득 차오른 눈빛으로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청록빛 눈은 빛을 담고 시시각각 일렁였기에, 레티시아는 그 감정들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전하께서 남으시겠다면 저 혼자서 떠나겠어요. 아시잖아요, 전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
“저, 전하의 성에 찰 정도는 물론 못 되겠지만 모아 둔 돈이 제법 있어요. 아시다시피 그레이엄 후작님께 금화로 받은 목돈도 있고요. 이 제국을 벗어나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어요.”
한참을 주절거린 레티시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랑은 아니지만, 자신이 미카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떠난다면, 미카엘은 황위 다툼에서 사실상 패배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황태자 궁까지 들려오는 다이애나 그레이엄이 문득 떠올랐지만, 그녀를 이 상황에 끌어들이는 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따라서 상식적인 시선에선 레티시아가 지금 미카엘에게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미카엘의 대답을 갈구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자신은 미카엘이 간곡히 붙잡으면 그대로 이 생지옥에 주저앉고야 말 테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원하지 않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며 잘난 체했지만, 자신의 모든 마음가짐은 항상 미카엘의 간절한 눈빛 앞에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은 알아야 했다. 미카엘이 뭘 원하는지, 그가 정녕 저 피로 물든 황위를 원하는지…….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미카엘의 말을 기다리면서.
“강.”
“전하……!”
레티시아는 비틀거렸다. 감정의 폭죽이 팡 터지며 가슴을 때렸다.
강.
강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저 드넓은 바다에 도달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 이 좁은 황실을 벗어나 그녀가 원하는 세상으로 도망치자고 말한 것이다.
“쌍둥이.”
“전하, 저도 전하를 떠나지 않을게요. 언제까지나…….”
레티시아는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제대로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날짜… 날짜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다 준비해 놓을게요. 그러니까…….”
“보름달.”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꽉 찬 보름달이 뜨는 밤은 정확히 보름에 한 번 돌아온다. 미카엘은 바로 오늘 밤에 떠나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오늘이요? 하지만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궤짝.”
“네. 제 돈은 제국 금고에 있으니까 가져가면 되긴 하는데……. 정말 괜찮을까요?”
“날씨.”
“…그렇긴 해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궁을 둘러싼 흐름은 날씨처럼 변덕스러워서, 언제 변수가 일어날지 몰랐다.
‘미카엘이 옳아.’
당장 내일, 황제가 미카엘을 경계해 가택 연금이라도 내려 버린다면 그들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 좋은 흥분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레티시아는 그 참혹한 생일 이후, 처음으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들은 이 궁을 떠날 것이다.
함께.
레티시아는 탈출에 필요한 물품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헤아렸다. 웬만한 건 손쉽게 준비할 수 있었지만, 미카엘의 정체를 가려 줄 옷을 구하려면 제법 애를 먹을 것 같았다.
“옷이 필요하겠네요. 전하께 맞을 법한 옷을 찾아올게요. 지금 입고 계신 건 너무 눈에 띄니까요.”
“옷장.”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은 이미 자신의 신분을 가릴 법한 옷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다행이에요. 그럼 전 제 옛날 옷들만 꺼내 입으면…….”
“동화.”
미카엘은 자신을 가리키더니, 레티시아를 가리켰다.
‘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미카엘은 그들에게 알맞은 가짜 신분을 동화처럼 꾸며 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도주를 계속해서 생각했던 레티시아조차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미카엘도, 그동안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거야.’
그동안 레티시아가 그 가능성조차 외면했을 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미카엘이 황태자로서의 힘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건 그 어떤 목표를 위해서라기보단 생존에 가까웠다.
힘을 잃은 허수아비 황태자는 황제의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나는 순간, 제거당할 뿐이니까.
“동화.”
미카엘은 그녀가 상념에 잠길 시간을 주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지나간 일들을 곱씹어 보았자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네. 그러니까……. 전하, 전하께선 적당한 신분의 기사로 위장하시는 게 좋겠어요.”
미카엘의 손은 검술 훈련 덕에 제법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고운 피부와 좋은 머리칼은 쉽게 가려질 만한 종류의 특징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는 전하의 직속 하녀라고 할게요.”
“…레티시아.”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거짓말을 못하거든요. 그러니 최대한 진실과 가깝게 말해야지요.”
그들은 금세 그럴듯한 이야기와 설정을 짜내었다.
미카엘은 오랜 기사 가문의 막내아들로, 하녀 한 명만을 데리고 여행하는 중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비트너 왕국.
비트너 왕국은 걸출한 기사들을 배출하기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조차 종종 가르침을 얻기 위해 왕국민의 제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레티시아는 책상 위에 올려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은행이 닫기 전에 돈을 찾아야 하니까… 저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찾아 놓을게요.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뿌리.”
“은행까지 오시겠다고요? 전하, 전하를 알아볼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거울.”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이 은행까지 따라오겠다고 얘기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로만 알았다.
미카엘 본인은 황태자 궁에 전혀 연관이 없는, 완전한 외부인들은 거의 만난 적이 없으니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소 놀랍게도, 미카엘의 화려한 얼굴은 실물을 반의반쯤 담아 낸 초상화로 그려져 제국의 홍보에 쓰이고 있었다.
수도를 벗어나기만 해도 그 홍보물을 본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겠지만 수도에 있을 때만큼은 조심해야 하리라.
“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여기 계세요. 통로가 막히지 않았다면, 마구간 근처로 나가는 게 있으니까 거기서 말을 훔쳐 타고 가요.”
다행히도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비서로 복직한 이후 승마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잘 타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말에서 떨어질 수준은 아니었다.
계획을 모두 세우자, 미카엘은 조금 전까지 열심히 보던 서류를 내팽개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종의 신호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주사위.”
레티시아는 그 말을 신호로, 미카엘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집무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던 체스 판에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