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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150)

55화

Chapter 7. 티스베와 카일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용한 마을, 잉카베리 사람들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가십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점이었다.

잉카베리는 그 비옥한 땅 덕에 다른 마을들처럼 기를 쓰며 일할 필요도 없었고, 별다른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평화롭고, 나쁘게 말하자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런 잉카베리에도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떠들썩해지는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먼 외지로부터 여행객이 찾아올 때였다.

잉카베리는 비트너 왕국과 데브란트 제국을 잇는 길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지만, 여행객을 볼 기회는 무척 드물었다. 여행객들은 딱히 볼 게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보다는 다른 큰 도시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 여행객이 찾아올 때마다, 잉카베리 사람들은 할 일을 모두 내던진 채 그를 구경하러 몰려가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잉카베리에서 유일하게 여관을 운영하는 블라이 부인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폈다.

여관만으로는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으므로 식당을 같이 운영해야 했는데, 오늘처럼 낯선 외지인이 그녀의 여관에서 묵는 날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지친 꼴이 역력한 말 두 마리와 말보다 상태가 더 좋아 보이지 않는 두 여행객의 상태를 보니, 어쩌면 이틀 정도 더 머무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솟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요. 여기가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있을 건 다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블라이 부인.”

자신을 ‘티스베 랭턴’이라고 소개한 젊은 여자가 미소 지었다. 물결치는 듯한 빨강 머리에, 반짝이는 금빛 눈이 참 예쁜 아가씨였다.

“수도에서 왔죠? 힘들었겠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여행은 저도, 카일 도련님도 처음이라 많이 헤매긴 했지만요.”

블라이 부인은 ‘카일 도련님’을 힐끗 바라보았다. ‘카일 도련님’은 높으신 분들답게 말수가 적은 젊은 기사였다. 여자 여럿 울렸겠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블라이 부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죄수나 병자처럼 짧게 깎은 머리가 흠이었는데, 그마저도 화려한 외모를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뭐, 머리에 이라도 생겼나 보지.’

블라이 부인은 자꾸만 실룩샐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했다. 이 둘의 외모라면 잉카베리의 모든 젊은 남녀가 선남선녀를 구경하기 위해 여관으로 몰려오고도 남았다.

레티시아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힐끗거렸다.

단지 여관에 딸린 식당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녀와 미카엘을 쳐다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외지인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여태까지 그들은 일부러 사람이 많은 대도시만 골라 묵었다. 하지만 국경 지대가 가까워질수록 도시는커녕 웬만큼 큰 마을도 보이지 않는 데다, 말들이 너무 지쳐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얼른 먹고 올라가야겠어.’

다행스럽게도 음식은 금방 나왔다. 블라이 부인은 그들에게 먹음직스러운 차림을 한 상 내놓았다.

미카엘이 배고팠는지 빠르게 음식을 한 숟갈 떠서 맛보더니, 이맛살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긴장했다. 황태자 궁을 떠날 때, 가장 걱정했던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미카엘의 까다로운 입맛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적응을 잘하는 건지, 아니면 내색을 하지 않는 건지 웬만한 음식들은 무척 잘 먹었다.

따라서 미카엘의 심상치 않은 반응은 음식에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카엘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을 뿐, 계속해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안심한 레티시아는 조심스레 자신 앞에 놓인 스튜를 한 숟갈 먹어 보았다.

“…….”

레티시아는 얼굴이 팍 구겨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블라이 부인은 친절했지만, 음식에는 정말로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겨우 소고기 스튜 한 숟갈에서 신맛과 짠맛과 쓴맛과 단맛이 동시에 난다는 말인가?

‘일단, 여기 음식이 맛있어서 사람들이 이렇게 바글거리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

저들은 순전히 레티시아와 미카엘을 구경하기 위해 식당에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음식을 다 먹기도 전에, 레티시아의 추측은 현실이 되었다.

호기심을 견디다 못한 한 젊은이가 맥주 한 잔의 기운을 빌려 그들을 향해 다가온 것이다.

“기사 나리,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미카엘은 상대에게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대신, 레티시아가 방긋 웃어 보였다.

“저희는 수도에서 왔어요.”

당황도 잠시, 레티시아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대도시에는 여행객들이 차고 넘쳤고,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겪는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이런 경우의 수도 이미 예상을 해 놓았다.

“거봐! 내가 수도랬잖아!”

레티시아보다 나이가 결코 많아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은 그 자리에서 환호성을 올렸다.

그들 근처 테이블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둘의 출신을 두고 도박판이라도 벌어진 모양이었다.

“…….”

미카엘은 대놓고 언짢은 내색을 하며 소란에서 몸을 반쯤 돌렸다. 이 또한 레티시아와 미카엘이 미리 말을 맞추어 놓은 부분이었다.

귀족들 중엔 평민들을 하찮게 여겨 말도 거의 섞지 않는 이들이 제법 있었기에, 누구도 미카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도련님께선 소란스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마을 청년이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높으신 나리들이란 다 저렇죠. 충분히 이해해요. 저희 어머니도 제 친구들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거든요. 너무 날건달이라고.”

“뒈지고 싶냐?”

“맞는 말인데?”

어느덧 젊은 남녀들이 청년과 레티시아의 대화를 빌미로 삼아 은근슬쩍 그들 테이블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 또한 레티시아와 미카엘이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단 한 명, 둘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카엘이었다.

‘……?’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슬쩍 곁눈질했다. 접시도 얼추 비웠겠다, 분명 이 정도 타이밍에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로 올라가야 했다. 인상을 찌푸려 주면서.

그러면 미카엘은 오만한 귀족이라고 적당히 뒷말을 들은 후 잊힐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지금, 이 자리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체 한번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는 듯 대놓고 마을의 젊은이들을 응시하는 게 아닌가.

보다 못한 레티시아가 탁자 밑으로 발을 살짝 밟아 주었지만 미카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미카엘은 만에 하나 추적자들이 이곳을 급습할 경우를 걱정하는 듯했다. 그녀가 보기엔 과한 걱정이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기에 레티시아는 마을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비트너 왕국엔 무슨 일로 가는 거예요? 역시, 검술 수련인가요?”

레티시아 또래의 마을 처녀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 왔다.

“네.”

“멋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질문들은 멈출 생각을 몰랐다.

“그런데 왜 하인이 아니라 랭턴 양이 따라왔어요?”

레티시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황태자 궁을 떠나온 지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티스베 랭턴’이란 이름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일 도련님은 절 제일 신뢰하시거든요.”

“그래도 하인 한 명 안 데리고 오다니, 심한데. 절 고용하시면 안 돼요? 조금만 받을게요!”

“좀 어려울 것 같네요. 도련님께선 낯선 사람을 싫어하셔서요.”

“곤란해하잖아, 이 멍청아!”

사람들 사이에 웃음이 물결치듯 왁자지껄 일었다. 레티시아는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 웃었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가짜 역할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은 부담스러웠지만, 오랜만에 또래와 함께 웃고 즐기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가족으로부턴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따스하게 그녀를 챙겨 주던 이웃들이 있었던 고향 마을이 생각나기도 했고.

한 청년이 미카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모시기에 나쁜 분은 아닌가 봐요? 저렇게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도, 조용히 계시는 걸 보니까.”

이런 경우, 웬만한 귀족들은 소리를 버럭 질러 평민들의 입을 억지로 다물게 하거나 대놓고 눈을 부라리며 객실로 올라가 분위기를 망치는 게 일반적인 행동이었다.

아니면 둘 다거나.

“사실, 왜 아직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시끄러운 자리는 정말 싫어하시거든요.”

레티시아는 되레 큰 소리로 받아쳤다. 미카엘보고 대놓고 2층 객실로 올라가라는 압박을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미카엘의 고집이 겨우 그 정도에 꺾일 리가 없었다.

그때, 한 마을 처녀가 불쑥 끼어들었다.

“왜 기사님이 정말 안 가시는지 모르겠어요?”

레티시아는 살짝 긴장했다. 이 사람이 그들의 사정을 알 리가 만무했지만, 그래도 의미심장한 어조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랭턴 양이 걱정되어서잖아요!”

생각보다 굉장히 핵심을 잘 짚은 말이었지만, 레티시아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럴 리가요. 그냥, 생각보다 이곳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아니면 아직 배가 고프시든가…….”

“시치미 떼지 말아요.”

“네?”

“딱 그건데? 랭턴 양이 여기 늑대들에게 속아서 아주 눌러앉을까 봐 걱정되는 눈치.”

“말도 안 돼요!”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어 곧바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요? 그럼 그럴 리가 없다, 이거네?”

“…….”

“그럼 이것도 못 느꼈어요? 아까부터 엄청 남자애들을 째려보고 계시던데?”

“세상에…….”

레티시아는 신음만 흘렸다.

이 사람들은 아무래도 너무 심심해서 망상병에 걸려 버린 게 틀림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접시를 치우러 온 블라이 부인까지 끼어들었다.

“지금 보니, 사랑의 도피로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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