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레티시아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이미 술이 한 잔씩 들어간 대화에서 농이 짙어지는 거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건 심했다.
“티스베.”
“네,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미카엘의 말을 다른 누구도 못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계단.”
슬슬 자리를 이동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레티시아는 도련님이 피곤한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객실로 올라가야겠다고 말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
그들 주변에 몰려 있었던 마을 청년들이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마치 절친의 연애 행각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얼굴이 발개진 채 서로 속닥이고 있었다.
그제야 레티시아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깨달았다.
“아, 이, 이건…….”
“티스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미카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레티시아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다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기억하고는 뻣뻣이 서 있었다.
‘……?’
미카엘이, 그녀를 뒤에서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식당 전체에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전… 카일 도련님!”
레티시아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녀를 풀어 주기는커녕, 끌어안은 채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연극.”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미카엘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는 이미 이해했다. 미카엘은 튼튼하고 힘센 하인 한 명 없이, 단지 믿을 수 있다는 핑계로 하녀 한 명만 데리고 여행길에 나선 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으니, 할 말은 없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긴 한데…….’
문제는, 레티시아가 미카엘과는 달리 딱히 철면피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는데.
왠지 미카엘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도련님.”
레티시아가 몸을 비틀자, 미카엘이 순순히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빨개질 수가 없는 얼굴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으… 비슷해요. 생각하시는 거랑.”
“역시!”
다시 한번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번엔 식당 전체가 터져 나갈 듯한 소리로.
미카엘은 이제 볼 장 다 봤다는 듯 휙 돌아 식당을 빠져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되레 멋있다면서 찬사를 쏟아 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연이어 레티시아가 떠날 때까지도 식당의 소란은 줄어들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웃고 떠들고 즐기기 위해 술을 더 주문했다.
블라이 부인은 입이 귀까지 걸린 채 맥주와 과실주를 열심히 퍼다 날랐다. 이상하게도 안주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지만, 그만큼 술을 더 먹을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편, 미카엘과 함께 객실에 도착한 레티시아는 방문을 꼼꼼히 걸어 잠근 다음,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외지의 방음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런 싸구려 여관은 더 그랬다.
혹시 호기심 어린 아이가 몰래 엿들으러 왔다가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효과적인 도피는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녀는 종이에 펜으로 적었다.
이제 저희가 여기에 왔다는 게 전 제국에 소문이 퍼지고도 남겠네요.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장단을 맞춰 줄 때까지만 해도 미카엘의 계획에 대한 반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객실까지 걸어오며 식은 머리로 생각하니, 그들은 무척이나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 귀족 기사와 그의 빨강 머리 하녀가 사랑의 도피라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추적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미카엘은 그녀의 손에서 펜을 빼 들더니, 유려한 필체로 단 한 단어를 적어 내렸다.
카드.
잘 섞어 놓은 카드 뭉치에서 무엇을 뽑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미카엘은 이 상황이 꼭 레티시아가 걱정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 대한 답변을 적었다.
네, 알죠. 그런데 전하, 그 카드 뭉치에 같은 카드가 절반 이상이면, 결국 뭘 뽑게 되겠어요?
1.
저희가 들킬 가능성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고요? 그럴 리가 있레티시아는 글자를 쓰다 말고 멈칫거렸다. 미카엘이 그런 행동을 한 진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도피는 그들이 도망친 진짜 이유를 가려 줄 좋은 혼선책이 될 것이다.
‘진짜로 사랑의 도피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아.’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비서로 일하며 염문설은 거의 사라지긴 했으나, 추적자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한껏 부풀려진 소문을 듣기라도 한다면 옛 소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목적지는 황위 다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황태자의 목적지와 다르기 마련이다.
‘비트너 왕국으로 가겠다고 우리가 사실대로 말한 걸, 믿을 수가 없어지겠네.’
비트너 왕국은 결코 신혼부부에게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살림을 차리고, 아이들을 키우기엔 너무 거칠고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검술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레티시아에게도 안전한 곳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기에 비트너 왕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국경 지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아.’
레티시아는 아주 조금 누그러진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이제 복잡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굳이 펜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해했어요. 그래도… 그래도, 좀 과했잖아요.”
미카엘은 그게 뭐가 큰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한테는 큰일이거든요?”
레티시아는 투덜거리며 겉옷을 벗은 다음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아무래도 소동이 더 커지기 전에 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분명 미카엘도 비슷한 생각이리라.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이 마을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여태까지 무리하게 달려서인지 그들이 타고 온 말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마을에서 말을 사는 방법도 있겠지만, 황태자 궁에서 애지중지 길러 온 말과 시골에서 온종일 힘든 노동을 하며 지내는 말의 상태가 같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가지고 온 돈에는 한계가 있었다. 황실의 보물을 가지고 왔다간 쉽게 추적당할 터이니 현금만이 유일하게 사용 가능한 자산이었다.
또한 후작이 준 거금의 금화를 모조리 가져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레티시아는 손가방 두 개에 가득 들어갈 정도의 금화만 지니고 수도를 떠났다.
아마, 나머지 돈은 국고로 몰수당할 것이다. 자유를 위해 치른 값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아깝지는 않았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껴 써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결국 새로운 말을 살 수도, 한계까지 지친 말을 당장 달리게 할 수도 없게 된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꼬박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블라이 부인은 활짝 웃으며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옮겨 주겠다고 제의했다. 레티시아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정중히 거절했으나, 블라이 부인의 친절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을 것 같아요.”
레티시아는 금화가 가득 든 손가방만 지닌 채 미카엘과 한적한 마을 길을 걷는 중이었다. 날씨가 따뜻한 데다 적당히 많은 구름이 따가운 봄볕을 가려 주어 산책하기 참 좋은 날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고, 어른들은 밭에서 바삐 일했지만 누구도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가게.”
“그럼요, 가게를 여는 게 오래전부터 제 꿈이었는걸요.”
“가게.”
“무슨 가게냐면은… 음, 비트너 왕국이니까 역시 무기상 같은 게 좋을까요? 감정은 도련님이 다 하고, 저는 청소를 맡겠어요.”
“티스베.”
그들은 단둘이 있을 때에도 호칭만큼은 가명을 써서 불렀다. 처음에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가명 역시 부르지 못할까 싶어 걱정했으나 미카엘은 노력 끝에 그녀를 티스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제가 하고 싶은 가게라…….”
레티시아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황태자 궁을 벗어나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들은 단 한 번도 비트너 왕국에 도착한 이후, 정확히 무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오직 추적자들을 따돌리는 데 급급했으며, 그들의 말을 우연히라도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말을 최대한 줄였기 때문이었다.
“도련님은 어떤 가게를 하고 싶으세요? 저는 원래 식당을 하고 싶었는데, 어제 깨달았어요. 요리를 제대로 할 자신이 없으면 식당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티스베.”
하지만 미카엘은 계속해서 레티시아가 원하는 가게로 하자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당연했다. 미카엘이 여태까지 황태자가 아닌 그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 리가 없었으니까.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감금되다시피 한 삶을 산 그가 선택권을 오로지 레티시아에게 맡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가… 제가 하고 싶은 가게…….”
문득, 레티시아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딱히 업종이 아니었다. 단지, 미카엘과 함께 소소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미카엘 역시 그걸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가게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레티시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둘이 함께할 수 있으니.
“도련님이랑 함께할 수 있으면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순간, 레티시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미카엘이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게 웃은 탓이었다.
구름이 걷혀 햇살이 미카엘의 그림 같은 얼굴로 쏟아졌다. 레티시아는 그녀 위로도 내리쬔 따스한 봄볕을 고스란히 만끽했다.
새들이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는 것처럼 지저귀고,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불어왔다.
완연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