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50)

58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선황의 주치의, 윌리스 경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윌리스 경은 한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의학자였다. 그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오직 세월의 흐름밖에 없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무수히 많은 중환자를 살려 냈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지만, 그는 그 어떤 치료 약도 없다는 흑목병에서 선황을 살려 내었다.

비록 선황의 의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재산과 신분을 빼앗긴 채 국경 지대로 쫓겨났지만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윌리스 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의 의사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 이마를 문질렀다.

“그저 동네 의사에 불과합니다. 편히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람에겐 그에 맞는 자리가 있는 법이지. 허나 약속하겠다. 내… 사람이 완치한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침묵이 흘렀다.

윌리스 경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불가능합니다.”

“…목숨이 아까운가 보군. 황제의 목숨에 비하면 이제 겨우 스물둘밖에 안 되는 평민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아닙니다.”

윌리스 경은 고개를 저었다.

“완치법이… 있습니다. 인정하지요. 전 그 치료법을 통해 선황 폐하를 저승길 문턱에서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말해.”

윌리스 경은 목숨의 위기를 여러 번 겪은 사람답게 차분했다.

“카일 경, 경의 가문이 얼마나 위세 높은 가문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 가문의 금고를 모두 털어도 저 아가씨의 치료비를 감당하기는 힘들 겁니다.”

“판단은 내가 한다.”

“…카일 경, 세상엔 돈과 지위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는 법입니다.”

미카엘은 더는 윌리스 경의 말장난을 참고 들어 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검을 빼내, 백발노인의 목에 들이밀었다.

미카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 18년.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삶을 살며 그가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세상엔 말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제법 많다는 사실이었다.

노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번쩍이는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마, 말할 테니 이, 이것 좀…….”

미카엘은 천천히 검을 바닥으로 내렸지만, 검집에 집어넣지는 않았다. 그는 시퍼런 칼날을 윌리스 경이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발치에 꽂았다.

“…당시, 폐하를 치료하기 위해서 저는 각종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 유의미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윌리스 경은 숨을 헐떡였다. 이제 극히 일부의 직계 황족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이자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황궁에 성소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젊은 기사의 대답은 조금 뜸을 들인 다음에야 돌아왔다.

“…처음 듣는군.”

“황태자 궁에 하나, 본성에 하나. 하지만 그중 효과가 있는 건 철통같은 보안에 둘러싸인 본성의 성소뿐…….”

윌리스 경은 먼 곳을 응시했다. 오래도록 보지 못한 고향을 떠올리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본성의 성소에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꽃이 자랍니다. 그 꽃은 영원히 지지도 시들지도 않지만, 한번 꽃을 꺾은 자리는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새로운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을 먹으면, 낫는 건가?”

“차라리 그러면 쉬운 문제였을 겁니다. 흑목병의 치료제를 30년에 한 번씩 만들어 보관할 수도 있었겠죠.”

“…….”

“카일 경, 흑목병을 완치할 유일한 방법은…….”

윌리스 경은 잠시 심호흡했다.

“성소의 꽃들을 모두 불태우는 겁니다.”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롭니다. 그 꽃을 모두 불태워야 합니다. 그러면 성소는 닫히기 시작할 겁니다. 다만 마지막 힘으로, 내부의 사람들을 모두 정화한 다음 완전히 닫히죠.”

젊은 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는 흑목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낸 게 아니었군.”

윌리스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기사는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그가 발견한 건 모든 병을 단번에 치유할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다른 부작용은 없었나?”

“예. 정화는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 걸리는 병이나 독 등을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그때 성소가 닫혔으니, 그 방법은 쓰지 못하는 게 아닌가?”

윌리스 경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35년이면 충분합니다. 30년이 지나면 꽃들이 자라나고, 5년이면 성소를 뒤덮지요. 성소는 불태워지기 전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다시 문을 열 겁니다.”

“…….”

“운이 나쁘다면 이미 몇 해 전 누군가가 그 방법을 써먹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확률은 제법 적을 겁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게 아니고서야, 35년 만의 기회를 날려 먹는 게 아깝지 않겠습니까?”

“…알려 주어서 고맙다.”

기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사의 집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늙은 의사는 상대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이후에야 긴장을 풀었다.

‘어떻게 하려나.’

젊은 기사는 자신이 내놓은 답에 제법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그 방법을 이용하려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늙은 의사는 가래가 뒤섞인 웃음을 토해 냈다. 자신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씌운 황제다. 충성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비틀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카일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그가 수도를 떠나온 이후 태어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였다. 그 어떤 위세 높은 집안의 후계자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윌리스 경은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지켜본 반역자들을 여럿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방금 본 젊은 기사는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연인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과 사랑은 음유시인들의 달콤한 목소리에 담긴 이야기 속 왕자님과 비슷한 꼴이었다.

‘하기야, 황자일 수도 있지.’

지금 황제는 사방에 씨앗을 너무 많이 뿌렸다. 반절이 죽어 나갔지만, 남은 반 중 소외된 누군가가 황위 다툼에 뛰어든다면 그것만큼 재밌는 일도 없을 것이다.

* * *

레티시아 우즈.

미카엘은 그녀가 나타나기 이전의 삶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할 가치가 없다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녀를 만났던 아홉 살보다 더 전의 기억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지 못하고 단편적인 파편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모두 차라리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래서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만나고서 그녀를 만나기 이전의 기억은 모두 버려 버렸다.

그 레티시아가, 죽어 가고 있다.

미카엘은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깊은 절망감이 전신을 내리눌러 숨조차 편히 쉴 수가 없었다.

‘…….’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분노, 원망, 공포, 갈망……. 그중 무엇 하나 레티시아에게 떳떳이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레티시아가 찾아와 황태자 궁을 함께 떠나자고 말했을 때, 미카엘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황태자 궁의 상태는 도저히 레티시아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았던 자신은 쉽게 적응했지만, 항상 열심히, 상식적인 삶을 추구했던 레티시아에겐 너무나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가 혼자 떠나지 않고, 자신에게 동행을 제의한 것에 감사하면서. 하지만 비트너 왕국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황제에겐 허수아비 황태자가 아직 필요했고, 미카엘은 그야말로 최적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쉽게 놓을 리가 없었다. 그 결과, 미카엘은 무수히 많은 추적자들과 마주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미카엘은 그들을 모두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개중 한두 명 정도는 여기까지 쫓아온 범상치 않은 실력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야 직접 처리하면 되는 문제였다.

‘곧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결심했는데…….’

미카엘은 비트너 왕국에 도착하는 그 즉시 자신이 오래전부터 레티시아를 속여 왔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당연히 레티시아는 처음엔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어쩌면 배신감 때문에 그를 영영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에 이르러선 미카엘은 세상 그 어디에라도 레티시아를 쫓아갈 자신이 있었다.

비트너 왕국에서의 그는 황태자도 뭣도 아닌, 그저 레티시아 우즈에게 인생을 걸 수 있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레티시아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를 치유할 유일한 방법은…….

미카엘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가 알고 있는 비밀 통로들은 오직 황태자 궁에 한정되어 있었다. 황태자 궁의 성소는 잘 알았고, 한번은 레티시아를 데려가 보기도 했으나 그곳엔 꽃은 한 송이도 없었다.

따라서 레티시아를 낫게 하려면 어떻게든 황제가 기거하는 본성의 성소를 열어야 한다.

물론, 성소에 접근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황위에 오르는 것.

미카엘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찜찜한 습기가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레티시아의 병이 나은 후,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떠나보낸다는 방안이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지만 미카엘은 그 또한 지워 버렸다.

이기적이라 해도 좋았다.

자신은 레티시아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에게 레티시아는 어둠 속을 제 발로 찾아온 불꽃이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그를 두껍게 둘러싸고 있던 소리의 장막이 깨졌으며, 그녀가 만들어 준 틈을 통해서야 자신은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녀 없이도 충분히 남들과 자유자재로 대화가 가능했으나, 미카엘은 아직도 레티시아가 없으면 자신은 그저 깊은 어둠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미, 카엘…….”

미카엘은 앉은 자리에서 반쯤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레티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레티시아는 끙끙거리면서 몇 가지 알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는데, 그중 미카엘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

미카엘은 결정했다.

이걸로 평생 레티시아에게 욕을 먹어도 좋았다. 어차피 레티시아는 항상 그랬듯, 자신이 간곡히 붙잡으면 궁에서 시들어 갈지언정 자신의 곁을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열에 들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레티시아에게 몸을 기울여, 귓가에 한마디 속삭였다.

“미안하다, 레티시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