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수도로 돌아가는 데 반대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고열 때문에 그들이 마차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윌리스 경이 국경 지대에는 당장의 고열을 다스릴 약조차 부족하다고 말했기에, 그들은 최대한 빠른 마차를 타고 수도로 달려갔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레티시아의 증상을 완화시킬 약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가시적인 열은 가라앉혔으나, 레티시아는 여전히 고통에 겨워 힘들어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흑목병의 증세를 완화하는 방법이 제법 흔히 알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미카엘은 각지에서 약재를 구해 부지런히 레티시아에게 먹였으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여유 자금이 순식간에 거덜 난 건 당연한 결과이리라.
180도 달라진 상황에도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하던 미카엘이었지만, 레티시아가 밤마다 헤아리던 금화들을 쓸 때만큼은 손이 덜덜 떨렸다. 절대 그 액수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곧 자신의 손엔 전 제국의 부가 떨어질 것이다.
다만 그 금화들로 작은 가게를 차리겠다며 행복해하던 레티시아가 떠올라 주저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이를 악물고 금화를 물처럼 썼다. 이제 자신이 다시 비트너 왕국으로 가게 된다면, 오직 그곳을 데브란트 제국의 이름으로 침략하기 위함일 것이다.
마침내 수도에 도착했을 때, 미카엘의 수중엔 돈이라곤 단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데브란트 제국에서 오직 다섯 명만이 아는 신호 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저녁.
어두운 방 안,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희를 완전히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버렸지.”
미카엘은 가볍게 응수했다.
“다시는 너희들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돌아온 겁니까?”
“해 보려고. 너희들이 원하는 거.”
“……!”
미카엘은 경악에 가득 찬 침묵을 즐기며 촛불을 밝혔다. 그가 궁을 몰래 빠져나가 각지에서 고르고 고른 네 명의 인재들이 딱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이들은 미카엘이 황위를 꿈꾼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로운 황제 밑에서 한자리씩 차지해 보려는 욕망이 이자들에게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미카엘의 목표는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뭐? 황위? 말이 되는 소리를. 폐하의 마음은 내게 없다.”
“예?”
“그분이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는 자식만 다섯. 나는 혈통으로나 입지로서나 그들에게 뒤처진다. 폐하께서 언젠가 내치면, 내쳐질 존재야.”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미카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 목표는 첫째, 목이 잘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 후작 위와 적당한 자산을 챙겨 가는 거야.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당장 나를 떠나도 좋다.”
미카엘은 남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기에, 만약 한 명이라도 자신을 떠난다면 넷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다. 더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적에게 넘어가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으니.
다행히 아무도 미카엘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다. 물론 그들 각각이 개인적으로 미카엘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테지만, 세상엔 염치가 없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를테면 미카엘 바로 자신처럼.
네 사람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넷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 리더 역할을 하는 힐데가르트가 입을 열었다.
“전하, 진심입니까? 혹여 저희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니.”
미카엘은 아주 느릿느릿하게 설명했다.
“여태까지는 내가… 폐하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 하지만 이제, 그래야 할 이유가 생겼다.”
“무엇입니까?”
“…너희들에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지 않나?”
“그건 맞긴 한데… 찜찜하잖아요!”
나이가 가장 어린 테오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전하, 남겨진 저희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생각은 하십니까? 겨우 저희들에게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편지 한 장이 끝? 최소한 사정은 설명하셨어야죠!”
“사정이 없었어.”
미카엘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냥, 떠나고 싶었다. 그게 끝이야.”
“정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황제가 되어야 할 이유가 생겨서 돌아왔다. 여기에도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여기서 헤어질 수밖에 없겠지.”
“…….”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넷은 미카엘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굳이 엿들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측근들의 심판을 평온하게 기다렸다. 그는 남의 얼굴을 레티시아처럼 능숙하게 읽어 내리지 못했다.
만약 이들이 모두 그를 떠난다 하더라도 황위만큼은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황위를 유지하는 방면에선 아주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될 터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미카엘은 최소한 레티시아에게 생명을 가져다줄 만큼은 데브란트 제국의 황제로서 버틸 수 있을 터이니.
“…전하.”
마침내 힐데가르트가 입을 열었다. 미카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황제가 되면… 더는 이번처럼 도망칠 수 없습니다. 이건 저희에게도 이 모든 것에서 손을 뗄 마지막 기회이지만, 전하에게도 마지막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녕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하지 않겠다.”
미카엘의 말에는 그 어떤 거짓도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황위를 원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미카엘이 물밑에서 해 온 모든 작업과 황태자로서의 정무 처리는 모두 일개 후작이 되어 레티시아와의 평온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레티시아가 급변하는 황태자 궁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 미카엘은 그 손을 흔쾌히 잡았다.
후작이 되기 위해선 언제일지 모르는 황제의 사망만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고, 분명 레티시아는 그 기간을 버텨 내지 못하고 스러져 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바로 그 점 하나 때문에 미카엘은 이들을 모두 내버렸다. 비록 평생을 넉넉히 살 수 있는 재화를 마련해 두기는 했으나, 본디 이들의 야망을 생각한다면 분노와 배신감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미카엘에게 돌아왔다. 미카엘이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이들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충언 하나만큼은 듣는 족족 귓가에서 흘려버리곤 했다.
황위에 올라 달라는 것.
그만큼 미카엘은 황제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황제가 되는 순간, 자신은 단 한숨도 편히 잘 수 없으리라.
미카엘 본인의 목숨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입이나 다름없는 레티시아의 안위 때문이었다. 당연히 레티시아는 황궁에서 시들어 갈 것이고, 결국 언젠가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놓아줄 수밖에 없으리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게 느껴질 정도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았기에, 미카엘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미카엘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머지 셋, 테오와 루드밀라와 이자크도 마찬가지였다.
미카엘은 그들이 차기 황제에게 올리는 충성 맹세를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받아들였다.
* * *
황궁의 본성에서 가장 깊숙하면서도 화려한 곳.
희끗희끗한 머리에 배가 튀어나온 중년 남성이 안락의자에서 서간을 읽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란 시종이 황급히 다가왔다.
“폐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목이 마르구나. 시원한 물 한잔 다오.”
“예, 폐하.”
잠시 후 시종은 얼음을 동동 띄운 물을 은쟁반에 받쳐 올렸다.
황제가 물을 입에 넣고 우물거릴 때,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을 방해받은 황제는 기분 나쁜 티를 냈지만 권력자란 편히 쉴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시종을 물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정식 알현 시간이 아닌, 이 한밤중에 그의 휴식을 방해하러 올 수 있는 인물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수였다. 분명 평범한 사안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황제는 자신의 침실과 연결된 접객실에 홀로 들어갔다.
‘……?’
짧게 깎은 금발 머리에 시린 가을 하늘빛 눈을 한 남자는 그의 측근 중 그 누구도 아니었다.
황제는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
자신이 화살받이용 황태자로 내세운,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바보였다.
애인과 함께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슬슬 그다음 허수아비로 내세울 후보를 정하던 차였다. 지금 보니, 도망친 게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기 위한 연극이었던 모양이었다.
“누가 여기까지 오는 걸…….”
황제는 질문을 위해 입을 열려다 닫아 버렸다. 어차피 자신이 말해 보았자 대답도 못 할 터. 의사소통은 같은 사람끼리나 할 수 있지, 말 못하는 짐승에게 시도해 보았자 시간낭비인 법이다.
이 바보를 여기까지 들여보낸 사람이나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황제는 뒤로 돌아섰다.
“돌아가라. 무엇 때문에 왔든 간에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다고 했으니,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때, 미카엘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제는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들도 아닌, 허수아비에 불과한 황태자에게 신경을 쓰는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네 정녕 팔다리가 부러진 채 실려 나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호위병을 부르겠다.”
바로 그때.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얼굴에 황제가 무척이나 잘 아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이던 자신의 얼굴에 떠올랐던 섬뜩한 미소가.
“전부 죽었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