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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150)

60화

황제는 불붙은 석탄처럼 맹렬한 눈길로 미카엘을 쏘아보았다.

“여태까지 나를 우롱했느냐?”

“…….”

미카엘은 대답 대신 황제를 서서히 접객실 안으로 몰았다.

하지만 황제도 무방비하게 서 있지만은 않았다.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 황제가 얼마나 많은가.

그는 미카엘이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로 그 순간, 문에 설치된 장치를 가동해 황궁의 전 기사들을 자신의 방으로 몰려오게 만들었다.

호위병 한 부대 정도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황궁 전체에 촘촘하게 펼쳐진 기사단들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게 가능하다면 진작 자신의 목은 잘려 나갔을 것이다.

황제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10분? 아니, 5분이면 충분하다.’

그 정도는 말놀음 몇 번으로 충분히 끌 수 있으리라.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미카엘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단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능숙하게 상황을 끌어 나가는 미카엘의 모습에서 수십 년 전 자신을 떠올렸다.

‘내 이럴 걸 걱정하여 가장 피가 옅은 놈으로 앉혔더니.’

두 마리 범이 한곳에 살 수는 없다. 황제는 유능한 자식을 황태자 자리에 앉혔다가는 자신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에게 살해당할까 봐 두려워했다.

실제로 2황자는 형이 죽자마자 아버지를 독살하여 자신이 황위에 앉을 계획을 꾸몄다.

다행스럽게도, 그 전에 발각되어 되레 본인이 독살당했지만.

그래서 황제는 일부러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를 바보로 키웠다. 그가 미카엘의 보육을 위해 특별히 골라 보낸 용병들은 어린아이에 대한 정서적 학대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결과, 미카엘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옹알이를 하는 백치로 자라났다.

그 소녀가 나타나기 전까진.

입맛이 썼다. 황제는 몇 번이나 그 계집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

그 소녀만 아니었다면, 미카엘은 자신의 계획대로 누구와도 교류를 하지 못해 평생을 바보로 살아갔으리라. 아무리 호르헤가 발버둥 쳐 봤자 소통도 못 하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걸린 격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황제는 그 귀찮은 계집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다.

“양인 줄 알고 길렀더니, 범이었구나.”

“…….”

“이제 다시 벙어리인 척하기로 한 게냐?”

“길러진 적이 없으니, 대답할 이유를 못 찾았을 뿐입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황제는 미카엘의 번뜩이는 안광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저 눈빛.’

황제가 그동안 미카엘을 무시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잠시 눈길을 줄 때마다 미카엘은 자신을 저 번뜩이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황제는 그 눈빛이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단순한 원한에서 비롯된 치기 어린 감정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를 원망하느냐?”

“원망하지 않습니다. 단지, 폐하의 자리가 필요하여 조금 일찍 받아 놓으려 합니다.”

미카엘은 황제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더니, 주머니에서 보라색 액체가 반절 들어 있는 크리스털 약병을 꺼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저 독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던 바로 그 독이었기에.

온몸이 뒤틀릴 정도로 고통스러우나, 피엔 그 어떤 독의 흔적도 남지 않으며 죽은 자의 모습은 심장마비를 겪은 자와 비슷했다.

“철저한 조사 하나만큼은 칭찬해 주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즉위를 축하한다.”

황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미 5분이 지났다.

아직도 그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점은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모든 게 저놈에게 넘어갔거나, 아니면 정말로 전 황궁을 피바다로 만들었거나.’

만약 전자라면 희대의 성군이 될 것이오, 후자라면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폭군이 되리라.

“하지만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

처음으로 당황한 미카엘이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그 찰나의 순간, 황제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어 심장이 쿵쾅거리는 가슴팍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강렬한 고통과 미카엘의 계획을 망가뜨렸다는 희열이 교차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흔적이 남지 않는 독으로 살해했기 때문에 별다른 오명 없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인 자신이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는다면?

그의 뒤를 이은 미카엘은 아무리 증거를 조작한다 한들 선황을 시해했다는 소문을 잠재울 수 없으리라.

황제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고통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너도… 결국은 네 업보를 돌려받을 것…이다.”

황제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침묵이 방 안을 지배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 * *

타는 냄새가 났다.

레티시아는 콜록대며 몸을 뒤틀었다.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자면서 보냈기에 자신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미카엘이 깨우면 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가, 가벼운 말 한두 마디를 나누다 다시 잠이 드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불……?’

레티시아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가만히 있다면 질식해 죽고 말 것이다. 연기를 피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때, 미카엘의 단단한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

레티시아 얼굴이 안도감으로 풀어졌다. 미카엘이 어디론가 간 사이에 자신이 있는 방에 불이 났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 경우는 아닌 모양이었다.

“…카일, 도련님.”

레티시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전처럼 미카엘이라고 부른 것도 그날 단 하루뿐. 그 뒤 레티시아는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미카엘을 꼬박꼬박 카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레티시아.”

“티스베…라니까요.”

비록 미카엘은 최근 들어 그녀를 레티시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때마다 레티시아는 그의 말을 고쳐 주었다.

“불… 불이 난 건가요?”

“강.”

“아, 안전하군요. 다행이에요.”

레티시아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미카엘이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연기가 좀 괴롭긴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일어나서 그녀 스스로 상황을 살피기에는 흑목병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팠…….

‘……?’

레티시아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머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멀쩡했다.

항상 두개골을 조각내 버릴 기세로 그녀를 괴롭혔던 두통도, 가쁘게 숨을 내쉬어야 했던 가슴 통증도 사라졌다. 열도 완전히 내렸는지 몸이 오래간만에 가뿐하게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항상 가물거렸던 시야에 또렷한 세상이 들어왔다.

‘꽃밭……?’

수정을 빚어 만든 것처럼 일렁이는 꽃들이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왜인지 서러움이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레티시아는 결코 미관을 중요시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다.

“도련님, 여긴 어딘가요? 왜 저희가 여기에 있는 거죠?”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무심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가, 소스라치고 말았다. 그의 상의 전체가 피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카엘에게선 험난한 전투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죽음의 냄새가 났다.

‘추적자야.’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추적자들이 마침내 그들을 찾아낸 게 틀림없었다.

불 역시 그들이 질렀으리라.

“모두… 죽은 건가요?”

“목.”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이 사람의 목을 벴다는 건 그리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추적자가 그들을 향해 덤벼드는 것보다야 나았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꽉 끌어안았다. 진득한 피 냄새가 확 끼쳐 왔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추적자들을 죽인 미카엘이 더 힘들 것이다.

그때였다.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건.

그제야 레티시아는 그들이 어느 벌판이 아닌, 건물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레티시아의 입이 벌어졌다.

“여기가 대체 어디죠?”

미카엘은 대답하기는커녕 그녀를 억지로 잡아끌며 빠르게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이젠 몸이 아프지 않았으니 저항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레티시아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금방 그들은 좁다란 통로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통로였지만, 동시에 눈에 익은 모양새기도 했다.

‘황궁이야!’

충격도 잠시, 레티시아는 통로 안으로 밀쳐졌다. 미카엘 역시 그녀를 뒤따라왔다.

“왜… 왜…….”

레티시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릴 때였다. 그들이 방금 들어온 입구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완연한 어둠이 그들을 짓눌렀다.

“…카일, 도련님…….”

레티시아의 입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저희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왜… 왜…… 황궁으로 저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그리고 그 피는…….”

“…….”

미카엘은 한참을 침묵하다,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자.”

황실의 상징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레티시아는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그녀가 미카엘의 간호만 받으며 누워 있는 사이에 세상은 여러 번 뒤집힌 것이다.

미카엘이 반역을 일으켰다. 이제 그가 데브란트 제국의 황제였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아무리 황궁을 떠나려고 발버둥 쳐 보아도 미카엘의 간절한 말 한마디, 애절한 눈빛 한 번이면 결국 그의 곁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여태까지 계속 그래 왔듯이.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원망의 말을 퍼붓거나 해명을 요구하는 대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조그만 가게를 차릴 꿈에 부풀어 있던 티스베도, 함께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겠다고 약속했던 카일도 모두 허망한 거품이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티스베와 카일은 끝났다.

그리고, 그녀와 미카엘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역시 사라져 버렸다.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 * *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한 달가량의 국상을 치르고,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날 데브란트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역대 가장 어린 황제인 데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백치라는 소문이 만연했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우습게 보았다.

하지만 즉위 직후부터 새로운 황제가 일으킨 피바람에 비웃음은 곧 공포의 비명으로 바뀌었다.

단 2년.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단 2년 만에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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