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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1/150)

61화

Chapter 8. 진실 혹은 거짓

“레티시아 님, 비스크 시에서 올라온 보고서입니다.”

레티시아의 보좌관, 파라든은 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에서 빨간 라벨을 붙인 보고서를 빼내었다.

파라든은 그녀의 밑에서 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이곳을 거쳐 간 보좌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최소한 레티시아보다야 배운 게 많고 집안 또한 잘났던 전 보좌관들은 그녀를 무시하기 일쑤였기에 한 달이 멀다 하고 바뀌곤 했다.

파라든도 학력과 집안이 이전 보좌관들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레티시아를 깍듯이 대우했다.

그 덕에 여태껏 레티시아 밑에서 일한 보좌관 중 가장 오래 버티고 있었다.

“샤프티에선 아직 안 왔나요?”

“네. 비둘기만 도착했는데, 폭우로 인해 다리가 수몰되어 재건할 때까지 발이 묶였다고 합니다.”

“알겠어요.”

레티시아는 자신의 보좌관, 파라든이 건네주는 보고서들을 빠르게 훑었다.

최근 들어 미카엘의 말들은 더욱더 생뚱맞아졌기 때문에 보고서의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하지 않으면 소통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레티시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골치 아프겠는데…….’

지방 소도시들의 보고는 크게 특이한 점이 없었다. 문제는 대륙 전역에 퍼진 정보원들이 수집해 보내 온 첩보들이었다.

“레티시아 님, 차 한잔 드세요.”

“고마워요, 애슐리.”

레티시아는 2년 전, 미카엘의 즉위와 함께 그녀의 전속 하녀가 된 애슐리에게서 찻잔을 건네받았다.

황태자의 비서에서 황제의 비서가 된 레티시아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바로 애슐리였다.

애슐리는 처음에는 황궁으로 복귀하지 않으려 했지만, 레티시아가 몇 년만 있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금세 승낙했다. 물론 레티시아가 제시한 막대한 액수의 연봉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찻잎을 가득 집어넣고 오래 우려낸 차에선 탕약에 가까운 쓴맛이 확 올라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너무한 맛이었지만 별수 있나, 자신의 일과는 차의 각성 효과 없이는 도저히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귀족들은 물론 애슐리를 제외한 사용인들마저 그녀의 뒤에서 역시 평민이라며 수군거린다는 건 알았지만, 레티시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레티시아가 수군거림을 의식했다면 진작 이 모든 걸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한 8년쯤 전에.

‘미카엘은 오늘도 늦게 일어나려나……. 게으름뱅이 같으니.’

레티시아는 다른 사람들이 알면 경을 칠 생각을 하며 하품했다. 미카엘은 즉위한 이후 늦잠을 자주 자곤 했는데, 레티시아에게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미카엘의 기상은 곧, 레티시아의 기나긴 업무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의미했으니까.

찻잔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레티시아는 모든 보고서의 검토를 마치고 내려놓았다. 미카엘의 사고가 엉뚱한 곳으로 튈 구석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오늘만큼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했으니.

눈치 빠른 애슐리가 레티시아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차를 한 잔 더 끓여 왔다. 레티시아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진한 홍차 향기가 머릿속에 박히는 듯했다.

‘오늘이야, 레티시아 우즈.’

오늘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말할 것이다. 그만두겠다고. 그 어떤 말로 붙잡아도 소용없다고. 영영 너를 떠나겠다고…….

‘어떻게… 반응하려나.’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2년, 그녀는 단 한 번도 미카엘에게 사의를 내색한 적이 없었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의 사형 선고를 그녀의 입으로 내려야 했을 때에도 레티시아는 밤잠만 좀 설치고 말았다.

간혹 미카엘은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운을 뗐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다. 레티시아는 그것이 그 나름의 사과의 표시라는 건 알았다.

예전에, 미카엘이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사과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라고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다.

바로 그렇기에, 레티시아도 이제는 미카엘을 떠날 수 있었다.

한때 그녀는 자신이 영원히 미카엘을 떠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설령 황궁은 떠나더라도 미카엘은 떠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미카엘은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가 되었다. 아마, 역사서엔 폭군으로 기록되리라.

가끔 레티시아는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시절, 미카엘이 결코 폭군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자신을 떠올리며 씁쓸해하곤 했다.

미카엘은 어디 보나 전생에 읽은 소설 속 폭군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 속 미카엘의 곁엔 호르헤 경이, 지금 미카엘의 곁엔 레티시아가 있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에 묘사된 수준의 살육귀는 아니라는 점 정도였다.

미카엘은 자신의 황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려는 사람 외에는 죽이지 않았다. 황제를 죽이기 위해 황궁에 잠입했을 때도 전 황궁의 기사와 호위병을 수면제를 이용해 잠만 재웠을 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 덕에 미카엘이 황제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피에 젖은 그를 보았던 레티시아뿐이었다. 황제의 시신은 갑작스러운 광증에 따른 자살로 처리되었다. 남이 찔러선 결코 나올 수가 없는 각도로 칼이 가슴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보고를 믿을 수 없었다. 검에 능한 미카엘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꾸며 낼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꾸며 낼 수 없다고 해도, 검시관 하나 매수 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제국의 황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미카엘의 황권을 위협하는 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아직도 상당수는 살아 숨 쉬며 미카엘의 자리를 차지할 틈만 노렸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레티시아는 이런 상황에서 미카엘을 결코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2년 전, 그저 미카엘의 비서로만 머물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았던 레티시아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미카엘의 하루 일과가 끝난 다음에야 궁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으므로 평범한 가게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사장이 황태자의 비서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레티시아에겐 대리인이 필요했다.

적절한 대리인을 찾아낸 레티시아는 구상하던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일반 가정의 빨래와 청소를 대신해 주는 사업이었다.

레티시아는 개인 하녀를 쓸 정도로 사정이 좋지는 않지만, 스스로 빨래와 청소를 제대로 할 여유가 되지 않는 집들을 많이 봐 왔다.

직원들 역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귀족의 저택보다 더 좋은 급료와 근무 시간, 숙소를 제시하니 실력 있는 하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니까.

사업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하녀들뿐만 아니라 회계와 영업을 담당할 직원들도 여럿 뽑아야 했는데, 레티시아는 그들도 되도록이면 하녀 경력이 있는 자들로 뽑았다. 업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들이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레티시아의 사업체 ‘두카트’는 수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레티시아는 차를 홀짝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줄은 그녀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전용 금고에 산처럼 쌓인 금화를 떠올리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젠 그걸 쓸 때가 왔어.’

레티시아가 일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는 두카트가 이중생활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리인은 정말 유능한 사람이었고, 레티시아 역시 밤잠을 쪼개 가며 일했기 때문에 향후 10년 정도는 이중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레티시아는 두카트로 돈을 버는 동시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었다.

바로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이었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도 그녀는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했으며, 지금 해야 할 말은 조금 전 그녀가 한 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망설여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폐하.”

“……?”

미카엘이 바로 몸을 돌렸다. 이 모습을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탓인지, 청록빛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게 반짝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몇 번씩 되뇌었다. 이제 반드시 그녀가 미카엘의 곁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미카엘이 역시 그녀 없이도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오히려 이렇게나 강력한 황제에게 그녀가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야말로 지나친 과대망상이라고.

그녀가 미카엘을 떠나는 게 둘 모두에게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고…….

가까스로 마음의 준비가 된 레티시아는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레티시아는 침묵 속에서 말하라는 뜻을 읽어 냈다.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준비한 말을 읊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갑작스레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올해 안에 사직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조속히 후보들을 물색하여 적임자를 뽑아야……!”

레티시아의 말이 급하게 끊어졌다. 미카엘이 그녀의 허리께를 감싸 안듯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탓이었다.

“폐, 폐하?”

레티시아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예상한 그 어떤 반응에도 미카엘의 지금과 같은 행동은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 순간, 미카엘은 그녀를 황궁의 비밀 공간으로 끌어당겼다.

간신히 평정을 찾은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찬찬히 살피려는 찰나, 귓가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부탁이야, 레티시아.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

레티시아의 금안이 커지더니 혼란에 잠식되어 사정없이 흔들렸다.

미카엘이 말을 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이해가 될, 제대로 된 말, 제대로 된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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