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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50)

62화

지난 10년 동안 고생했던 세월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언제? 언제부터?’

눈앞이 아득해졌다. 최근 들어 미카엘이 유난히 아리송하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과의 의사소통이 더 힘들어질까 봐 걱정하기만 했지, 멀쩡히 말할 수 있음에도 모두에게 숨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2년은 더 되었을 거야.’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흑목병에 시달려 말을 대신 전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왔다.

레티시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즉위식 이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쏟아졌기 때문에 진실을 캐낼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엔…….’

레티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미카엘이 짤막한 음절이 아닌, 제스처를 처음으로 사용한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날따라 레티시아는 유독 미카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통.”

“아, 음식을 가지고 오라고 얘기할게요. 뭘 드시겠어요?”

“통!”

“아… 죄송해요. 어디 불편하신 거구나. 어디가 아프세요?”

“통.”

“신발, 신발이 불편하세요?”

무의미한 대화는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이 정도쯤 되니 레티시아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오늘 피곤해서… 전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양손을 깍지 껴 그물망 모양을 만든 다음, 레티시아를 향해 보여 주었다.

‘……!’

레티시아는 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얼마 전 황태자 궁엔 일주일에 한 번씩 조달되는 물자가 들어왔다. 다양한 물품들이 포함된 물자는 분류한다면 격자와 같은 모양새가 될 것이다.

미카엘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 깍지 낀 손으로 물자를 표현했다. 아마도 통은 물자가 들어 있는 궤짝을 의미할 것이다. 즉, 미카엘은 물자를 직접 확인하러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전하…….”

레티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미카엘을 불렀다. 지금 물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카엘은 남들이 흔히 하는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정도의 제스처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미카엘은 제스처를 사용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목이 꽉 막혀 왔다. 레티시아는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앞으로 미카엘은 몇 년 이내에 자유자재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생에 읽은 소설 속 폭군 미카엘이 그랬듯이.

옛 기억을 되짚어 본 레티시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미카엘을 쏘아보았다. 미카엘은 그녀의 시선을 살짝 피했지만, 그렇다고 레티시아를 품에서 풀어 주지도 않았다.

레티시아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살짝 비틀었다.

바로 그때.

미카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레티시아는 놀라 움직일 생각을 못 한 채 그대로 굳었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부서졌다.

“미안하다.”

“…….”

“이렇게라도 널, 붙잡고 싶었어.”

변명도 해명도 아닌, 고해에 가까운 읊조림이었다.

* * *

쾅!

레티시아는 자신의 침실 문을 세차게 닫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미카엘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은 미카엘의 평범한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삽시간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은 레티시아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버거웠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도망쳤다. 미카엘이 없는 곳에서, 천천히 생각해 볼 시간이 정말 절실했기에.

‘말도 안 돼!’

미카엘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벼락이었다면, 지금은 한 박자 늦은 해일이 몰려왔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거의 다 싸 놓은 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벌써부터 짐을 챙길 필요는 없었다. 레티시아가 비서를 그만둔다고 해서 궁에서 바로 내쫓을 만큼 미카엘이 모진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에게 황궁에서 완전히 벗어날 준비를 하는 건 일종의 의식이었다. 미카엘을 이 황궁에 내버려 둘 마음을 다지기 위한.

‘…….’

입이 바싹 말랐다. 만약 미카엘이 저렇게 말을 멀쩡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바로 떠나 버렸어야 했어.’

레티시아는 ‘그날’을 떠올렸다.

미카엘이 자신을 안고 황궁으로 돌아온 바로 그날. 그녀는 결국 미카엘이 원한 게 초라한 도망자의 삶이 아닌, 황제로서 군림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런데도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떠날 수 없었다.

미카엘에게는 레티시아 우즈가 필요했으니까.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니.’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이 상황에서 미카엘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 보았던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왜… 왜.’

우습게도,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왜 여태까지 모두의 앞에서 연극했는지는 이해했다.

레티시아 우즈 없이는 타인과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는 건, 커다란 약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했다.

미카엘이 즉위할 때, 황권을 노리던 숱한 자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레티시아를 통해서만 미카엘과 대화할 수 있었다.

음습한 계략에 듣는 귀가 한 쌍 더 늘어서 좋을 게 없다. 레티시아의 존재 하나만으로 상당수가 미카엘에게 접근하려는 계획을 접었다.

몇몇은 레티시아를 회유하거나 협박했는데, 자신이 겨우 그 정도에 넘어갈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조차 말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입맛이 썼다. 그 이유 역시 레티시아가 모르지는 않아서였다.

‘내가, 배신할까 싶어서…….’

눈물 한 방울이 레티시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배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카엘이 그녀를 배신했으면 배신했지.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커 왔는지 봐 왔으니까. 그녀를 만나기 전, 미카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노와 배신감이 목구멍까지 꽉 차올랐지만, 이대로 황궁을 떠나 버릴 수는 없었다.

‘왜 그랬는지 들어야겠어. 비록, 그동안 내게 해 온 것처럼 속이려고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들어야겠어.’

미카엘은 정원에 있었다.

석양이 하늘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기에, 조금만 더 늦게 레티시아가 그를 찾았다간 어둠 속을 헤치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미카엘은 등 뒤로 다가오는 레티시아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 역시 미카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널찍한 등을 마주한 채 조용히 물었다.

“언제부터였어요?”

“…….”

“그레이엄 후작님이 떠나기 전이었어요, 후였어요?”

미카엘이 천천히 돌아서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한, 8년쯤 되었다.”

“…….”

레티시아는 정말로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좋은 음식들만 먹으면서 명의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서 그런지 자신의 몸은 쓸데없이 가뿐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정신을 잃는 대신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10년간 전 제국을 바보로 만드셨어!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왜, 왜, 왜 제겐……!”

레티시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삐 몰아쉬었다. 미카엘은 마치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것처럼 손을 올렸다가, 레티시아가 가시 돋친 시선으로 쏘아보자 바로 팔을 내렸다.

“레티시아, 나는…….”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말을 계속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뭐,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요? 거참, 안됐네요. 이제는 제가 폐하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당장 오늘 짐 싸서 떠날게요! 내일부터 회의도 혼자 주재하시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레티시아의 얼굴이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화가 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녀의 흥분이 겨우 가라앉았을 때에야 미카엘의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너무… 너무 두려웠어.”

“제가, 폐하를 배신할까 봐요?”

추측을 내뱉는 레티시아의 목소리는 어느덧 떨리고 있었다. 미카엘이 지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을 그렇게 믿지 못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미카엘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엘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녀는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럼 말해 주세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널 내 곁에 둘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이었냐고 소리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겨우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레티시아 자신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년 전, 미카엘이 레티시아가 아닌 황위를 택했듯 지금은 레티시아가 미카엘이 아닌 자신의 삶을 택할 때였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숨을 고른 다음 입을 열었다.

“2년 전, 이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전 폐하께서 제게 그 무슨 거짓말을 하셨든 곁에 남았을 거예요.”

“…….”

“하지만 폐하께선 여기… 이 제국을 선택하셨죠.”

“…….”

“폐하, 지난 10년간…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보낸 세월을, 조금이라도 미안하게 생각하신다면…….”

목이 메었다. 레티시아는 붉어지는 눈시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레티시아가 항상 의중을 읽어 내렸던 열대 바다 같은 눈에는, 더는 읽을 수 없는 감정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를 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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