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50)

63화

미카엘의 잘생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알겠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서운한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오로지 서글픔만이 느껴질 뿐. 레티시아는 의외의 반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카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넌 내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고… 지금이 떠날 적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미련 따윈 남기지 말고 떠나라.”

“…….”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은 채, 조용히 미카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만약 미카엘이 그녀를 붙잡았다면, 자신은 크게 욕을 퍼붓고 돌아섰을 것이다. 다시는 황궁 쪽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하지만 미카엘은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레티시아를 더는 붙잡아선 안 된다고 되새기는 것처럼.

‘정신 차려, 레티시아 우즈.’

레티시아는 여태까지 자신이 미카엘의 곁에 머물며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이제 미카엘과 상관없는 삶을 살 거야.’

이 순간만 버텨 낸다면, 그간 앞장서서 감당해야 살육도 고문도 암투도 자신과 거리가 먼 일이 되리라.

미카엘은 몇 차례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나도… 네게 평생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언제 말씀하실 생각이셨어요?”

“우리가 안전해지면.”

“다 늙어서야 폐하의 고백을 들을 수 있었겠군요. 그때까지 저희가 살아 있긴 하다면 말이죠.”

레티시아는 조금 기가 막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미카엘은 정말로 그들이 안전해질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레티시아라면 몰라도, 미카엘이 안전해지는 건 제국 내 귀족의 씨를 모조리 말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보단 더 빨리 오리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수도 없이 상상했다. 네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날을…….”

미카엘은 나무에 기대서서 어느덧 어슴푸레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상상 속의 너는… 화를 내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고, 뛰쳐나가기도 했지. 그래서 네가 그 어떤 반응을 보이든 대답할 수 있었어.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미카엘은 자신을 10년 동안이나 속여 왔다. 당연히 원망해야만 했다. 하지만 저녁 어스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미카엘이, 화를 퍼붓기에는 너무나 고독해 보였다

“후임자를 구하는 게 어렵기야 하겠지만, 구색만 대충 맞추면 될 테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레티시아는 애써 담담한 척하는 미카엘의 목소리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와서 이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미카엘의 곁에 번역기로서 남게 된다면, 무의미한 연극을 반복하는 데 지쳐서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후임자를 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일할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럴 필요 없다.”

“…네?”

“내일부터 회의는 중지다. 네 필체는 손에 익혀 두었으니까, 당분간은 서찰을 통해서만 일하면 돼.”

“그 말은…….”

“그래,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화나셨어요?”

미카엘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널 위해서야.”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저 때문에 폐하께서 괜한 고생을 하시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레티시아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여태까지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자신은 곧 황궁을 나간다.

미카엘은 그녀에게 황제라기보단 손이 많이 가는 가족이자 친구에 가까웠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감정이 상한 상태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야말로 과분한 배려를 받아서 고맙지. 하지만 널 위해서, 더는 일하지 않는 게 옳아.”

“네……?”

“이제 내 말을 해석하는 게 예전처럼 쉽지가 않을 테니까.”

“……!”

레티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듣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그녀는 이제 미카엘의 비밀을 알아 버렸다. 표정, 안색, 제스처 하나하나에 노심초사하며 사고 과정을 따라가려 애쓰던 자신은 그가 제대로 말을 하는 순간만을 기다릴 것이다.

즉, 레티시아 우즈는 그 누구보다도 미카엘의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되는 자였다. 알게 되는 순간, 유일한 이용 가치가 사라져 버리기에.

바로 지금처럼.

미카엘은 단지 레티시아를 곁에 두고 싶은 욕심에서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숨긴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진실을 일찍 알았더라면, 레티시아는 설령 미카엘을 떠나고 싶지 않았더라도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미처 마음 정리가 되기도 전에.

‘그럼 내가 사의를 밝히자마자 미카엘이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한 건…….’

레티시아는 눈을 문질렀다. 머리가 아파 왔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폐하께선 절 놓아주려고 하셨군요.”

무척이나 익숙한 침묵이 흘렀다.

동의를 의미하는 침묵이.

“후임자… 후임자를 최대한 빨리 뽑아야겠어요.”

레티시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방금 받은 충격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전적으로 네게 맡기겠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이제 폐하와 온종일 같이 지낼 사람인데, 혹여 안 맞는 사람을 뽑기라도 하면…….”

“그럴 리가 없잖나.”

“그럴 리 있어요. 마치, 폐하께서 저를 10년 동안이나 속여 오셨던 것처럼.”

“…….”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지라도 알려 주세요. 사람은 제가 뽑더라도, 기준은 있어야죠.”

“…….”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저만 한 사람은 없겠지요. 저도 알아요. 그 누가 10년을 대신하나요?”

그동안 미카엘에게 속아 왔지만, 10년 동안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곁에서 지켜본 모든 것들이 거짓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그 모든 일과를 시시콜콜하게 다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폐하의 취향이 중요해요. 일단 곁에 있을 때, 거슬리지는 않는 사람이어야 할 테니까……. 명색이 폐하의 비서잖아요.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통역사지.”

미카엘이 레티시아의 말을 정정했다.

“통역사요?”

“그래, 통역사.”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통역사라니, 그 무슨 해괴망측한 호칭이란 말인가.

“제 후임자가 비서가 아닌, 통역사라고요?”

“무슨 문제가 있나?”

“통역사는… 폐하께서 마치 외국인처럼 느껴지잖아요. 아니, 외국인도 아니지. 대륙 밖 사람인 것처럼…….”

대륙은 모두 공용어를 썼다.

따라서 통역사가 필요한 경우는 대륙 바깥, 바다에 떠다니며 사는 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야만적이었으며 피와 폭력이 아닌 수단을 몰랐다.

“상관없다.”

“너무 옛날 일이긴 하지만, 폐하께서 정하신 직책이잖아요. 제 후임자도 당연히 비서로 불려야죠.”

미카엘은 대답 대신,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조용히 그의 뒤를 쫓았다. 여태껏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 미로 정원은 한 가지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한 자리에 머무르며 한 대화는 결코 그 공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지만, 장소를 이동하던 중의 대화는 새어 나갈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폐하…….”

레티시아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더는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만약 궁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엿듣는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한 비밀 공간이 아닌 다음에야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것이다. 레티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미카엘과 대화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을 더 많이,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지난 10년간의 세월에 미카엘의 발화라는 색채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동안 황제의 버팀목 같은 거창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 자신 덕에 미카엘이 고독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가.

마침내 미카엘은 한 장소에 멈춰 섰다. 검붉은 무늬가 있는 하얀 꽃이 한 아름 피어 있었다. 그제야 레티시아는 왜 미카엘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깨달았다.

스키잔드라.

재회의 꽃.

레티시아가, 어렸던 미카엘에게 처음으로 붙들리고 만 바로 그날 보았던 꽃이었다.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저녁 어스름 밑에서, 스키잔드라를 등지고 선 미카엘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지만 하루 이틀 본 얼굴이 아니었기에 레티시아는 무덤덤하게 그를 응시했다.

동시에 그녀는 여태까지 책처럼 읽어 내렸던 미카엘의 얼굴에서 의중을 파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미카엘의 말이 맞았어. 난 더는 예전처럼 해석할 수가 없어.’

자신의 유일한 능력이 사라졌다는 건 꽤나 슬픈 일이었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는 능력이니 슬퍼할 필요도 없었다.

“레티시아.”

마침내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살짝 긴장한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10년 동안 정말 고마웠다. 네가 해 준 것들을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 알아줬으면 한다.”

스키잔드라의 화려한 내음이 가을바람에 실려 레티시아를 감쌌다.

“내 비서는 영원히 너 하나뿐이다. 다른 누구도 네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없어.”

레티시아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감히 입을 열었다간, 영원히 미카엘의 곁에 머무를 것 같았기에.

* * *

황제의 새로운 비서를 구하는 공고는 일주일 동안 제국 전역에 휘날렸다.

공고는 ‘통역사’라는 직책에 적합한 적임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지만, 모두가 그 직책이 황제의 유일한 비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수많은 지원자가 구름처럼 심사장에 몰려들었다.

지원 자격은 단 하나였다.

황제와 10분간 대화를 이어 갈 자신이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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