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제국 아카데미에는 평소에 거의 쓰이지 않는 거대한 홀이 존재했다. 먼 옛날, 용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홀은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지나치게 큰 규모 탓에 10년에 한 번쯤 쓰일까 말까 한 홀이 오늘만큼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모두 황제의 통역사가 되기 위해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암살자를 막기 위한 기본적인 신분 검사와 몸수색에서 100여 명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 수가 새 발의 피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심사장을 가득 메웠다.
눈을 감은 채 남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 바싹 얼어 눈알만 굴리는 사람, 애써 주변인과 크게 떠드는 사람…….
행태는 달랐지만 모두가 황제의 통역사로 뽑히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마침내 심사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벌 떼처럼 웅성거리던 지원자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잘 차려입은 시종들이 지원자들에게 백지와 펜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잠시나마 조용하던 심사장은 곧바로 소란스러워졌다.
“뭘 하라는 거지?”
“여기다 자기소개서라도 쓰라는 건가?”
“바보야, 당연히 폐하를 찬양하는 글을 써야겠지!”
소란은 레티시아가 심사장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센 반응이 기다릴 뿐이었다.
모든 지원자들이 그녀를 대놓고 빤히 쳐다보았다. 일개 남작의 방계 신분을 빌려서야 겨우 입궁할 수 있었던 천하디천한 평민, 10년 동안 황제의 곁을 지킨 비서, 그 어렵다는 황제의 말을 현재로선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황제의 비서로서 누리는 그 모든 부와 권력을 거부하고 은퇴하려는 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레티시아가 현재 누리는 것들을 바라며 모집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엔 질투와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레티시아는 시험장의 정중앙에 선 이후 드넓은 심사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왔다.
당연히 돈보다는 그간 쌓인 정 때문에 미카엘의 곁에 남아 있었던 레티시아만큼 그를 위해 노력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알았다.
미카엘에겐 애초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걸.
그에게 필요한 건 전심전력을 다해 의사 전달을 도울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 채 연기에 휘둘리면 그걸로 족한 체스 말이라는 사실을.
“폐하께서 내리신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레티시아는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또박또박 읽었다.
“다음 단어들을 들었을 때, 가능한 해석을 각각 열 가지씩 써 주십시오. 단어는 네 가지고, 해석은 열 가지씩 써야 하니 총 마흔 가지를 써야 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조약돌, 포도, 물, 의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어이가 없어 허탈해하는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예상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기이한 화법은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한 가지 단어로 열 개도 넘는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밀 축에도 들지 못했다.
당연히 이곳에 모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했을 터.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펜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 시간 후.
고풍스러운 방에서 반쯤 너부러진 레티시아와 미카엘 앞으로 산더미 같은 답지들이 도착했다.
레티시아는 곧바로 답지들을 검토하려고 했으나, 미카엘이 일어나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
“복숭아씨.”
레티시아는 조금 헤맨 다음에야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복숭아 씨앗은 크고 단단해 과육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카엘은 이 많은 답안을 자신 혼자 검토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비밀을 알게 된 지 열흘가량 흘렀지만, 둘은 말을 엿듣는 자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공간에서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곧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진실을 알기 전처럼 대화를 나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미카엘은 그런 그녀를 배려해 예전보다 한결 이해하기 쉬운 단어들로 말을 했지만, 레티시아는 종종 헛다리를 짚고 말았다.
“전부 혼자서 보시겠다고요? 가능하시겠어요? 아무래도 제가 돕는 게…….”
“내리막길.”
다행히 이번엔 레티시아가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미카엘의 방금 발언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미카엘 자신이 내리막길에서 굴러 내려가는 바퀴처럼 빠르게 답지를 보겠다는 의미와, 레티시아가 미카엘을 돕는 건 저절로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가는 바퀴를 미는 것처럼 부질없다는 의미였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째려보았다.
“멋대로 하세요. 저도 쉬고 싶었으니까, 폐하께서 사서 고생하신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어요.”
미카엘은 피식 웃더니 빠른 속도로 답안을 걸러 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미카엘의 손엔 100여 장의 답안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말없이 답지들을 레티시아에게로 건넸다.
레티시아는 제대로 다 본 게 맞는지 묻지 않았다. 미카엘의 일 처리를 의심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사흘 후.
첫 심사에서 한번 걸러진 200명의 지원자들은 잔뜩 긴장한 채 레티시아 우즈를 기다렸다.
떠들썩했던 첫 심사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문제가 쉬워 대다수가 통과했겠다는 예측과는 정반대로, 10퍼센트가 채 안 되는 지원자들만이 두 번째 심사에 올 자격을 얻었다.
자신이 반드시 뽑힐 거라고 자신만만해하던 자들이 대거 떨어졌기 때문에 판단 기준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중 무엇 하나 유력해 보이는 게 없었다.
그 말인즉슨, 오늘도 누가 통과하고 누가 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모두가 초조하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 황실의 시종이 크게 소리쳤다.
“모두 황제 폐하께 예를 차리십시오!”
“……!”
지원자들은 일제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본디 그들이 받은 통지에는 세 번째 심사가 바로 황제와의 면담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심사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의문이 떠다녔다. 그중 누구도 의문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숨죽여 황제의 움직임만 관찰할 뿐.
황궁에 발 한번 들이지 못한 평민과 하급 귀족이 지원자의 대부분이었기에 황제의 얼굴을 처음 보는 자들이 많았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자식들에게 얘기할 평생의 자랑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정중앙 의자에 앉은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나른한 눈으로 남은 지원자들을 샅샅이 훑었다.
예리한 시선에 앞자리에 서 있던 지원자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황제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는데도 벌써부터 속속들이 까 보여진 느낌이었다.
“체.”
황제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내뱉더니, 망토를 휘날리며 심사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 뭐지?”
용기 있는 누군가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지?”
“그냥 인사말일지도 몰라.”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났다.
황제도 황제의 비서도 들어오지 않자 지원자들은 각양각색의 의견을 제시하며 웅성거리기만 했다.
개중 도저히 견디지 못한 모양인지 심사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는 자들도 있었다.
남은 지원자들은 포기하는 자들을 비웃었는데, 그들은 레티시아 우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만 하다면 이곳에서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황제의 말이 떨어진 지 정확히 한 시간.
한 시종이 웅성거리는 심사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탈락하셨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예?”
“뭐라고?”
“장난치지 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온갖 항의가 터져 나왔지만 시종은 완고하게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탈락하셨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뭐 때문에 탈락한 거지? 이유도 듣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결국, 부유한 귀족이 참다못해 크게 소리쳤다. 시종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내신 문제를 풀지 못하셨으니까요.”
“뭐……?”
그제야 모두의 머릿속엔 불과 한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심사장을 나간 이들이 떠올랐다.
“그럼 나, 나간 사람들은 포기한 게 아니라……!”
“예.”
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께선 모두 합격하셨습니다. 체에서 걸러지신 분들이죠.”
심사장을 박차고 나온 이들은 모두 서른 명이었다. 레티시아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신분과 나이대가 다양하게 섞여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중 한 명쯤은 미카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
미카엘이 제시한 조건은 단 하나, 번역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자였기에 이 중 미카엘과 가장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가 새로운 비서가 될 것이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뭐라 하든 자신의 후임자는 비서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미카엘이 섭섭하고 두려운 마음에 자신은 통역사가 필요할 뿐이라고 고집을 부리곤 있지만, 실제로 후임자가 정해지고 난 이후 자신이 열심히 설득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레티시아는 심사장에서 가장 늦게 나온 순부터 호명했다.
“나탈리 램프.”
미카엘보다도 나이가 어린 10대 소녀는 의연하게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독실로 들어갔다. 레티시아는 당연히 면접 내내 지원자를 지켜보고 싶어 했지만, 이상하게도 미카엘은 자신 혼자 면접을 보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뽑게 해 주겠다는 약속과 다르지 않냐고 항의해 보아도 미카엘의 고집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저 고집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아야겠어.’
레티시아는 시간을 재기 위해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나탈리 램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을 뛰쳐나왔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탈리 램프의 기록은 31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