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49초, 1분 2초, 17초, 52초, 2분 12초…….’
레티시아는 기록지를 노려보았다. 그녀도 미카엘도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다. 미카엘의 연기에 장단만 맞춰 줄 정도면 되는데, 아무도 3분을 채 못 넘길 줄이야.
마침내 스물아홉 명이 모두 초라한 기록으로 떠나고, 단 한 명만이 남았다. 레티시아는 그녀를 별다른 기대 없이 들여보낸 다음,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3분……. 딱 3분만 넘기면 좋을 텐데.’
어차피 처음부터 미카엘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는 정도는 바라지도 않았다.
레티시아는 그저 미카엘에게 바로 쫓겨 나올 수준만 되지 않으면, 자신이 한 달 정도 정성껏 가르쳐 그럭저럭 비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뭔가.
거르고 걸러 낸 서른 명이나 되는 후보 중 미카엘과 담소를 3분 이상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
‘한 명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시간은 어느덧 3분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들어간 마지막 지원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베아트리체 매로프.’
나이는 스물일곱에, 몰락 귀족의 후예인 방랑 기사였다. 배경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방랑 기사라면 무예도 제법 쓸 만할 것이다. 암살 시도에 휘말리면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물론, 이미 3분을 넘긴 것만으로도 적임자였다. 레티시아는 베아트리체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장이라도 축하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미카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므로 일단은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
10분이 흘렀건만, 베아트리체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귀를 쫑긋 세웠다. 베아트리체와 미카엘 사이의 대화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방음이 잘되어 있는지 별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20분 후.
문이 열리고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당당하게 걸어 나오더니,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레티시아를 직시했다.
“제게 합격이라고 하시더군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그녀가 쉽게 읽어 낼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는데, 레티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베아트리체를 뽑으라는 말이었다.
“폐하의… 통역사가 된 걸 축하해요, 매로프 양.”
레티시아는 진심으로 베아트리체를 축하했다.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미카엘의 곁에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적임자가 나타나 주니 안심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베아트리체가 깍듯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최선을 다해 황제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레티시아는 베아트리체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신분 조사 등 여러 귀찮은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미카엘의 비서로 앉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처음부터 레티시아가 그만둔다는 걸 탐탁지 않아 했던 관료들이 길길이 날뛰었으므로 베아트리체는 엄격한 등용 절차를 밟게 되었다.
레티시아는 정작 자신은 별 검증 과정도 없이 미카엘의 비서가 되지 않았느냐고 해 보았지만, 오히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비교냐는 핀잔이 돌아올 뿐이었다.
“다들 걱정이 많아서 그러니,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그간 별별 일들이 많았거든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훨씬 더한 것들도 겪어 봤는걸요.”
베아트리체가 싱긋이 웃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교육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관료들은 물론 미카엘마저 베아트리체가 모든 검증을 다 통과한 다음에야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레티시아는 아직도 베아트리체에게 제대로 된 업무를 가르쳐 주지 못했다. 그 탓에 베아트리체는 아직 본성의 구조조차 파악하지 못해 길을 종종 잃곤 했다.
하지만 응원이야 자유 아닌가.
“딱히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긋지긋한 검증이 끝나면 제가 잘 말해 둘게요. 그 전까지는 제가 말하기가 좀…….”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만에 하나 베아트리체의 신분에 불분명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그녀에게 가지는 호감과는 별개로, 미카엘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원래 방랑 기사들은 의심을 잘 받기 마련이라서요. 익숙합니다.”
“정말요?”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에게 방랑 기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 그래서 기왕이면 베아트리체가 미카엘의 비서로 자리를 굳혔으면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베아트리체가 보인 반응은 쓴웃음이었다.
“누가 방랑 기사를 좋아하겠습니까? 더럽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실력이 특출한 것도 아닌데……. 저처럼 무엇 하나 잘난 게 없는 기사들이 방랑 기사가 됩니다.”
“그게 의심받을 이유는 되지 못해요. 그리고 매로프 양이 방랑 기사가 아니라 후작 가문의 영애였다 하더라도 다들 의심했을 거예요.”
“설마!”
이번엔 레티시아가 쓴웃음을 지을 차례였다.
“폐하껜 적이 많아요. 어떨 땐… 아무도 믿지 않으시는 것 같고요.”
“그거야 당연…….”
“네. 저도 이해하죠. 하지만 슬프긴 해요. 아무도 믿지 못하시는 폐하도,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도…….”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그 많은 사람은 믿지 못해도, 그녀 자신만큼은 믿는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후임자 앞에서 꺼낼 필요가 없는 얘기였다.
그녀는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냈다.
“방랑 기사로 일했으면 제국 곳곳은 다 다녔겠네요.”
“네. 국경도 여러 번 넘었어요. 제국에서만 검술을 익히면 한계가 있으니까요.”
레티시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베아트리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았다.
그녀와 미카엘이 자유를 목전에 두고 돌아온 곳.
“비트너 왕국이군요.”
“무예를 배우기엔 천국이었어요. 다른 면은 다 꽝이었지만……. 음식도 맛이 없고.”
“많이 배웠나요?”
레티시아는 비트너 왕국에 반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삶을 베아트리체가 살다가 왔으니까.
“그럼요. 좋은 스승도 만났고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지금도 그분과 연락하나요?”
“아뇨.”
베아트리체가 사뭇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도 몰라서요. 비트너 왕국은 그리 정세가 안정된 편은 아니어서…….”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트너 왕국의 검술이 괜히 발달한 게 아니었다. 데브란트 제국의 황위 다툼이 권모술수와 암살이 주류였다면, 비트너 왕국의 왕권은 각 귀족들 사이의 숱한 무력 분쟁을 통해 주인이 정해졌다.
“매로프 양의 스승이 될 정도로 실력 있으신 분이니 어디서든 잘 살고 계실 거예요.”
“하기야, 제 코가 석자인데. 스승님이야 굳이 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사시겠죠.”
베아트리체는 실없이 웃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가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을 날이 올까요?”
“글쎄요…….”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미카엘이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둘뿐, 레티시아와 호르헤 경뿐이었으니까.
미카엘은 즉위 이후 호르헤 경에게 기사 작위를 돌려주면서, 나라에 빈자리가 넘쳐나는 공작 위나 후작 위를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쉬고 싶다며 지방으로 행적을 감추어 버린 건 덤이었다.
크게 실망한 미카엘과 반대로 레티시아는 그 사실을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는데, 소설에서처럼 호르헤 경이 미카엘의 곁을 충성스레 지켰다간 암살당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레티시아도 미카엘의 곁을 떠난다.
과연 미카엘이 베아트리체에게, 설령 베아트리체가 아니더라도 그 어떤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야 더는 바랄 게 없겠지만, 지금으로선 어려워 보이는 게 현실이었다.
생각에 잠긴 레티시아의 얼굴을 베아트리체가 빤히 바라보다, 평이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레티시아 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일을 그만두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레티시아에게 왜 비서를 그만두는지 물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비서를 그만둘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으니까.
미카엘은 물론이고 관료들도 레티시아가 살벌한 황궁에서 지칠 대로 지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레티시아는 자신만의 자그마한 비밀을 굳이 숨겨야 할 필요가 없었다.
‘얘기해도 괜찮을까.’
레티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분명 베아트리체에겐 호감이 갔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그냥, 좀 쉬려고요. 너무 지쳤거든요.”
“그건 이유가 아니잖아요. 장기 휴가를 받으실 수도 있고……. 아마 폐하께서도 그걸 더 선호하실 텐데요.”
“뭐, 영원히 쉬고 싶어졌다고 해 두죠.”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눈에 힘을 주어 베아트리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의미였다.
베아트리체는 무안했는지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려면 제가 잘해야겠네요?”
“네. 그러니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 기회를 놓쳐 버리기 싫으니까요. 완벽한 모습을 보여 드릴게요.”
빈말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는 모든 검증 과정을 완벽하게 통과해서, 그 깐깐한 고위 관리들마저 입을 다물게 했으니까.
덕분에 레티시아는 베아트리체의 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미카엘의 곁에 머물면서 쌓은 모든 지식의 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