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레티시아는 오랫동안 무예만 갈고닦은 베아트리체가 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기우였다.
베아트리체는 처음엔 다소 힘들어하긴 했지만 금세 적응해서 레티시아가 주는 자료들을 외우는 건 물론, 응용도 척척 해냈다.
물론 업무량에 불만이 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많은 걸 혼자서 다 하셨다고요? 대단하셔라.”
“하다 보면 할 만해요.”
레티시아는 하고 싶은 말의 절반만 뚝 떼어 말하며 웃었다. 실은, 베아트리체가 맡게 될 일은 기존에 그녀가 수행하던 일의 절반이 채 못 되었다.
원래 레티시아는 일개 비서, 혹은 통역사는 맡아서 할 수 없는 제국의 일들을 도맡아 해 왔다.
예를 들어, 베아트리체에게 어떻게 본디 황족만 알아야 할 황궁 곳곳에 숨겨진 비밀 장소와 그 특징들을 알려 주겠는가? 다양한 기밀 서류 또한 베아트리체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될 터였다.
또한 레티시아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대부분의 보고를 미카엘이 없는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받아 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그 모든 권한에서 제외되고 오직 통역사로서의 역할만을 맡게 될 예정이었다.
그 말은, 본디 레티시아가 하던 일의 절반가량이 미카엘에게로 넘어가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카엘이야말로 걱정인데…….’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알게 된 지 한 달이 넘지 않은 베아트리체에게 제국을 좌지우지할 만한 권한을 넘겨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후보 또한 없었다.
미카엘이 그 나름의 비밀 군사 조직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들이 제국의 운영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를 도맡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미카엘이 지금보다 더욱더 업무에 시달리는 것. 죄책감과 미안함이 뒤섞인 씁쓰레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미카엘과 자신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미카엘이 안쓰럽다고 해서 스스로의 꿈을 포기해 가며 그의 곁에 머물 생각은 더 이상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레티시아는 줄곧 다른 그 무엇보다도 미카엘을 택해 왔다.
이번 한 번만큼은 그녀 자신을 택할 때였다.
베아트리체가 그녀를 불렀다.
“레티시아 님, 이 부분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아, 미안해요. 잠시 뭐가 좀 생각이 나서……. 몇 페이지인가요? 지금 바로 볼게요.”
레티시아는 잡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베아트리체를 가르쳤다. 미카엘에게 백날 미안해해 봤자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베아트리체에게 최대한 많은 걸 알려 주는 게 이 궁을 떠날 레티시아가 미카엘을 도울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느덧 한 달의 교육 기간이 모두 끝났다. 마지막으로, 각료들의 앞에서 베아트리체가 미카엘의 대화를 번역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이 하루만 잘 버텨 낸다면 베아트리체는 정식으로 미카엘의 통역사가 될 터였다.
레티시아는 두건을 깊게 눌러써 머리를 가린 채 회의장 구석에 조용히 서서 황좌에 앉은 미카엘과 그의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미카엘도, 베아트리체도 굳이 그렇게 숨어서 듣지 말라며 만류했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베아트리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레티시아는 베아트리체가 조금 말을 더듬는다고 각료들이 자신에게로 달려와 번역을 요청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도 바로 베아트리체가 무사히 미카엘의 비서가 되는 걸 돕기 위해서였다.
‘내가 안 봤다간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도 몰라.’
당연히 각료들은 레티시아가 남기를 원했다. 뇌물까지 써 가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꼭 제국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평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 탓에 발목이 잡혀서는 곤란했다.
자신의 사퇴를 막으려는 정성을 보면, 각료들은 베아트리체에게 티끌만 한 흠이라도 찾아내어 트집을 잡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 봤자 내가 그만두는 건 막을 수 없을 텐데…….’
하지만 각료들이 합세한다면 최소한 베아트리체가 미카엘의 통역사가 되는 건 막고도 남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그 꼴은 도저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직도 제 직위에 적응하지 못한 듯한 신임 재상, 리차드 파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안건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상으로 삼는 데는 찬성했는데, 목이 날아간 전임 재상과는 달리 간이 작아 역모를 꿈꿀 자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가 컸다.
다만,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평소엔 자신의 소신 한번 밝히지 않던 이 소심한 작자가 자신을 찾아오더니, 황궁에 머물러 달라고 애걸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좀 놀랐지.’
눈물까지 흘리며 애걸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각료들에게 떠밀려서 온 것 같지도 않았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황궁 전체에서 제일 배포가 없는 사람마저 대놓고 반대할 정도면 베아트리체의 앞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따라서 덴드로 지방의 도로 건설을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아니, 곧 겨울이라 눈이 내릴 텐데 미쳤소? 눈까지 쌓이면 어느 세월에 공사한다는 말이오?”
“여름엔 자재가 쉽게 변질하여 안 된다, 가을엔 인력을 구하기 힘들어서 안 된다, 이제 곧 겨울이니 언제 내릴지도 모르는 눈 핑계를 댑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애초에 그 촌 동네들을 잇는 도로가 왜 필요하단 말이오! 차라리 도로를 놓으려면 수도 인근에…….”
“하! 본인 영지에 도로를 이어 달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시는군요. 폐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그리고 촌 동네라니요. 전 제국에서 덴드로만큼 자원이 풍부한 곳도 드뭅니다. 심지어 황실 직할령이지 않습니까! 덴드로가 부흥한다면 나오는 세수를 모두 황실이…….”
그때, 미카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판자.”
침묵이 흘렀다.
베아트리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털.”
“아, 죄송합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신 게 맞습니다. 확실해요.”
“새싹.”
“도로는 내년 봄에 놓습니다.”
“자물쇠.”
“미리 예산을 떼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내년 봄에 집행할 때까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예산 말입니다.”
미카엘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베아트리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 전체에 가라앉았다. 평소라면 미카엘의 결정이 내려지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야 했지만,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재상이 깜짝 놀라 입만 헤벌리고 있으니 조용할 수밖에.
하지만 리차드 파크는 다른 각료가 발을 걷어차자 간신히 정신을 차렸고, 다음 안건을 읊기 시작했다.
‘…….’
레티시아는 입을 꾹 다문 채 회의를 지켜보았다.
‘완벽하네…….’
기묘한 감정이 레티시아를 덮쳤다. 어느덧 각료들이 아닌, 그녀 스스로가 베아트리체의 흠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완벽했다. 어떻게든 자신보다 못한 부분을 찾으려고 했던 레티시아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기뻐해야 해, 레티시아 우즈.’
레티시아는 다짐했지만 왜인지 속만 울렁거릴 뿐이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카엘은 매로프 양이랑 잘해 낼 거야. 적어도 지금의 나보단 매로프 양이 미카엘의 말을 훨씬 더 잘 해석하잖아…….’
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주절거려 보아도 결국 레티시아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의 기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질투.
진실을 알기 전, 미카엘의 뜻을 읽어 내려 노력했던 레티시아는 항상 필사적이었다.
미카엘에게 도움이 되어야 했으니까. 미카엘이 사실상 그녀를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위를 노린 모략과 암투에 휘말려 죽는 꼴만큼은 도저히 볼 수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몰라도, 베아트리체에겐 그런 감정은 없을 것이다. 사실 레티시아가 한 달간 지켜본 결과로는 제국에 대한 충성심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아트리체는 완벽하게 미카엘의 통역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꼴사납구나.’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능력은 특별할 게 없다, 누구나 다 노력만 한다면 미카엘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해 왔지만 내심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막힘없이 미카엘의 말을 번역해서 각료들에게 전달하는 베아트리체가 황좌 옆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항상 전전긍긍하던 자신보다 미카엘에게 훨씬 도움이 되어 보였다.
레티시아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몸을 천천히 돌려 조용히 회의실을 나왔다.
베아트리체는 그녀에게 불만이 있던 각료들의 입을 전부 닥치게 하고도 남을 정도로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했다.
이제 레티시아가 해야 할 건, 이미 전부 싸 둔 짐을 들고 황궁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창밖으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좀 더 빨리 떠날 생각이었건만 그녀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된 것이다.
‘미카엘도……. 아니야.’
레티시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괜한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수도에서 사업을 해 나갈 게 아닌가.
자선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미카엘을 찾아가도 늦지 않다.
마침내 마음을 전부 다잡은 레티시아는 천천히 자신이 황궁에서 기거했던 방을 걸어 나갔다.
“……?”
벽면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레티시아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가, 상대를 알아보고는 긴장을 풀었다.
“매로프 양, 무슨 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