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오늘 떠나신다길래 달려왔어요. 그래도 며칠은 더 계실 줄 알았는데…….”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레티시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제 막 미카엘의 비서가 되어 정신이 없을 베아트리체가 작별 인사를 위해 찾아온 건 고마웠지만, 복잡한 감정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차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레티시아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려다, 너무 냉정해 보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들어 드릴까요?”
“괜찮아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가방은 제법 무거웠다. 베아트리체가 대신 들어 준다면 고맙기야 하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하도 고용인도 아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레티시아의 대답을 들은 건지 만 건지 그녀의 짐 가방을 반쯤 낚아채더니,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현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조금 당황했다가, 오히려 베아트리체의 이런 성격이 미카엘의 비서로서 일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많이 무거웠거든요.”
“그럴 만하죠. 왜 사용인을 부르지 않으셨어요?”
“그냥…….”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최대한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들고 갈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마차까지만 가져가면 되니까요.”
“직접 들고 가시는 걸 보니 중요한 게 많이 들었나 보네요?”
“딱히 중요하거나 값나가는 건 없어요. 그래도 다 정이 든 물건들이긴 하죠.”
지금 베아트리체의 손에 들린 짐 가방에 든 물건들의 값을 모두 합쳐도 레티시아의 한 달 월급이 채 안 될 것이다.
가끔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에 하고 나가야 할 장신구를 제외하면, 귀중품이 들어오는 족족 팔아 사업 자금에 보탰기 때문이었다.
옷 또한 황궁 전역을 뛰어다니기에 걸맞게 활동성이 높은 옷들이라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아, 그게 있긴 하네.’
레티시아는 아직도 비밀을 밝혀내지 못한 사자 모양 브로치를 떠올렸다. 당연히 그녀는 브로치의 비밀을 밝히려 애썼지만, 온갖 문헌을 뒤져 보아도 다이애나가 알려 준 수준의 정보가 전부였다.
이제 궁을 나왔으니, 평생 브로치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알지 못하리라.
하지만 상관없었다. 레티시아가 브로치의 비밀을 알고 싶었던 건 황실에 난무하는 암투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서였다. 이제 그 누구도 평범한 사업가에 불과한 그녀를 노리지 않으리라.
미카엘의 비서를 그만둔 지금, 이 브로치는 소중한 추억 한 조각에 불과했다.
평생토록 간직할.
쿵.
짐 가방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매로프 양?”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짐 가방은 다소 무겁기는 했으나 떨어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우수수 돋아났다. 저물어 가는 석양이 비춘 베아트리체의 손끝에서 칼날이 붉게 번쩍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몸을 크게 돌려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왜? 어떻게? 어째서?’
수십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에 뒤엉켰으나, 멍청하게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가 아니었다. 짐 가방 따위는 베아트리체에게 얼마든지 넘어가도 된다. 지금은 살아남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금세 베아트리체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방랑 기사의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레티시아는 그제야 단도를 떠올렸지만, 꺼냈다간 도리어 빼앗겨 더욱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베아트리체의 행동을 기다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베아트리체의 조금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항하지 않네요?”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요.”
“마음에 들어요, 그런 자세.”
“…….”
레티시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황실 소속에서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
‘내가 실종된다 한들 찾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야.’
그중 한 명은 바로 미카엘이겠지만, 미카엘의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베아트리체다. 그녀가 잠적해 버리면 미카엘은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게 된다.
그 자신의 비밀을 밝히는 방법도 있겠지만, 베아트리체를 보낸 사람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이 사람들은 미카엘의 입을 완전히 막고 싶어 해.’
같은 이유로, 그동안 레티시아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항상 황제 곁에 붙어 있는 황제의 비서를 암살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 실패로 돌아간 건 물론이고.
그자들에게 레티시아의 사퇴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미카엘까지 죽일 생각은 아니야. 그랬다면 훨씬 신임을 얻은 후 움직였겠지.’
레티시아는 이 와중에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베아트리체는 그녀의 뒤에 있는 사람의 기대를 완전히 뛰어넘었을 것이다.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다니!
만약 레티시아가 베아트리체였다면 별 볼 일 없는 평민 출신 전직 비서야 그냥 보내고, 최대한 미카엘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미카엘은 한번 정을 주면 모든 걸 다 내주려고 하니까…….’
굳이 깊은 정까지 들 필요는 없다. 미카엘의 가시 돋친 경계가 누그러질 정도의 자그마한 신뢰.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미카엘이 아닌, 레티시아를 택했다. 자신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베아트리체는 무사히 자신의 죽음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황궁에서 자취를 감추리라.
여태까지 숱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삼엄한 경호와 미카엘 덕분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지금쯤 자신에게서 넘어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고, 레티시아의 경호를 전담하던 자들은 모두 본디의 소속으로 돌아갔다.
레티시아는 인정했다. 자신은 곧 베아트리체에게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당연히 살고 싶기야 했다. 하지만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거부하며 발악하기에는 레티시아는 지난 2년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베아트리체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기회를 엿보기는 하겠지만, 승산 없는 싸움을 걸다 더욱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들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베아트리체를 보낸 이는 레티시아는 죽고 유일한 적임자인 베아트리체는 처음부터 첩자니 영원히 미카엘의 입을 덮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태까지 희게 질려만 있던 레티시아의 얼굴에 희미한 화색이 감돌았다.
처음부터 전제가 틀려먹었으니, 결론이 옳을 리가 없다.
‘그자들의 얼굴, 볼만하겠네…….’
별안간 베아트리체가 그녀를 자신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레티시아는 매캐한 약품 냄새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간신히 차린 레티시아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린 돌바닥에서 뒹굴었다.
하지만 고통도 잠시,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한 자각이 레티시아를 덮쳤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그 말은, 베아트리체의 목적이 레티시아의 목숨을 바로 앗아 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긴…….’
주위를 확인한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잘 아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100여 년 전에 폐쇄된 고문실.
여기서 누군가를 고문한 적은 없었지만,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이곳을 종종 애용하곤 했다. 수백여 미터 밖의 인기척도 들려오는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타인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레티시아 님.”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베아트리체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피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레티시아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베아트리체의 목적을 알아내야 했다.
“저, 인질인가요?”
“비슷하답니다, 레티시아 님.”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를 인질로 삼아 미카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베아트리체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께서 구하러 오리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여태까지처럼.”
“…….”
“틀린 생각은 아니랍니다.”
“……?”
“폐하께선 분명 레티시아 님을 구해 내실 거예요. 단…….”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낡은 고문 기구들에 머물렀다.
“그땐 이미 레티시아 님이 제가 묻는 모든 질문들에 대답한 이후겠죠.”
“……!”
레티시아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빠져나왔다. 그제야 베아트리체가 왜 미카엘이 아닌 자신을 노렸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베아트리체를 보낸 자가 누구든, 그자의 목적은 정보였다.
레티시아는 베아트리체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지만, 여러 가지 군사 기밀이나 국정 운영에 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미카엘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한 배경 지식을 쌓게 하는 데 힘썼을 뿐이었다.
만약 베아트리체가 레티시아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그대로 넘겨받았다면 계속해서 미카엘의 통역사로 머물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말 그대로 통역사에 불과했고, 레티시아가 관여하던 중요한 일들은 모두 미카엘이 홀로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기대했던 핵심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없으니 레티시아를 노린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성을 떠나기 전을 노린 거고.’
당연히 베아트리체의 주인은 귀족일 테니, 레티시아를 고문할 만할 시설은 충분히 갖추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사람 한 명을 황제의 정보망을 피해 사저로 데려와서 고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베아트리체는 가장 본인에겐 리스크가 큰 동시에, 주인에겐 그 어떠한 누도 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황궁의 옛 고문실에서 레티시아를 고문하는 것.
삐꺽.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지만, 방금 본 광경의 잔상이 눈꺼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베아트리체가 오래된 고문 기구를 가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