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50)

68화

그간 레티시아는 이곳에 종종 찾아오면서도 고문 기구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옛날 옛적에 죽은 자들의 피가 아직도 시커먼 얼룩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베아트리체는 그녀의 손 하나 구속시키지 않았지만 도망치거나 싸운다 한들 승산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품을 더듬거려 보니 정신을 잃은 사이에 칼 역시 빼앗긴 듯했다.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쯤 레티시아가 마차를 타지 않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미카엘이 알아챘을 테니까. 하지만 대체 미카엘이 어떻게 자신이 100여 년 전 폐쇄된 고문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베아트리체가 그녀를 고문하기 위해 오래된 고문 기구들을 정비하는 동안 레티시아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은 고통을 잘 견디는 편은 아니었다. 한계치를 넘게 되면 알고 있는 모든 기밀들을 줄줄이 불게 될 것이다.

‘브로치……. 브로치.’

레티시아는 품속에 브로치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지난 몇 년간 그 어떤 수를 써도 브로치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남은 희망은 이것뿐이었다.

쿵.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고문 기구를 완전히 정비했는지, 베아트리체가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고문 기구의 종류를 파악한 레티시아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베아트리체가 고른 고문대는 다른 험악한 고문 기구처럼 피가 쏟아지는 종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팔다리에 극한의 고통을 가하다 강도가 올라가면 뼈를 뒤틀어 버렸기에 딱히 그나마 낫다고도 할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그녀 앞에 서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사자 모양 브로치 있죠? 폐하께서 받은. 제게 주세요.”

“……?”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아트리체가 브로치의 가치를 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브로치가 목적이었다면 이미 검과 함께 빼앗겼어야 할 터. 왜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인가?

“왜… 그걸 달라고 하죠?”

“황실의 보물이니까요.”

베아트리체는 가볍게 얘기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레티시아도, 베아트리체도 알고 있었다.

‘뭔가… 뭔가 있어.’

레티시아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같이 가져가지 그랬어요? 폐하께서 하사하신 검과 함께.”

베아트리체는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미카엘이 레티시아에게 준 단검이었다.

“레티시아 님, 검을 원하세요?”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과 브로치를 바꾸는 건 어떤가요?”

“…….”

“싫으시다?”

베아트리체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서 귓가에 속삭였다.

“브로치를 주면, 보내 줄게요.”

“왜…….”

“주인님께서 원하시니까. 그리고 반드시 당신의 손에서 자발적으로 받아 내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

레티시아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떠오르는 가능성은 단 한 가지. 브로치에는 고대 마법이 걸려 있었고, 고대 마법의 소유주 이관에 까다로운 조건이 걸린 건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소유주 이관은 일반적으로 강탈에 의해 성립된다. 하지만, 이 브로치만큼은 자발적인 거래에 의해 이관된다면?

레티시아는 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베아트리체가 반색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던 거죠, 그렇죠?”

“그럼요. 그러니 그것만 줘요. 살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눈앞을 가린 장막을 벗겨 낸 것처럼 세상이 확 밝아지는 감각이 레티시아를 엄습했다.

‘그거였어.’

그날, 이 브로치를 쥐고서 벼락을 맞았을 때…….

레티시아는 살고 싶었다.

절실하게.

“네, 살고 싶어요.”

레티시아는 천천히, 또박또박 한 글자씩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

그녀는 고대 마법에 대해 잘 몰랐지만 마법이 말로 발동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제발, 제발…….’

그 말이 귓가에 울리는 동시에, 지난 2년 동안 서서히 무뎌져 사그라진 줄 알았던 삶에 대한 욕구가 목까지 치밀어 올라 레티시아의 몸 전체를 휘저었다.

브로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님…….”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말은 거대한 굉음에 휩싸여 사라졌다.

좀 더 정확히는, 천둥소리에.

새하얀 벼락이 공간 전체를 지배했다. 누구라도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눈부신 광경이었지만 레티시아는 도리어 눈을 크게 뜨고 벼락을 직시했다.

까마득한 예전으로만 느껴지는 어린 시절 그녀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던 벼락이었다.

“아아아악!”

베아트리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예전의 레티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너부러져 몸을 뒤틀고 있었다.

‘…….’

레티시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여전히 벼락은 사방에서 내리치고 있었지만 자신에겐 영향 하나 주지 않았다. 베아트리체만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베아트리체를 놔두었다간 계속해서 내리치는 벼락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훌쩍 뛰어넘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미안해요.”

레티시아는 브로치를 꽉 움켜쥐었다. 방금 전 발동조차 요행인데, 어떻게 멈추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멈춰 보려는 시도 한번 하지 않고 베아트리체를 내버려 둔 채 고문실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베아트리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탄내와 함께 열기가 확 치솟았다. 지속된 벼락 탓에 베아트리체의 몸에 불이 붙은 것이다.

동시에 베아트리체의 비명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쳤다.

‘그만, 그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화기가 어느덧 자신마저 삼켜 버릴 것처럼 부풀어 올랐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간 레티시아는 직접 나서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레티시아는 항상 미카엘이 사람을 죽이는 걸 돕는 자신이나 직접 사람을 죽이는 미카엘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가.

불길이 레티시아마저 덮치기 직전, 경악에 질린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레티시아!”

인기척을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었건만, 레티시아는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손길, 익숙한 체취가 등 뒤에서 그녀를 덮치고 난 뒤에야 누군가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당연히, 미카엘이었다.

레티시아는 돌아서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불길 속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쉿.”

미카엘이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으며 속삭였다.

“저자는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미카엘의 말이 맞았다. 만약 브로치가 아니었다면, 산 채로 죽어 가는 쪽은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한 인간이,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지나친 고통을 받아도 싸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레티시아의 발을 떨어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알겠어요.”

옛 고문실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레티시아와 미카엘의 뒤로 새하얀 불길이 치솟았다.

미카엘은 비밀 통로를 통해 레티시아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레티시아는 소파에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베아트리체는 브로치를 노렸어요. 폐하께서 옛날에, 주신…….”

“…….”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죠?”

미카엘을 추궁하고자 던지는 게 아닌,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향해 한 발짝 다가오려다, 그대로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선 채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널 노릴 줄은 몰랐지만,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첩자인 건 알고 있었다.”

미카엘은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이 뒤섞인 어둑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단지, 단지… 널 노릴 줄은 정말 몰랐어. 이건 내 실책이다.”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아직도 손의 마디가 새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브로치를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미카엘을 향해 브로치를 내밀었다. 베아트리체의 요구를 생각해 보면 브로치의 소유권은 자발적인 거래에 따라 이관되는 게 틀림없었다.

“돌려드릴게요. 이걸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계속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가지고 있어.”

“저보다 전하께 더 어울릴 물건이에요.”

미카엘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레티시아를 응시했다.

“앞으로 계속 필요할 거야, 레티시아.”

“폐하, 저는 이미 그만두었습니다.”

“이젠 아니지.”

미카엘의 말엔 그 어떠한 망설임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제국의 황제로서의 명령만이 있을 뿐.

“…폐하.”

레티시아는 반쯤 절망에 차 중얼거렸다. 그 먼 길을 돌아와서, 결국 종착지는 이곳이라니. 그녀는 마지막으로 힘을 끌어모아 미카엘을 설득해 보려고 시도했다.

“전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레티시아.”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손을 부드럽게 붙들었다.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과연 브로치만 노렸다고 생각해?”

“…….”

레티시아는 부정할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브로치의 소유권을 성공적으로 얻는 데 가장 공을 들인 건 사실이었지만, 만약 자신이 브로치를 건네주는 걸 끝까지 거부했다면 예고했던 대로 고문을 가하여 각종 기밀이라도 뽑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아트리체, 혹은 베아트리체의 주인만이 레티시아에게서 기밀을 캐낼 기회를 노린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미 10년간의 세월은 레티시아의 거취에 상관없이 그녀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레티시아는 말을 잃은 채 힘없이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굳이 내 비서로 있을 필요는 없어. 그냥 여기에 기거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다만…….”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손을 입술로 가져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데브란트 제국의 남성이, 친분이 있는 여성에게 하는 의례적이 인사였으나 그가 레티시아에게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날 떠나지는 말아 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