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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69/150)

69화

Chapter 9. 과거는 과거로

베아트리체 매로프의 실종은 다소 화제가 되었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변변한 뒷배 하나 없는 방랑 기사를 오래 기억할 사람은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덕에 레티시아 우즈가 복귀했다며 기뻐하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물론, 그 기뻐하는 사람 중엔 정작 레티시아 본인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피곤해.’

레티시아는 책상에 엎드렸다.

단순히 업무 때문에 느끼는 피로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카엘은 최대한 그녀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처음에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지만, 미카엘은 그녀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화법의 난이도를 낮추었다.

레티시아는 베아트리체가 미카엘과 쉽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그의 의도였다는 사실도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애초에 미카엘은 그녀의 장단에 맞추어 주는 척만 했을 뿐, 실제 목적은 베아트리체처럼 유능한 첩자를 제거하고 그 뒤를 캐는 데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미카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셈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쁠 기분도 없다고 해야 할까.

미카엘은 그녀에게 몇 년 이내에 황권을 완전히 거머쥐고 말을 할 수 있다는 비밀 역시 만천하에 드러내겠다고 약속했지만, 레티시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직계 황족들을 상당수 죽이거나 추방시킨 지금도 미카엘은 정통성이 너무나도 약했다. 본디대로라면 그보다 황위 계승권이 앞서는 고위 귀족들이 두 손으로 꼽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결혼이라도 해야 하는데.’

황권을 강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친황제파 대귀족 영애와의 결혼이었다.

심지어 후보도 대여섯 명은 되어 취향대로 고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결혼 이야기만 넌지시 꺼내면 대놓고 짜증을 내곤 했다.

레티시아 역시 미카엘이 대놓고 꺼려 하는 사안을 계속해서 제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이 심기 불편해하는 문제를 화두에 올릴 만큼 간이 큰 관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다른 관료들의 의견을 모아 미카엘에게 전달하는 것도 레티시아의 역할 중 하나였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미카엘의 반응을 떠올리면 정략결혼 또한 버려야 할 패였다.

‘그냥, 미카엘은 죽을 때까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탈 거고……. 나도 그 옆에서 그렇게 살아가겠지.’

레티시아는 브로치를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는 본의 아닌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 브로치의 작동법을 알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레티시아가 진정으로 살고 싶어 할 때 물리적인 공격 혹은 방어로만 브로치가 그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이었기에, 레티시아는 열심히 브로치로 햇빛을 모으곤 했다. 난롯불에 던져 넣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문헌도 있었지만 벼락의 효과를 생각하니 좀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일정표를 확인했다. 기왕 산 목숨, 무기력하게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레티시아의 사업, 두카트는 건재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자선 사업으로 폭을 넓히겠다는 계획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단, 비서 역할도 계속해야 한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레티시아의 시선이 이튿날 일자 밑에 적어 둔 글자에 머물렀다.

D.

한 달에 한 번, 두카트를 직접 방문하는 날이었다.

이튿날 아침, 두건과 짙은 베일로 얼굴을 감춘 레티시아는 두카트의 본관에 도착했다.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은 직원들이 건물 안팎을 바삐 다니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잠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소 이질적인 행동이었겠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법이다.

레티시아는 가장 위층인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5층에는 방이 단 하나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새하얀 문을 세 번 두드렸다가, 잠깐 뜸을 들이고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빼꼼히 여니 대리인이 고개를 들고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베스 찰스턴.

제퍼슨 남작가에서 함께 일했던 하녀였다. 좀 더 정확히는, 당시 신입이던 레티시아를 싫어해서 대놓고 괴롭히던 바로 그 베스였다.

당시에는 제법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시간은 둘을 친구로 그리고 동업자로 만들어 주었다.

“축하해. 복직했다며?”

“…….”

레티시아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 베스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한숨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미리 알아서 좋겠다. 점집이라도 차리지 그래?”

“점이 아니라… 머리가 있으면 누구나 예상했을걸. 번역은 아무나 하나?”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럼?”

“…….”

레티시아는 그냥 대답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어차피 베스에게 다 털어놓아 보았자 그녀만 위험해질 것이다.

“뭐, 상관없지. 중요한 건 우리 대단하신 레티시아 우즈께서 계속 지고하신 황제 폐하 곁에 머무른다는 점이니까.”

“기뻐 보이네, 베스.”

“당연하지. 비서님께서 물어다 주는 정보 없이 우리 사업이 어떻게 이렇게 컸겠어?”

베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두카트의 수입금으로 제국 곳곳에 땅을 샀다. 그동안 황궁에서 듣고 본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산 땅들은 값이 쑥쑥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신생 사업체들은 기존 사업체들에 견제당해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레티시아는 철저한 조사로 기존 사업체들의 영역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두카트’를 운영했다. 적어도 사업을 시작할 때는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그만두지 않아서 안심했어. 황궁이 보통 살벌한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 아니까 말리지는 못했지만.”

“…알겠어. 앞으로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줄게.”

베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마. 이제 굳이 네가 거위 노릇 안 해도 괜찮으니까.”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사사건건 자신의 말에 토를 달던 베스를 레티시아가 동업자로 삼았던 이유는 복합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속내가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두카트’를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레티시아가 생각한 사업의 목표는 열 명 이내의 하녀들이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일할 수 있는 작은 청소 회사였다. 따라서 처음 시작할 때의 직원은 레티시아를 포함해 다섯 명에 불과했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그동안 황궁에서 살벌한 인간관계를 많이 중재했으므로 네 명과 함께 일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하로 일하는 것과 모든 결정을 홀로 내려야 하는 최종 결정권자가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더군다나 레티시아가 매일같이 회사를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직원들 사이에 사소한 분쟁이라도 일어나면 더욱 힘들었다.

결국, ‘두카트’는 소리 소문 없이 수도에 생겨났다가 그 어떠한 파장 하나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수많은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 의기소침해진 레티시아를 찾아온 게 바로 베스였다.

베스는 제퍼슨 남작가를 떠나, 다른 고위 귀족가의 하녀로 일하고 있던 도중 ‘두카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지쳐 있던 레티시아는 베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장장 몇 시간에 걸친 하소연을 듣는 내내 아무 말도 없던 베스의 반응은 단 하나였다.

‘망한 이유를 알겠네.’

지금은 레티시아 역시 왜 첫 번째 두카트가 망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엔 베스의 말이 상당히 무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베스가 두카트의 실패 원인을 하나하나 짚어 주자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단지 시스템만 만들어 놓으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되리라고 생각했던 게 가장 큰 패착이었다.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건 바로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진짜네.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

‘자책은 하지 마. 또 시도하면 되니까. 너 돈 많잖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레티시아는 베스의 손을 덥석 걸머쥐었다.

‘내 대리인, 할래?’

그렇게 베스는 두카트의 얼굴이 되었다.

사실 베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내린 판단이었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베스가 두카트에서 잘해 주었기에.

“레티시아? 듣고 있어?”

“…응?”

“또 안 듣고 있구만.”

베스가 툴툴거렸다.

“자, 잘 들어. 네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말했잖아. 이제 난 나서지 않겠다고.”

“투자 의사를 밝힌 부유한 귀족이라도?”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귀족이 두카트 같은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제법 흥미로웠지만, 두카트의 자금은 풍부했다. 굳이 그 속내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귀족의 손을 잡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돈 많잖아.”

“그건 그런데… 그 사람, 널 알더라.”

쿵.

레티시아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소리였다. 잠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여태까지 레티시아는 자신이 두카트의 진짜 사장이라는 사실을, 비서를 완전히 그만두고 사업 전면에 나설 때 밝히기 위해 철저하게 숨겨 왔다.

알려진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개 귀족이 알 정도면 어디선가 꼬리가 밟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허투루 볼 일은 아니었다.

“뭐라고?”

초조하게 타들어 가는 레티시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스가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얼굴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뭐더라……. 미안, 귀족들 이름은 외우기가 힘들어서. 아, 찾았다.”

레티시아는 바싹 긴장한 채 베스의 입에서 나올 이름을 기다렸다.

“테렌스 던워디.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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