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레티시아는 베일도, 두건도 쓰지 않은 채 두카트의 응접실에서 테렌스 경을 기다렸다.
테렌스 경은 정확히 약속 시간 10초 전에 나타났다. 레티시아는 문득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삼켰다. 테렌스 경으로 보이는 남자가 밖에서 서성거린다는 보고를 한 시간 전부터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부유한 백작의 차남이라도 투자를 하려니 다소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테렌스 경.”
테렌스 경의 검붉은 눈이 반짝였다. 레티시아는 긴장을 풀었다. 다행히 테렌스 경은 딱히 자신을 협박하러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고 4년 동안이나 매달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이 협박하러 올 리가 있겠는가.
“우즈 양,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글쎄요. 경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최근에 좀…….”
“아, 실례했습니다.”
테렌스 경은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사과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렌스 경, 인사는 이쯤 하죠. 왜 저를 찾으신 건가요?”
“그야, 투자를 위해…….”
“그럼 왜 베스 찰스턴 양이 아닌, 저를 찾으셨죠?”
처음으로 테렌스 경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새카만 머리칼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실토하고 말았다.
“어쩌다가… 우즈 양이 두카트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생겨서 보게 되었는데… 유망한 사업이더군요. 지금보다 훨씬 커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투자를 위해 찾아왔습니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테렌스 경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당연히 레티시아도 부유한 백작의 차남이 하녀 사무소에 처음부터 관심을 두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가 레티시아의 뒤를 캤다는 사실을 암시까지 하며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레티시아는 그를 조금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저를 조사하셨군요? 왜죠?”
“그게……. 왜 그만두려고 하셨는지, 궁금해서…….”
어느새 테렌스 경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테렌스 경이 알 정도면 사실상 전 황궁이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겠네. 앞으론 차라리 전면에 나서야겠어.’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테렌스 경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숨기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테렌스 경은 자신의 치부까지 털어놓았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두카트를 좋게 봐 주신 것도 감사드리고요.”
긴장과 부끄러움으로 붉게 굳어 있던 테렌스 경이 점점 평정을 되찾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레티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기로 결심했다.
“저는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을 할 생각이었어요.”
“……!”
테렌스 경은 찻잔을 완전히 엎어 버리기 직전 간신히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았다. 레티시아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요?”
“솔직히, 지금도 충분히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틈새를 잘 찾았으니까요.”
레티시아는 동의했다. 두카트는 경쟁사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분야를 손에 꼭 붙들고 있었다. 앞으로 계속해서 직원과 고객이 늘어날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사업 확장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자칫했다간, 두카트가 여태까지 번 돈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복귀하셨다는 건, 사업 확장을 포기했다는 뜻입니까?”
“아뇨.”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복귀는… 어쩔 수 없었어요. 베아트리체 매로프 양이 실종되었으니까. 그렇다고 후임자를 뽑기에도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제가 계속하게 된 거죠.”
“정말로 그만두려고 하셨군요.”
“네. 하지만 제가 폐하 밑에서 일한다고 해서, 이런 작은 사업체 하나 못 꾸릴 이유도 없잖아요? 사업 확장도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테렌스 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투자자로서, 어떤 사업으로의 확장인지 알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자선 사업이에요.”
이번엔 테렌스 경은 정말로 놀란 나머지 입을 멍하니 벌리고는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입니까?”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확장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돈만 쓰는 일 같은데요. 물론 자선은 장려되어야 할 일이긴 합니다만…….”
레티시아는 이런 질문은 이미 베스로부터 질릴 정도로 들었기 때문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죠. 가장 먼저 두카트에 취직하는 걸 권유할 생각이에요. 물론, 강제성은 없어요. 원한다면 어디든 다른 지역, 다른 회사로 떠날 수 있고요. 하지만 대다수는 두카트의 인재가 되어 줄 거예요.”
“10년은 걸릴 일 아닙니까.”
“살아 보니 10년, 정말 금방이던데요?”
테렌스 경은 웃기 시작했다.
“우즈 양은 꼭 저보다 나이를 곱절은 먹은 귀부인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두카트 정도 잠재성이 있는 회사라면 10년은 내다보아야 할 테니까요.”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꾸밈없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테렌스 경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사실,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라는 게 더 맞긴 해요.”
테렌스 경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왜인지 속에 담긴 말들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눈 때문이야.’
테렌스 경의 검붉은 눈은 레티시아의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도 바르르 흔들리며 반응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이렇게나 열심히 들어 주는 건 처음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집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많이 다르게 살았겠죠.”
“…우즈 양.”
“제가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도망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평범한 아이들은… 보통은 알 수 없죠. 자기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레티시아는 잠시 심호흡했다.
베스와 몇 번이고 싸우면서 물건을 내던지듯 소리쳤던 말들이, 테렌스 경의 앞에서는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서 저는 그런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네, 제 욕심이죠. 그래서 그만두고 두카트에 전심전력을 쏟으려고 했는데……. 그만두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요.”
마침내 말을 끝낸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홀짝였다. 한발 뒤늦은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너무 말을 많이 했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스면 모를까, 아직 정식 투자자도 아닌 테렌스 경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몰려오는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안했다.
그때, 잠시 조용했던 테렌스 경이 입을 열었다.
“우즈 양, 제가 그 자선 사업의… 파트너가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테렌스 경은 담담해 보였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자신의 발언이 어떤 리스크를 지니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아는 모습이었다.
“테렌스 경, 자선 사업은 이득이 거의 없어요. 조금 전 경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돈만 쓰는 일이고요. 10년 뒤를 내다보기엔, 경과 두카트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 않나요?”
“당연히 자선 사업에만 투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우즈 양의 꿈에, 제가 동참할 기회를 달라는 말입니다.”
“…….”
“사실 전 두카트의 영역을 평민이 아닌, 귀족까지 확장하자는 제의를 하러 왔습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오히려 단순히 귀족 도련님의 호기심 어린 돈 놀음에 불과했다면 실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우즈 양의 말을 들어 보니, 그런 확장은 조금 미루어도 될 것 같군요. 일단 자선 사업부터 함께 해 보고, 절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드시면 그때 다른 방면을 맡겨 주셔도 좋습니다.”
“…….”
레티시아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테렌스 경의 말에선 진실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에게 두카트의 미래를 맡길 만큼 레티시아는 무모하지는 않았다.
“경, 경을 알아 갈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예……?”
테렌스 경의 목에서 반쯤 경악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경께서 두카트 이름을 내건 자선 사업을 도와주시면 저는 다른 방면에서의 투자도 거부할 수 없어요. 그럴 만큼 뻔뻔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혹여 경과 제가 물과 기름 같은 상성일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그… 개인적인 만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레티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자신의 말을 잠시 되짚어 보고는 테렌스 경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깨닫게 되었다.
“아, 저, 그게… 두카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선 사업을 한번 해 보자는 말이었어요! 제게 여유 자금이 조금 있거든요.”
“그럼 혹여 실패한다 해도, 두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겠군요.”
“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드릴게요. 만약 저희의 협업이 무사히 흘러간다면… 두카트의 사교계 진출은 전적으로 경께 맡기겠습니다.”
“영광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테렌스 경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퍼졌다. 레티시아는 조금 전 해프닝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슬슬 일어날까요?”
대놓고 축객령이었으나 테렌스 경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는 품에서 자그마한 세공함을 꺼냈다.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지난 4년 내내 던워디 백작가의 시종이 단 한 달도 빠지지 않고 매달 자신에게 전달해 준 선물은, 항상 테렌스 경에 손에 지금 들려 있는 모양의 함에 들어 있었다.
“여태까지는 가문에서 보내 드리는 보답이었기에 시종을 시켜 왔지만, 앞으론 제가 직접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우즈 양의 파트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