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물론 지난 4년간 레티시아가 아무 말도 없이 던워디 백작가가 매달 보내오는 선물을 받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백작가의 시종에게 넌지시 이제 시간이 흐를 대로 흘렀으니 정중히 거절하겠다고 말도 해 보았지만, 백작가에선 도리어 더욱 값비싼 선물을 보내왔다.
결국 레티시아는 선물을 더는 받지 않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부유한 백작가가 차남의 생명을 구한 은인에게 매달 선물을 보내온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테렌스 경 본인에게 직접 건네받는 게 아니었기에 부담이 덜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테렌스 경이 그 균형을 깨트리고 있었다.
“테, 테렌스 경…….”
레티시아는 장식함을 엉거주춤 받으며 중얼거렸다. 장식함의 실제 무게는 그녀가 매달 받아 오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묵직하게 느껴졌다.
“직접 골랐습니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항상 감사했지만, 이제 선물은 그만 주시는 게 좋겠어요. 말씀하셨다시피 저희는 파트너니까요.”
“…우즈 양은 제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그 보답은 해야죠.”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뇨.”
테렌스 경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간 레티시아가 그에게서 보지 못했던 강직한 감정이 검붉은 눈동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당신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폐하를 얼른 도와야 하는데, 저 같은 무례한 멍텅구리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초조함이 느껴지더군요.”
“…….”
레티시아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어쨌든 당시의 그녀에게 테렌스 경은 무례한 멍텅구리에 지나지 않았던 건 맞았다.
“하지만 당신을 저를 구했죠. 저는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죽게 방치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왜죠? 저는 우즈 양과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방해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폐하를 위해 움직이는 게 당시 상황에서는 더 마땅한 선택이지 않습니까.”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귀찮게 물어보실 줄 알았다면 그냥 돌아가시게 내버려 둘 걸 그랬어요.”
테렌스 경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그 의문이 절 놔주지 않더군요. 왜? 왜 당신이 저를 구했을까…….”
그는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제가 우즈 양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겁니다. 이렇게 우즈 양의 얘기를 들으니 왜 그렇게 움직이셨는지 짐작은 갑니다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군요. 정확한 이유가 뭐였는지.”
“…….”
레티시아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에게 테렌스 경을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설명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테렌스 경이 짐 덩어리인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하대를 해 대는 무례한 멍청이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살릴 기회가 있는데 왜 방치하겠는가?
하지만 테렌스 경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레티시아는 간신히 입을 뗐다.
“저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테렌스 경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주제넘다고 생각해서 투자 제의 자체가 파투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나 자신에게 성의를 보여 온 사람에게 진지하지 않은, 겉핥기에 불과한 말만 할 수는 없었다.
“경께서도, 당시의 저 같은 상황에 처하신다면 상대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말하지 말걸.’
레티시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후회했지만, 테렌스 경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우즈 양.”
그의 목소리는 언짢은 것 같지도, 놀라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할 뿐이었다.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레티시아는 싱숭생숭한 마음에 시달렸다.
‘다른 꿍꿍이가 있지는 않겠지.’
꿍꿍이가 있다고 보기엔 테렌스 경은 너무나 솔직했으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입 밖으로 내었다. 젊은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자신이라면 목숨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기사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냥 귀족 도련님의 유희 정도이려나.’
하지만 돈 많은 도련님의 가벼운 유희라도 상관없었다. 언제 그만둘 수 있다는 기약도 없이 미카엘의 비서로 일하는 동시에 두카트도 운영해야 하는 지금으로선, 자선 사업에 투자하는 건 물론 두카트를 더욱 키울 큰 그림을 그리겠다는 테렌스 경의 제의는 가문 날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문득 테렌스 경의 선물이 생각난 레티시아는 함을 열어 보았다.
‘……!’
함을 가득 채운 금괴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저녁 햇빛을 받고 번쩍였다.
그간 던워디 백작가에서 계속해서 보내 왔던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 가치에 비해 환금성이 떨어지는 장신구들을 팔 때마다 레티시아는 제법 아까워하곤 했다.
진주나 산호처럼 흠집이 쉽게 나서 지나치게 낮은 값으로 팔아야 하는 장신구의 경우엔 결국 팔지 못하고 금화와 함께 금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테렌스 경이, 조금 전 자신에게 건넨 함엔 환금성이 가장 높은 금괴가 들어 있었다.
정확히 몇 리브레인지 아직은 몰라도 분명 여태까지 레티시아가 받은 선물 중엔 가장 합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받은 족족 다 팔아 버리는 것도 알고 있었구나.’
레티시아는 한 번도 그 점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던워디 백작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레티시아는 장신구를 많이 하고 다닐 상황이 못 된다는 건 그들도 알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선물을 바꾸어 그녀를 이해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건 전혀 기대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어.’
함을 닫는 레티시아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황궁에 도착한 레티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중간에 마차를 돌려 제국 은행에 금괴를 보관한 다음 황궁으로 향했기 때문에 미카엘에게 알린 외출 시간을 한 시간이나 어긴 상황이었다.
그 탓에 레티시아는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문관을 보지 못하고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얼얼한 머리 때문에 자신이 부딪친 상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자동적으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바빠서……. 어디 다친 곳 없으세요?”
“…레티시아?”
피가 얼어붙었다.
레티시아의 질린 눈이 크게 벌어져 상대를 바라보았다.
“……!”
레티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많이 달라졌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연을 끊었다지만 어떻게 그녀 자신의 혈육을 잊어버리겠는가?
패딩턴 우즈.
레티시아의 하나뿐인 오빠가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 떠나라고 이성이 외쳤지만 몸이 딱딱하게 굳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패, 딩턴.”
레티시아는 간신히 입을 움직여 그를 불렀다. 패딩턴의 딱딱한 얼굴에 꾸며 낸 듯한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간 잘 지냈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널 그리워해. 많이 바쁘겠지만, 시간이 난다면 고향 집에 들러 줘.”
너무나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패딩턴의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꽝꽝 때렸다.
‘이렇게 다정한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10년이 지났다.
레티시아가 아직 하녀로 일하던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돈을 달라며 황태자 궁을 찾아온 적은 있지만 패딩턴은 단 한 번도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문관 아카데미도 결국 합격하지 못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패딩턴은 어찌 되었건 스스로의 힘으로 합격하여 문관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결국… 소설 내용대로 흘러가긴 하네.’
레티시아의 씁쓸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패딩턴은 다시금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두 분 다 네겐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아버지는 어디 아프신 곳은 없지만,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일을 많이 못 하시고.”
“…….”
그렇지 않아도 처음부터 경악에 질려 있던 레티시아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지자 패딩턴이 황급히 수습했다.
“아, 네게 도와 달라는 건 아니야. 단지… 두 분이 널 정말 보고 싶어 해. 지금은 나도 밥벌이를 하니까 네 손을 빌릴 이유가 없지. 그냥, 한 번만 집에 와 줘. 만약, 아주 만약… 네가 우리 집을 찾을까 봐 부모님께선 이사도 하지 않으셨어.”
“…우즈 씨.”
레티시아가 돌덩이처럼 느껴지는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제가 지금 바빠서요. 제 부주의에 대해선 사과드립니다. 어딘가 다쳐 보상이 필요하다면, 제 보좌관인 파라든에게 연락하세요.”
“레티시아!”
패딩턴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가는 레티시아의 등 뒤에서 애타게 그녀를 불렀지만, 레티시아는 더욱더 빨리 걸을 뿐이었다.
‘…….’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자신은 최대한 가족을 외면하려고 했다. 부모님이 돈을 달라며 찾아왔을 땐 기쁘기까지 했다. 연을 끊을 더더욱 좋은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패딩턴은 그녀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이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복잡한 감정에 대해 어떻게든 정의를 내리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됐어, 잊어버리자.’
레티시아는 오늘 해야 하는,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것도 너무나 많았다. 묻어둔 과거에서 온 사람에게 전전긍긍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잊어버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 날, 미카엘과의 일과를 마치고 늦은 저녁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파라든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연 것이다.
“레티시아 님, 패딩턴 우즈 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