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50)

72화

“돌려보내요.”

“알겠습니다.”

파라든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패딩턴을 내쫓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잠시 후, 고성이 들려왔다.

“제 친동생 얼굴도 못 봅니까? 레티시아가 이렇게 절 내쫓을 리가 없습니다!”

레티시아는 응접실 문 옆에 기대어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레티시아 님께서 지금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제 이름을 정확하게 말한 게 맞습니까?”

“예, 패딩턴 우즈 씨.”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던 패딩턴과 완전히 바뀐 모습에 마음이 술렁이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잘못 생각했어.’

그녀는 불쌍한 파라든을 구해 주기 위해 응접실로 들어갔다.

“레티시아……!”

패딩턴이 조금 전 고성을 지르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레티시아는 무표정하게 패딩턴을 바라보았다. 점차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잠재우면서.

“어딜 다쳐서 오신 게 맞죠?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치료비는 제 보좌관에게 청구하면 됩니다.”

“내가 돈을 원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아닌가요?”

패딩턴은 레티시아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티시아, 제발… 가족으로서, 잠시만 단둘이서 얘기할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네게 꼭 설명해야만 할 게 있다.”

레티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패딩턴을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다. 하지만 어쭙잖게 내보냈다간 매일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회피만 할 수도 없어.’

당장 어제 자신의 대응만 해도 그렇다. 제대로 끊어 내지를 못하고 치료비니 뭐니 하니까 이렇게 찾아온 게 아닌가. 그리고 패딩턴이 대체 뭘 말할 작정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레티시아는 한 차례 심호흡했다. 쉽지 않은 대화가 될 듯했다.

“파라든, 잠시 비켜 주세요.”

파라든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입을 벌렸지만, 레티시아가 고개를 젓자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패딩턴이 즉각 입을 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 나는…….”

“그만.”

레티시아는 패딩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지난번처럼 패딩턴이 하는 말만 듣다가 조용히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패딩턴, 대체 무슨 낯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놀랍게도, 패딩턴은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잠시 입만 뻐끔거리더니 간신히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다.

“그야, 네가 보고 싶어서지.”

“10년 전에도 없던 정이, 갑자기 솟아올랐다니. 요새 돈이 많이 궁한가 봐?”

“정말 그런 게 아니야, 레티시아……. 조금만 내 얘기를 들어 주면 안 되겠니?”

“…….”

레티시아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말해 봐.”

“어제도 말했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정말… 많이 힘들어하셔.”

“돈 때문에?”

“아니, 네가 보고 싶어서.”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두 분이 예전에,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 패딩턴도 모르진 않을 거야.”

“…….”

“나는 그때 하녀로 일했는데, 내가 그동안 모아 둔 돈을 요구하셨지. 당연히 거절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빚쟁이 흉내를 내며 회계 담당을 속여서 그달 월급을 그대로 가져가셨지.”

“…그건, 부모님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실 거야.”

“그때가 아마 시기상으로… 네 문관 아카데미 입학쯤이었을 것 같은데.”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다, 레티시아. 내가 너무 철이 없었어. 부모님도 네게 너무 모질게 대하셨고. 하지만 부모님도, 나도 널 사랑해.”

“나는 사랑하지 않아.”

“……!”

레티시아는 말을 불쑥 내뱉은 직후, 경악하는 패딩턴만큼이나 자기 자신도 놀라 버렸다.

‘그래, 나는 패딩턴도… 부모님도 사랑하지 않아.’

항상 레티시아의 마음 깊은 곳에선 부모님과 패딩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정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커 가는 동안 그 정을 부정하려고도 해 보았고, 잊으려고도 해 보았지만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동료들을 볼 때마다 불쑥 치밀어 오르곤 했다.

하지만 지금, 레티시아는 무덤덤하게 자신이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뱉을 수 있었다.

“레티시아, 너……!”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겪고도 내가 부모님과 패딩턴, 그리고 할머니를 사랑할 수 있겠어?”

“넌 어릴 때나 힘들었지! 나는 10년 내내 힘들었어! 지난 몇 년간 가족을 위해 희생한 건 바로 나였다고!”

“……?”

레티시아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패딩턴의 고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가 버린 이후에, 부모님은 널 찾겠다고 온 나라를 뒤집고 다녔어. 당연히 나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 공부할 수밖에 없었지. 아득바득 공부해서 문관 아카데미에 붙었다.”

레티시아는 코웃음 쳤다. 아무리 철면피라도 그렇지, 어린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는데도 겨우 그 정도로 힘들다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

패딩턴은 레티시아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붙었으니 이제 내 앞엔 출세길만 있다고 생각했지. 부모님만 아니었다면……!”

“출세했잖아?”

“출세는 무슨. 겨우 하급 문관이 되는 걸로 끝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위에 찔러 줄 돈이 있어야 출세를 시도라도 해 보지.”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패딩턴은 당당하게 그가 뇌물을 주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황제의 비서 앞에서!

“하지만 돈이 나오는 족족, 부모님이 다 가져가. 주지 않으려고 해 봐도 내 직장과 집을 알고, 안 주면 늙은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라고 드러누워서 고함치는데 어떻게 안 줘?”

“널 사랑하셔서 그런 거겠지.”

패딩턴은 레티시아의 작은 중얼거림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레티시아, 넌 돈이 많잖아……. 누구보다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고. 네게 많은 걸 바라진 않겠어.”

“…….”

“나도 부모님의 자식이고, 너도 부모님의 자식이야. 낳아 주고 키워 준 정성이 있는데 당연히 우리가 같이 모셔야지. 그러니 딱, 절반만 보태 줘. 그 이상의 도움은 바라지 않겠어.”

패딩턴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끝을 맺었다.

“제발… 나 좀 살려 줘. 이러다가 죽어 버리겠어.”

침묵이 흘렀다. 조금 긴, 하지만 오랫동안이라곤 할 수 없는.

레티시아는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말을 고르기 위해 고민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어.”

“……!”

패딩턴은 당장이라도 소리칠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레티시아의 이어지는 말에 말문이 그대로 닫히고 말았다.

“돌아가. 호위병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고 싶지 않으면.”

레티시아는 최대한 패딩턴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시금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파라든 때문에.

“주제넘지만, 개인적으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패딩턴 우즈는… 여태까지 징계를 한 번도 받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여기저기 손댄 게 많더군요.”

“보고서까지 썼어요?”

레티시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파라든에게서 보고서를 받아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

레티시아는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패딩턴이 겨우 문관이 된 건 2년 전. 본디라면 부임까지 몇 년은 더 걸렸어야 할 법한 문관 아카데미 성적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의 즉위와 동시에 불기 시작한 피바람에 많은 문관들이 죽거나 내쫓겼고, 패딩턴은 갑자기 많아진 공석 덕에 쉽게 합격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단 2년 만에 간 크게도 신입 문관이 할 수 있는 비리란 비리는 모두 저질렀다.

‘패딩턴 탓만 할 순 없을지도.’

레티시아는 패딩턴이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가족을 위해 희생했는지 알긴 아냐면서 소리 질렀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패딩턴도 어느 정도는 겪었을 것이다.

“이건,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조용히 처리하도록 하겠어요.”

패딩턴이 관직을 내놓는 선에서 이 일을 해결하는 게 한때 레티시아를 착취했듯 지금은 패딩턴에게 기생하고 있을 가족 전체에게 해 줄 수 있는 레티시아의 마지막 배려였다.

* * *

패딩턴을 조용히 파직시켜 달라는 레티시아의 얘기를 들은 미카엘은 잠시 말이 없더니,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왜 이 정도에 만족하려고 하지?”

“네?”

“좀 더 벌을 주고 싶을 텐데. 이건 사실상 특혜잖나.”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폐하께서 제 부모님을 모르셔서 그래요.”

“……?”

미카엘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과자가 되면, 패딩턴은 멀쩡한 직장을 가질 수 없겠죠. 그럼 자연히 부모님도 패딩턴에게 기대지 않게 될 거예요.”

“그래, 힘들게 일해야겠지. 그게 싫은 건가?”

“아뇨. 그다음으로 멀쩡한 자식은 바로 저니까요. 다음 타깃은 제가 되겠죠.”

“하지만 레티시아, 네 부모가 찾아오는 족족 처벌하는 방법도 있어. 왜 굳이 그들을 배려하지?”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저는… 제 가족이 평생, 저렇게 살기를 원해요. 그게 제 나름의 복수예요. 저는 여기서 이렇게 잘 살고 있고, 제 가족은 저렇게 살면 평생이 불행할 테니까요.”

사실, 레티시아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솔직히 레티시아가 지금 책임진 게 아무것도 없다면 패딩턴에게 훨씬 잔인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는 완전히 받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곧 자신이 두카트의 사장이라는 걸 만천하에 공개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자선 사업도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비서라는 점은 여러모로 공격당할 만한 요소였는데, 자선 사업자가 가난한 부모를 매정하게 내쫓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레티시아는 물론 두카트 전체가 타격을 받을 만한 문제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복수를 하느라 미래가 저당 잡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미카엘에게 정확히 말을 하지 않은 건, 그가 이미 숱한 황족을 살해했으며 제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늙은 부모를 모질게 쫓아내는 정도의 문제로 오명을 걱정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알겠다. 네가 바라는 대로 했겠지. 허나…….”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네가 저런 하잘것없는 자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저런 자들이 너를 괴롭히기 전에 말해 주면, 알아서 처리해 주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드릴게요.”

레티시아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미카엘의 말에 숨은 칼날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미카엘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힘든 일이 더 일어나겠지. 그때마다 네 스스로 처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만 해도…….”

갑자기, 깨달음이 레티시아를 엄습했다. 미카엘은 지금 그녀의 골칫덩어리 가족이나 비서로 일하면서 숱하게 겪어 왔던 진상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제 사업, 이미 알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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