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여태까지 고생하며 숨겨 온 보람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저만 항상 바보가 되네요. 항상…….”
미카엘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 아예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의 목소리에선 원망이 뚝뚝 떨어졌다. 미카엘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내가 아는 걸 원하는 것 같지 않길래.”
“숨기려고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폐하께서 이미 알고 계셨는데도 모르는 척을 하신 거라니……. 그럼, 제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레티시아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 가지 질문이 남아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미행했느냐고. 아직도 뒤에 감시가 붙어 있냐고.
미카엘이 그 말마저 긍정한다면, 레티시아는 더는 미카엘 곁에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해야 했다. 걱정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일부러 자신의 뒤를 밟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더군다나 레티시아는 그동안 두카트를 운영하는 이중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미카엘이었다는 점 정도야 알았을 텐데, 그녀에게 언질 한번 주지 않았다는 점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네가 걱정이 되어서, 믿을 만한 자에게 눈치채지 못하게 해 달라고 경호를 부탁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알게 된 정보를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더군다나 네가 숨기는 일을.”
레티시아는 살짝 어이가 없어 미카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녀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한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그녀를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진면목을 아직 몰랐을 때의 일이었다.
장장 10년을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의 이야기.
“제가 두카트 때문에 그만두려 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겠네요?”
“…….”
“이런.”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붙잡으면, 붙잡힐 거라고 생각하신 거군요. 다른 이유보다는 제가 두카트에 전념하고 싶었던 게 문제였으니까.”
“처음 알게 되었을 땐, 어차피 수그러들 한때의 유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크더군.”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은 지금의 두카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한번 시도했다가 망했던, 예전의 두카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 알고 있었구나.’
실망, 두려움, 분노……. 그 무언가를 느끼기엔 레티시아는 이미 미카엘을 너무나 잘 알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셨군요.”
“…….”
레티시아는 잠시 고민했다.
미카엘에게 자신의 계획을 충동적으로 알리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다간 어느덧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폐하, 조만간 제가 두카트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공개할 생각입니다. 폐하께도 누가 가겠지만… 그리고 제가 잃을 게 뭔지도 알지만……. 그래도 공개하려고요.”
레티시아는 지금 미카엘의 허락을 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통보였다.
아무리 미카엘이 상사이자 황제라고 한들 레티시아는 그에게 종속되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군.”
“……!”
미카엘은 놀란 레티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걱정은 돼. 네가 표적이 될 테니 걱정은 된다만…….”
“폐하.”
“하지만 여태까지 그렇게나 열심히 숨겨 왔던 일을 겨우 나 하나 알았다고 밝히려는 건 아니겠지. 다른 이유들이 있을 테니, 네 결정이 옳다고 생각한다.”
“…….”
레티시아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테렌스 경과의 대화를 미카엘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폐하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건가요? 제가 두카트의 사장이라는 걸?”
“그것까진 내가 알 수 없지. 이 제국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본 게 아니니. 그리고…….”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반응을 살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네가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는데. 틀렸나 보군.”
레티시아는 한결 안도했다. 미카엘은 아직 테렌스 경과 그녀가 일종의 동업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래, 겨우 어제 나눈 대화까지 어떻게 알겠어.’
미카엘은 다시 본디의 화제로 돌아갔다.
“기왕 발표를 한다면… 최대한 성대하게, 발표식을 여는 게 좋겠어. 원한다면 황궁 연회를 주최해 주지.”
레티시아는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저흰 작은 회사고, 다 평민이라서요. 반발만 심해질 거예요.”
레티시아는 굳이 테렌스 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업 파트너이긴 했지만, 두카트의 일원은 결코 아니었다.
미카엘의 눈썹이 조금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꿈틀거렸지만, 레티시아는 이제 예전처럼 미카엘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에 그가 어느 지점에서 불편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황궁이 아니라도…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 신분에 상관없이 네게 도움이 될 자라면 누구든지 초대장을 보내고. 근처에서 얼쩡대는 아이들과 부랑자들에게도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내라.”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카트의 자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굳이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카엘이 제시하는 방안은 황제의 비서라는 그녀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어린 시절처럼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려다, 마치 시뻘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손을 뗐다.
“누구도… 누구도 널 넘볼 수 없게 해.”
반절 쉰 미카엘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도 간절하게 들렸다.
“무시당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티시아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테렌스 경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미카엘의 의견은 일견 타당하게 들렸지만, 앞으로 그녀의 사업 파트너는 테렌스 경이었다. 당연히 테렌스 경의 의견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폐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테렌스 경은 도무지 방금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
“엄청난 특혜로 보일 겁니다. 돈은 우즈 양께서 쓰신다 하더라도, 당연히 황실의 돈처럼 보이겠죠. 두카트의 뒷배가 황실이라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것 같았어요.”
“…….”
던워디 백작의 차남, 테렌스 던워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느껴졌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황제는 분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레티시아 우즈를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 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 모르시는 거 같았어요.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참 다행이죠. 폐하께선 저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으시거든요.”
레티시아의 말은 얼핏 들으면 자랑 같았지만, 도리어 구슬프게 들렸다. 테렌스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한때 그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검술 교관이었기에.
‘우즈 양을 안심시키는 데까진 성공하셨군.’
테렌스는 예전에, 자신이 가르쳤던 맹렬한 소년 황태자를 떠올렸다. 모두가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지만 테렌스만큼은 다르게 생각했다. 황태자는 그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흡수했으며 놀라운 응용력을 보여 주었다.
테렌스는 분명 황태자가 다른 스승을 두고 있다고 의심했으나 꼬리를 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설령, 스승이 따로 있다고 한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천재가 분명했다. 테렌스의 예상대로, 황태자는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황권을 걸머쥐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일개 백작의 차남에 불과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사실 연회는 본디 테렌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미 레티시아가 두카트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입지를 다지기 위한 연회를 열기 위해 던워디 백작가의 자금을 끌어모으던 중이었다.
분명 우연이 아니라고, 테렌스의 온 감각이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탁월한 방안이군요. 역시 폐하십니다.”
“경께서 동의하셔서 다행이에요.”
테렌스는 레티시아가 한결 안도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반대했다면, 레티시아는 황제와 동업자 사이에서 제법 골치 아픈 상황에 휘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결국엔 폐하를 선택했겠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어딜 보나 자신은 일국의 황제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테렌스는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포기할 사람이었다면, 지난 4년 동안 아무런 대답 하나 없는 선물을 계속해서 보내는 동안 진작 포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연회는 저희 가문의 사택에서 여는 게 어떻습니까? 일 년에 몇 번 쓰지 않으면서도 위치가 좋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 폐를 끼칠 수는…….”
“폐가 아닙니다.”
테렌스는 좀 더 강하게 레티시아를 몰아붙였다.
“앞으로 그곳은 저희가 함께할 사업의 근거지가 될 겁니다. 두카트와는 분리된 자선 사업을 저와 함께 시작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두카트의 건물을 빌리는 게 오히려 더 폐가 될 텐데요.”
마침내, 레티시아 우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렌스 던워디에겐 인생을 걸어도 남을 만큼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