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Chapter 10. 만족하십니까?
레티시아는 연회 준비가 모두 끝난 거대한 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던워디 백작가의 사택이었기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대하다고는 할 수 있는 홀이었다.
높아진 레티시아의 눈에 걸맞게 자본을 투입하여 준비하니, 웬만한 대귀족의 연회 부럽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만족하십니까?”
테렌스 경이 레티시아의 등 뒤에서 물었다.
“그럼요.”
레티시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른 준비도 다 저희에게 맡겨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경의 힘을 빌리면 빌릴수록 연회를 연 이유가 사라지니까요.”
레티시아는 완곡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본디 이 연회는 그녀의 사업 뒤에 미카엘이 있는 것처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던워디 백작가의 자금이 아닌, 레티시아 자신의 사비가 투입되어야 한다. 미카엘은 황실의 자금을 운용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레티시아는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두카트의 재정이 탄탄한가 보군요.”
“제가 개인적으로 모아 둔 돈이 제법 있어요. 여기에 다 털어 넣었지만.”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받은 돈은 대부분 두카트에 투입되었다. 이 연회를 최대한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레티시아는 남아 있는 자신의 돈을 모두 사용했다.
“도박이군요?”
“네. 저는 항상 도박에서 성공했거든요.”
미카엘과 관련된 도박만 빼면.
레티시아는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테렌스 경은 몰라도 될 문제였다.
테렌스 경이 미소 지었다.
“승리의 여신이 여기에 계셨군요. 저도 승리해 보겠습니다.”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레티시아가 초대한 사람들은 그 위치에 상관없이 모두가 빠짐없이 참석했다. 레티시아는 개중 절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몇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슈베러 교수라든가.
슈베러 교수는 여전히 사교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모험하는 심정으로 초대장을 보냈었다.
레티시아 본인의 신분조차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슈베러 교수는 단지 본인의 흥미만을 위해 이 연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레티시아의 얼굴을 아는 자는 이 중에 얼마 없다.
제국 각지에 초상화로 제작되어 휘날리는 미카엘과는 달리, 자신은 미카엘을 알현하는 사람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덤에 불과했다. 그런 것치고 이름은 그럭저럭 유명했던 듯하지만.
잠시 후, 모두의 착석이 끝났다.
레티시아는 조금 전까지만 뒤집어 놓았던 자신의 명패를 바로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두카트의 사장, 레티시아 우즈입니다.”
“……!”
경악에 질린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개중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흥미 없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저들은 이미 그녀가 두카트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던 자들이다.
황궁에 드나들 정도로 신분과 재산이 보장되어 있는 귀족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안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초대한 자들은 부유한 평민과 하급 귀족, 차후 사업 확장에 도움이 될 듯한 자선가, 학자, 기자 등이었다. 레티시아의 얼굴을 아는 자는 슈베러 교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저들이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확인해야겠어.’
레티시아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살피며 즐거이 말을 이었다. 두카트의 연혁과 그 가능성, 앞으로 어떤 회사가 될 터인지, 그리고 그녀가 계획한 자선 사업과 테렌스 경과의 협업까지도…….
하지만 그 말을 제대로 들을 만큼 정신이 있는 사람은 얼마 없는 듯했다. 레티시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사방에서 질문이 터져 나온 걸 보면.
“황실에선… 이 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럼요.”
“어떻게 일을 병행을…….”
“잘할 수 있습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군요.”
레티시아는 예상했던 질문들에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궁금한 점은 따로 있을 것이다. 결국 두카트의 뒤에 황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하지만 아무도 감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 사실은 제법 다행이었는데, 이 연회의 목적 자체가 그들이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들게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물어 온다면 레티시아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슈베러 교수가 우아하게 손을 들어 올린 건.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카엘의 즉위식에서 슈베러 교수와 마주친 이후, 2년 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기에 반가웠으나 어떻게 허를 찔릴지 몰라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우선 초대해 주어서 고마워요. 이렇게 재미있는 자리를 놓쳤다면 아쉬웠을 것 같거든요.”
슈베러 교수의 날카로운 눈이 반짝 빛났다.
“궁금한 점은 많다만… 여기가 그저 사소한 호기심을 배출하기에 어울리는 자리는 아닌 것 같군요. 한 가지만 묻겠어요. 어차피 저 같은 빈털터리를 초대해 주신 걸로 보아 돈 많은 후원자들만을 원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우즈 양이 계획하고 있는 자선 사업에 저도 끼워 줄 수 있는가요?”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슈베러 교수는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손을 든 게 아니었다. 오히려 도와주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 그럼요. 영광입니다.”
슈베러 교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녀의 목적은 달성했다.
사람들의 화제는 순식간에 레티시아의 위치에서 슈베러 교수가 두카트의 새로운 사업에 참여한다는 사실로 옮겨 갔으니까.
연회가 끝난 이후에도 슈베러 교수는 계속해서 자리에 남아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했기에 소수의 인원만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했다.
당연히 테렌스 경도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슈베러 교수는 연회장에서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선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비밀리에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여태까지 해 온 것처럼.”
레티시아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시선을 다시 올려 슈베러 교수와 눈을 맞추었다.
“저는 언제까지나 폐하의 비서로 남을 생각이 없어요.”
“…통역사를 뽑니 어쩌니 하던 게, 그냥 해프닝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네. 생각처럼 잘되지 않아서 제가 아직 자리에 앉아 있지만요.”
“언제라도 마땅한 후임자가 나타나면 떠나겠다?”
“비슷해요.”
“그래서 미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거군요. 아니, 보내 달라는 시위에 가까우려나요?”
“…….”
“이런, 곤란하면 대답하지 말아요. 나이가 드니까 괜한 호기심이 많아진다니까. 그래서 정확히 뭐부터 시작하고 싶은 거죠? 아까 들어 보니까 아주 원대하던데.”
레티시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동 교실을 키우고 싶어요.”
“이동 교실?”
슈베러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 교실은 그녀가 어린 시절 글과 간단한 산수를 배웠던 곳으로, 시골 마을마다 반년씩 머물렀다가 다른 마을로 옮겨 가곤 했다.
국가적인 정책이긴 했으나 아무도 시골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명목상의 제도에 불과했다.
레티시아는 그 이동 교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네. 무언가 새로운 걸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지금 있는 제도를 이용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테렌스 경이 입을 열었다.
“우즈 양,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우즈 양은 충분히 정책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어디까지나… 폐하의 말을 전달해 주는 입장에 불과해요.”
“우즈 양, 저도 우즈 양이 일하는 모습을 꽤 오래전부터 봐 왔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글쎄요, 이 자리에 계시는 두 분이 보신 저야말로 그저…….”
레티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미카엘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레티시아는 암암리에 중요한 일들도 맡아 왔다.
당연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횡령이나 더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사형수 명단에 슬쩍 끼워 두는 악행도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레티시아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 한들 항상 그녀를 붙잡고 싶어 했던 미카엘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제 그런 일들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지금은 말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미카엘의 의사를 전달해 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원랜, 미카엘이 했어야 할 일들이었으며 레티시아는 영원히 그의 비서로 머무를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폐하께 말씀 정도야 올릴 순 있지 않습니까. 평민들의 교육에 황실이 신경을 써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여태까지 없었을 뿐이지.”
테렌스 경이 진지하게 물어 왔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선 이미 너무나 많은 걸 책임지고 계시니까요. 굳이 저까지 무언가를 얹어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의 미카엘은 마치 비탈길의 꼭대기까지 힘겹게 밀어 올리면 또 굴러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옛 이야기 속 죄인과 비슷했다.
멈출 수 없는 끊임없는 발버둥.
여태껏 레티시아가 그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였고, 이제는 레티시아가 그를 떠나고자 하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