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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150)

75화

첫 자선 사업으로 유명무실했던 이동 교실을 강화하겠다는 레티시아의 결정은 뜻하지 않는 성과를 낳았다. 바로 레티시아와 두카트는 물론 던워디 백작가의 뒤에 황실이 있다는 대중의 착각이었다.

당연히 몇몇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중 감히 미카엘에게 간언할 만큼 간이 큰 자도 없었다. 따라서 레티시아는 물론이고 던워디 백작가 또한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이동 교실을 최소한 수도의 상설 학교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레티시아의 계획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돈이 있으니 기존의 이동 교실보다 몇 배는 아이들의 교육에 충실한 이동 시설이 완공되었고, 실력 있는 교사들을 고용할 여유 또한 충분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교사가 없대.”

레티시아는 멍하니 입을 벌리며 베스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가겠단 교사가 한 명도 없대.”

베스가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무심한 체하려 했지만 레티시아와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베스 역시 지금 제법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수소문은 해 봤지.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기존 교사들은 가려고 하지 않아. 이동 교실은 그만큼 힘든 일인 데다 어떨 땐 강도들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니까. 특히나 이번에 네가 계획한 이동 교실은… 사치스러운 수준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사치스럽다니!”

“레티시아 우즈, 10년 동안 많이 컸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충분히 사치스러운 행렬이야.”

당황스럽게도 레티시아는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수도의 상설 학교, 개중에서도 질이 떨어지기로 유명한 몇몇 학교 정도로 간신히 이동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충분히 표적이 되고도 남을 만큼의 행렬이 될 것이다.

귀족도 뭣도 아닌, 아이들에게 산수와 작문 정도를 가르쳐 온 교사들이 겁을 먹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예상했어야 했다.

레티시아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연히 제국 최고의 용병들을 고용할 생각이야. 그걸 알려 준다면…….”

“그래 보았자 결국 용병이지. 목숨이 위험할 지경이면 줄행랑을 칠걸?”

레티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베스의 말이 완전히 납득이 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동 학교 행렬에 달려들 자들은 가난하고 절박한 자들일 뿐. 용병이 날이 번쩍이는 칼만 빼도 놀라서 뒤로 자빠질 것이다.

하지만 베스는 레티시아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점을 알려 주었다. 이동 학교는 이대로는 단순히 사치스러운 행렬일 뿐이다. 도적들의 타깃이 되어도 전혀 할 말이 없는.

레티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가겠어.”

“……?”

“내가 직접 가겠다고. 너무 놀라지는 마. 수도 인근까지만 동행할 테니까.”

레티시아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 만약 이 사업의 책임자인 자신이 함께한다면, 이동 교실을 단순히 두카트의 재력 과시나 황실의 선심으로 보는 시선은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용병들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지.’

물주가 바로 옆에 있는데, 미적지근하게 행동해 물건을 다 털릴 바보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용병들을 관리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자신과 테렌스 경의 사비가 들어갔다. 이미 튼튼한 사업체가 있는 레티시아야 부담이 덜했지만, 아무리 부유하다 할지라도 가문의 차남인 테렌스 경에겐 제법 큰 도박이었다. 적어도 시작이 제대로 되는지만큼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야 할 터였다.

하지만 베스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인지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레티시아, 네 일은? 이건 그냥 시범 사업에 불과해! 두카트가 훨씬 중요하다고!”

“…내겐 중요해. 그리고 겨우 며칠 정도 머무르다 돌아올 계획이야. 그 정도쯤이야, 내 부재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이 많을걸?”

베스는 왜 겨우 이동 교실 따위가 그렇게 레티시아에게 중요한지 물을 사람이 아니었지만, 레티시아는 만약 이유를 묻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열 가지도 넘는 이유를 댈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레티시아가 스스로 삶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 준 지식이 바로 이동 교실에서 배운 글과 간단한 산수였으니까.

만약 이동 교실에서 배운 지식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자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레티시아가 살던 시골 마을과 달리, 수도는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나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일자리를 구할 때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남에게 써 달라고 일일이 부탁해야 했다면, 남에게 빚지고 살 수 없는 성격이었던 자신은 애초에 구직을 제대로 시도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돈을 더 주겠다고 하면 돼. 돈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니까.’

베스가 따지듯 한 차례 더 물었다. 이번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 듯, 제법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그럼 황제 폐하는?”

“…….”

레티시아는 베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미카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어진 지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을 한 명 더 늘려서 좋을 게 없었다.

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테렌스 경을 보내.”

“황실 임무를 받아서 지금은 서부 국경에 가 있어.”

서부 국경에서 굶주리던 주민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미카엘은 그들에게 식량을 보내는 동시에 혹여 민란으로 번지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실 소속 기사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 테렌스 경의 이름이 임무 명단에 올랐다는 건 의외였지만, 하급 기사들을 지휘할 수 있을 만큼의 베테랑 기사 중 남은 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선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던워디 백작가엔 아들이 한 명 더 있잖아.”

“얼굴 한번 본 적 없어. 그리고 나는 테렌스 경과 약속을 했지, 던워디 백작가 전체와 손을 잡은 게 아니야.”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형이자 던워디 백작의 후계자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던워디 백작가의 공식적인 얼굴은 던워디 백작이었고, 레티시아와 연이 있는 자는 테렌스 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가야 해.”

이동 교실의 첫 번째 목적지, 페르 공작령은 레티시아가 무척 잘 아는 곳이었다.

호르헤 경의 조카이자 그를 완전히 실각시킨 미카엘의 정적, 일리야 페르 공작이 다스리는 곳.

미카엘은 그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 했으나 페르 공작이 약삭빠르게도 미카엘의 승리를 파악하자마자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납작 엎드린 탓에 크게 칠 기회를 잃어버렸다.

물론 페르 공작가는 중앙에서의 위력은 완전히 잃었지만, 그 막대한 부는 조금 축소되었을 뿐이었다. 제국에 일어난 피바람에서 전 일가가 몸을 안전히 지킨 것에 대한 대가로는 약소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가가 여전히 부유하다 하여도 영지민들에게 그 부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페르 공작령은 수도 바로 인근임에도 불구하고 이동 교실이 필요한 마을이 여섯 군데는 되었다. 레티시아는 수도에서 가까운 세 마을만 직접 감시 감독한 이후, 다시 수도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레티시아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된 말 위에서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동 교실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려면 무엇보다도 대상 마을들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나쁘지 않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도로부터 흘러나온 소문을 들은 듯한 구경꾼들이 많이 모인 걸 보니, 자신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반응이 냉랭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유심히 구경꾼들을 살피던 레티시아의 몸이 별안간 뻣뻣하게 굳었다.

페르 공작령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남자가 개중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르헤 경……?”

레티시아의 입에서 그녀 자신에게도 어느덧 생소하게 들리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미간에 주름이 제법 진 중년의 남자는 레티시아를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고집 센 입매, 당장이라도 주군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탄탄한 몸은 분명 레티시아가 한때 잘 알았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레티시아는 말을 곧바로 멈춰 세웠다. 당연히 행렬 역시 그녀에 맞추어 멈추었다. 깜짝 놀란 수군거림이 군중들 사이에 퍼져 나갔으나 레티시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딱딱하고 근엄한 목소리는 세월의 때를 타기는 했으나 역시 레티시아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호르헤 경!”

레티시아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당황한 용병들이 그녀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호르헤 경은 잠시 뒷걸음치다가, 무슨 생각인지 가만히 멈추었다.

“…오랜만이군, 우즈 양.”

“……!”

뜨거운 기운이 목을 까슬하게 덮었다. 레티시아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감정 탓에 입을 열지 못했다.

호르헤 경이 고개를 돌려 용병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자들은 물려 주었으면 좋겠군. 우즈 양이 나를 믿을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럼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호르헤 경을 믿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믿겠는가.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을 따뜻한 마차 안으로 안내했다. 가까이서 보니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호르헤 경에게도 녹록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연히 느껴져 마음이 씁쓸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보온병에 든 따뜻한 물을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가, 호르헤 경이 대뜸 꺼낸 말에 사레들려 크게 콜록대고 말았다.

“폐하께선… 이제 말을 제대로 하시는 건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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