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숨긴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호르헤 경은 자신의 반응을 통해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알현실 전체에 울려 퍼지던 또렷한 음성이 마차를 꽉 메웠다.
“네.”
그동안 호르헤 경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을 상상해 왔기 때문인지 대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비록 호르헤 경이 먼저 눈치챌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호르헤 경이 눈치채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미카엘의 비밀을 알려 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분간은 숨겨야 하는지 계속 갈등했을 것이다.
“…….”
침묵이 흘렀다. 호르헤 경의 얼굴이 미묘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호르헤 경은 강직한 기사였으나 지난 10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을 터였고, 나이 역시 적지 않았다. 충격으로 쓰러진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전하께서…….”
“폐하예요.”
레티시아는 부드럽게 호르헤 경의 말을 정정했다. 호르헤 경에게 미카엘은 어디까지나 그 어렸던 황태자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터이니 당연한 말버릇이었지만, 남이 들었다간 괜한 불경죄로 고발당할 수도 있었다.
호르헤 경은 잠시 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깨가 아주 약간 들썩거렸다. 레티시아는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호르헤 경은 금세 안정을 되찾더니, 레티시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당연히 모두 미카엘의 안위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레티시아는 최대한 성실하게 답하려 노력했다. 호르헤 경이 목숨을 걸고 미카엘을 위해 도박한 지 10년이 흘렀다. 그가 궁금해하는 건 그 무엇이든 알려 주고 싶었다.
‘미카엘이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레티시아는 불가능한 상황을 슬쩍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호르헤 경이 미카엘을 만났다면 얼마나 반가워했을까.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이 새로운 작위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잠적해 버렸을 때 미카엘이 얼마나 상심해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지난 2년간 미카엘은 호르헤 경이 더는 그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티시아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비난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호르헤 경의 충심이 예전 같았다면 진작 황궁에 복귀했을 터이니.
하지만 레티시아는 오늘, 이 자리에서 미카엘의 추측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르헤 경은 미카엘을 더 이상 주군으로 모시지 않아 황실로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단지, 미카엘의 측근으로서의 삶을 거부했을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미카엘의 즉위와 그 이후 이어진 잔혹한 숙청에 질려 매일 밤을 울며 보냈으니까.
마침내 질문 세례를 끝낸 호르헤 경은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었다. 그는 갑자기 쏟아진 새로운 정보들을 정리하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채 천장만 골똘히 쳐다보았다.
레티시아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폐하께서 이제 말을 잘하신다는 걸.”
호르헤 경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우즈 양이 여기까지 혼자 오도록 내버려 두었으니까.”
“……?”
레티시아는 당황하며 호르헤 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레티시아가 미카엘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좀 더 어울릴 듯한 이유였다.
호르헤 경이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께선 우즈 양을 이제 덜 의존하시는 거지. 좋은 일이야.”
“의존까지야…….”
호르헤 경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의 폐하는……. 우즈 양이 없으면 수프 한 숟갈 떠먹으려 하지 않았어. 우즈 양이 와야 폐하의 하루가 시작되었고, 우즈 양이 가면 그걸로 끝이었지.”
“그런 것치곤 어릴 적에도 황태자 궁 안팎을 지나치게 잘 활보하시지 않았나요?”
“잘 생각해 보게. 그분의 목적지는 항상 우즈 양이었어.”
“……!”
금안이 흔들렸다. 호르헤 경의 말이 맞았다. 진정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의 미카엘은 분명 자신을 크게 의존했다.
반대로, 미카엘이 그녀를 의존하지 않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말문이 트이던 시점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미카엘은 호르헤 경이 황태자 궁을 억지로 떠나던 바로 그 시점부터 말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안다고 달라지는 점은 없었지만 괘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즈 양.”
“네?”
“내가 조만간 폐하를 뵐 수 있도록 도와주겠나?”
“……!”
레티시아의 눈이 커지더니,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에 잠겨 정오의 태양처럼 반짝거렸다.
“그럼요! 폐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그동안 정말… 그리워하셨거든요.”
“…그동안 불충하게 굴었으니 염치가 없지만, 부탁하겠네.”
“호르헤 경이 불충하다면 대체 폐하께 충성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레티시아는 웃었지만, 호르헤 경은 웃지 않았다.
* * *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레티시아가 세운 목적은 단 하나였다. 마을의 모든 아이들이 이동 교실에 출석하는 것.
촌장을 구슬려 열네 살 이하 아이들의 명단을 입수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이동 교실에 자발적으로 나오게 만드는 건 다른 문제였다.
레티시아가 그랬듯, 시골의 아이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려 이동 교실이라는 귀한 기회가 있어도 참여하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시골의 문맹률은 데브란트 제국의 부강함을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수준으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레티시아는 부모 운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간단한 셈은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이동 교실만큼은 보내 주었으니까.
레티시아가 있는 동안은 황제의 비서로서 아이들의 부모를 윽박질러 내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없어도 충분히 효력을 발휘할 방법을 원했다.
“무조건 선물을 하나씩 들려서 돌려보내세요.”
“겨우 더러운 꼬마들을 위해서 말입니까?”
“제국을 위해서죠.”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그녀의 뒤에 미카엘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레티시아의 생각이 옳았다.
이동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든든하게 점심을 먹이고 수업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옆 마을에서까지 아이들이 찾아왔다.
개중 이미 몇 년 전 이 마을에 들렀던 이동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아이들도 있었다.
이 경우를 대비해 초급반과 심화반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은 각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그 옛날 어렸던 자신이 받은 주먹구구식 교육이 아닌, 체계적으로 셈과 읽기, 쓰기를 하는 법을 배우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배우고 싶어서 눈을 반짝 빛내는 아이는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준비된 선물을 받기 위해 교실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지루해서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레티시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동 교실은 단순한 지적 만족감을 위한 교육 시설이 아니었다. 이 아이들이 최소한 계약서에 적힌 글자가 무엇인지 읽을 수는 있게, 월급을 받으면 기존에 약속한 금액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게 교육하는 생존 시설에 가까웠다.
심화반에서는 기존 이동 교실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과목을 하나 새로이 가르쳤다.
바로 기본적인 금전 관리였다.
레티시아의 예상대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루해서 꾸벅 졸던 아이들이 허리를 꼿꼿이 펴며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모두가 벼락을 맞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을 수는 없는 법이지만, 적어도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줄 수는 있었다.
* * *
호르헤 볼머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했다. 한때 자신은 이 거대한 궁을 무심히 걸어 다녔다. 하지만 10년 만에 돌아오니 황궁의 위압감에 질려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군.’
씁쓸한 생각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 자신이 늙어 가는 동안 예전에 목숨을 걸고 지키던 어린 황태자는 이제 자라나 대륙 전체가 두려워하는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호르헤는 지금, 황제를 격노시키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를 품에 안은 채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예요.”
“고맙다.”
호르헤는 레티시아가 안내하지 않아도 집무실의 위치 정도는 안다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감사를 표했다.
레티시아가 문고리의 바로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저는… 밖에 있을게요. 두 분이서 얘기하세요.”
“아니.”
호르헤는 고개를 저었다.
“우즈 양도 들어야 해.”
“……?”
레티시아 우즈는 다소 의외라는 듯 놀란 얼굴로 호르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달칵.
문이 열렸다.
호르헤는 천천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호르헤는 한눈에 자신의 주군을 알아보았다.
“…폐하.”
회한이 말을 타고 흘러넘쳤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호르헤.”
전율이 호르헤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어떤 변명으로 숨기려 노력해도 자신은 미카엘의 입에서 나오는 저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그간의 은둔을 깨트리고 레티시아 우즈의 행렬을 방해했다.
미카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마디씩 끄집어내었다.
“그대가 일전에 내게 해 준 모든 것…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겠지.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정말…….”
정말 기쁘고, 영광이며,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호르헤는 개중 무엇 하나 제대로 말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이곳으로 온 목적을 입 밖으로 꺼냈다.
“폐하,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페르 공작의 수하가 되었습니다.”